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통성] 국역자 후기
국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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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깊으신 분들 중에 이 와치만 니의 글을 읽으시며 그 자가 혹시 이단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와치만 니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고 존경을 받는 기독교 신학자요 지도자입니다. 그런 자가 한 비판이라면 우리는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개신교 성직자 중에 혹시 이 글을 읽으시며 마음이 언짢은 분이 계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혹시 성직자 제도에 대한 그의 비판 때문이었습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와치만 니와 같이 생각하는 자들이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와치만 니처럼 생각하는 자가 와치만 니처럼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할지 스스로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나(성직자)는 어떤 존재인가? 과연 나는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내가 정말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난 과연 좋은 성직자인가?' 와치만 니의 글을 읽으며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신 분이 계시고, 그가 계시록을 강해한 것을 보며 지금의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바로 찾은 분이 계셨다면, 저의 작은 수고가 귀한 열매를 맺은 것이고, 이는 저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먼저 와치만이 비판한 성직자 제도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와치만은 원래 하나님께서 성직자 제도를 세우기를 원치 않으셨으나,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난 후 레위 지파를 뽑아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와치만은 카톨릭이나 개신교에서 성직자 제도를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성직자들을 니골라당이라 했으며, 형제들로 이뤄진 빌라델비아 교회가 교회의 모범이고 주께서 원하시는 교회상이라 했습니다.
저는 먼저 성직자 제도를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이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계속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성직자 제도를 처음 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보다 수백 년 전인 아브라함 때에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을 두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자기 집에서 가장인 동시에 제사장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보다도 훨씬 이전에 살았던 노아도 가장인 동시에 제사장이었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 외 기타 그들의 가족 중에 제사장 역할을 한 자들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결혼하여 스스로 가장이 된 자들은 물론 가장 겸 제사장이 되었겠지요. 멜기세덱은 여러 가족 신앙 공동체들을 총괄하는 제사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금송아지 사건 이전에도 하나님깨서는 모세를 왕 겸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삼으셨습니다. 다른 자들은 하나님 존전에 가까이 가면 죽었으나 모세만