설교

설교(눅15:1-7) : 구원받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stevision 2012. 11. 29. 11:08

 

(2007년 11월 14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구원받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English
말씀: 눅15:1-7

  

 

 >>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베드로가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들과 함께 왔던 말고라는 자의 귀를 칼로 잘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일을 했던 베드로를 꾸짖으시고 친히 그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만약 이 때에 베드로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 지극히 신사적인 행동과 말로 “당신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니 어서 돌아들 가시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물론 그 때에도 군사들이 예수님을 강제로 연행해갔겠지요.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았던 베드로가 “어허! 당신들 그러면 안된다니까! 예의를 지키시오!”라고 말하며 예수께서 잡혀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고 합시다. 당신이 예수님이라면 전자의 베드로가 좋습니까, 아니면 후자의 베드로가 좋습니까?

당신 아내가 당신이 깡패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데도 기독교인답게(?) 점잖은 말투로 “여러분, 당신들 우리 남편 패면 안됩니다”라고 하며 당신이 맞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 상황이 당신에게 기분이 좋소? 아니면 당신이 맞고 있을 때 당신 아내가 기독교인의 체면 다 잊고 옆에 있는 작대기를 들고 당신을 두들겨 패는 깡패의 등을 내리치는 게 당신에게 기분이 좋소?

예수께서 베드로가 칼로 말고의 귀를 자르자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며칠 전에 설교 중에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칼로 원수들을 무찌르라 명하시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어떤 일의 경우 인간이 칼로 하나님을 도와 무슨 업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칼로 기독교를 세우는 게 아니지요. 또 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위험에서 구한다는 게 좀 우스운 일이기도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제자로서 예수님을 해치려는 자를 칼로 위협한 것은 지극히 정당하고 정상적인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 하신 것은 베드로가 계속 검을 가지고 날뛰다가 군사들에게 죽을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어서 예수께서 그리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 상황은 베드로의 칼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 칼 사건의 문제의 핵심은 내가 과연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입니다. 좀 무식하다는 평을 듣더라도 예수님을 위해 베드로처럼 행동하는 게 우리의 본분이 아닐까요?

인터넷에서 기독교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비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능멸 당하는 것을 점잖게 방관만 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더더욱 안될 일은 자신의 종교적 인격의 성숙을 과시하려 예수께서 멸시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점잖게 있는 것입니다. 더더더욱 안될 일은 베드로처럼 행동하는 자를 비난하는 태도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종교적 체면을 지키기 위해, 또 사람들과 언쟁을 벌이는 것이 귀찮아서 예수께서 능멸 당하시는 것을 방관하며 베드로처럼 무식(?)하게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자를 천박한 기독교인이라 비하하려합니까? 당신의 잣대로 함부로 남을 평가하지 마시오. 당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남이 한다고 시기질투하지 마시오. 세상에는 마음이 부패하여 가룟 유다와 같이 저주받은 악역을 하는 자들도 있지만 사랑 때문에 악역을 맡는 자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 큰 사랑을 받았다면 그분을 위해 악역을 감당해도 흠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악역을 감당하는 자가 진짜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악역을 감당한 베드로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물론 악역이라고 해서 죄짓는 악역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베드로는 죄를 진 것은 아니지요. 정당방위는 죄가 아닙니다. 그나마 베드로가 그런 행동을 취했으니 예수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지는 않았겠네요. 베드로가 그러지 않고 그냥 삼십육계 줄행랑 쳤다면 예수께서는 완전히 제자들에게 버림받은 초라한 선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화를 내고 분을 내며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악한 세력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 대항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당연한 본분입니다.

예수님의 본심은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 부탁하신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른뺨을 친 자에게 왼뺨도 대주는 것은 자신이 타인에게 부당하게 고난받을 때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수에게 오른뺨을 맞으실 때 우리는 몸을 던져서라도 그 때리는 손을 붙잡아야 하고,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대신 맞아야 하고, 정 안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그 원수를 격퇴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 모든 체면을 다 버리셨는데, 우리가 예수님께서 능멸을 당하고 계신데도 체면 따위를 생각하여 점잖게 종교인 행세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사람이 무식하여 하나님과 기독교를 비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그 마음이 완전히 마귀새끼를 품고 있어서 악의적으로 기독교와 예수님을 비방하고 능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때 그 토착 거민들을 진멸할 때의 정신으로 우리가 격퇴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거룩한 분노를 품고 의로운 싸움을 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그런 자들의 자손이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될지어다. 그런 자들의 자손에게 부와 명예와 권세가 주어질지어다! 아멘, 아멘!”

제가 위와 같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인터넷 상에서 많은 악인들이 예수님을 능멸하는데도 방관만 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고, 심지어 모든 체면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위해 싸우는 자들을 비판하는 기독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신앙 인격이 당신보다 떨어져서 과격한 단어 사용하며 기독교를 변호하고 예수님의 존엄을 지키려 하는 줄 아십니까? 누구는 당신보다 기도 능력이 부족하여, 성경 지식이 부족하여 그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복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는 줄 아십니까? 남들이 피땀 흘려 닦아놓은 복음의 길을 뒤에서 뒷짐지며 평안히 뒤쫓아 와서는 ‘이 복음 전파는 내 점잖은 기도로 이룩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다면 휴전선을 지키는 병사들의 모든 수고의 혜택을 다 누리면서 ‘우린 거룩한 자들이니 총을 들면 안된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여호와 증인 교도들과 당신이 다른 게 뭡니까?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봅시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되 친히 인간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1절)을 예수께서 영접하셨습니다. 어떤 사악한 정신병자는 예수께서 이런 죄인들을 영접해 주신다며 자기가 지금도 사악한 죄에 빠져 살고 있지만 예수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셨다고 망발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악한 자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7절)”은 건너뛰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현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새 사람이 된 자만을 예수께서 영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애써 부인하려는 자가 바로 그런 사악한 정신병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단과 악인들은 성경 말씀을 다 읽지 않고 고의로 자기에게 불리한 부분을 빼놓고 읽으며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악한 죄를 계속 저지르며 교회 문을 들락거리며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사람들에게 헛소리하는 자들에게 하늘의 저주가 임할지어다!” “사악하고 더러운 동성애 짓을 계속 하며 교회를 다니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예수께서 자기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정신병자들 모두에게 에이즈가 임하여 모두 뼈만 남은 채 죽을지어다! 악녀 이세벨에게 임한 심판이 그들에게 있을지어다!”

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모든 체면을 다 버리면서까지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데 사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죄의 습성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주라고 망발을 늘어놓아 그분을 더욱 능멸하려 하나? 우리는 성전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상숭배 하는 중들과 더러운 동성애자들이 성전에 들어서게 하면 안됩니다. 그들이 자꾸 성전에 들어서면 성령께서 교회를 떠나십니다. 어떤 감리교 목사가 CTS TV에서 “동성애자들까지 교회가 사랑으로 받아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을 할 때 저는 정말 서글프고 원통했습니다. 왜 목사라는 자가 저 모양일까! 왜 동성애자들로 인한 개인의 삶의 파괴, 가정과 사회의 파괴, 그들로 인한 인권 유린, 인권 말살은 왜 생각하지 못할까? 도대체 현대 교회에 무슨 귀신이 씌워져서 교회가 이처럼 눈이 멀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것을 “죽을까 하노라”로 해석한 게 문제지요. 이런 사악한 교회의 범죄는 예전에 창녀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한 목사가 그 창녀들이 매춘행위를 계속 하는데도 교회에 들어와 예배를 드리고 매춘한 돈으로 헌금을 하게 한 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이후로 사악한 동성애자들도 그 더러운 습성을 버리지 않은 채 감히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입니다. 그 목사가 속한 교단에서 그 자를 단호히 파면하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많은 자들이 그 사악한 목회를 한 목사를 ‘사랑이 많은 참다운 하나님의 종’으로 칭송한 것이 문제를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끌고 갔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더러운 습성을 버리지 않은 자들을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자는 사악한 마귀의 종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교회에 다니는 자들은 목사가 몰라서 그냥 놔둔다 치더라도, 자신의 사악한 행위를 다 밝히고 계속 그 짓을 하겠다는 자들을 교회에 머물게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이런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제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입니까(2절)? 실제로 제가 옛날 KBS 자유 게시판에 올린 동성애반대 글을 어느 동성애 정신병자가 자기 블로그에 옮겨 놓으며 저를 ‘현대판 바리새인’이라 비난하더군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알고도 지키지 않고 남에게는 지키라고 가르치는 자들 아닌가요? 그 동성애 정신병자는 성경에 동성애가 죄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자기는 그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하나님 말씀 바로 전하는 저를 바리새인이라고 한 것이지요.

본문 성경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고 계신 자기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비난하자 자기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목자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며 샘도 나고 자신들은 왕따 당한 것 같아 은근히 화도 나서 그들이 그런 푸념을 늘어놓은 거지요. 그들이 보기에 세리들과 죄인들은 사회의 해충과 같은 남들이지만 예수께서는 그 죄인들 중에 당신의 양이 있음을 아신 것이지요.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 죄인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들이 있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남이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잡아먹고 또 지옥으로 끌고 가려 하는 자들이었고, 심지어 양의 목자까지 죽이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였던 거지요.

성경에 결혼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자가 주인에게 쫓겨나 어두움에 던져져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분명 모든 비천한 자들을 잔치에 불러들인 주인의 호의를 능멸하려 잔칫집 분위기를 깨려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 온 자가 어떻게 대접받나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 많으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천국 백성이 되겠다는 자가 옛날의 더러운 습성을 버리지 못하면 가차없이 버림받아 쫓겨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더러운 동성애자들이 더러운 습성을 유지한 채 교회에 숨어 들어와 거룩한 교회를 더럽혀 놓고 또 사악한 죄인들이 교회에 기어 들어와 예수님의 은혜와 호의를 자신들의 더러운 습성을 용인 받는 기회로 이용하려 합니다. 동성애자들을 비롯한 사악하고도 더러운 악인들은 교회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날이 올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 더러운 정신병자들이 교회를 더럽히고 있는 것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오릅니다. 구약 성경에 ‘돌로 쳐죽여라!’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데, ...

죄인들아 회개하거라! 예수께서 하신 첫 번 째 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죄인들아 더러운 습성을 버리거라! 예수의 복음을 듣고도 그 더러운 죄를 계속 지으면 너희들에게 장래 소망이 없단다. 알고도 고의로 계속 죄를 범하면 구원은 영원히 물 건너가고 파멸만 있을 뿐이다.

회개할 때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으며, 회개할 때 구원의 문이 열리며, 회개할 때 의인 99명이 주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나서 죄를 계속하여 지으면 십자가를 능멸하는 행위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고의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죄를 계속하는 짓는 자는 구원받을 가망이 없는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를 신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적어도 고의로 율법조항을 어기지는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 조항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마음의 동기까지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의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삽시다. 오늘 예수께서는 잃은 양들을 찾는 직분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회개하여 옛 더러운 습성들을 버리고 천국백성이 되는 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 때의 기쁨을 맛보라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남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을 얻게 하는 큰 기쁨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죄인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까?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할 때 택함을 받은 죄인들이 회개합니다. 교만하고 건방지게 성경이 분명 죄라 규정한 것을 죄가 아니라고 하든가, 계속 그 더러운 짓을 해도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서 용납하실 것이라 하면 안됩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지극히 불의한 자입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목사나 신학자는 경거망동하면 안됩니다. 성직자들의 경솔한 말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지옥에 갔는지 모릅니다.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더 큰 형벌이 임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죄를 멀리 하시고 진리 가운데 사시고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시어 그분께 큰 기쁨이 되어주시고 그분의 큰 사랑을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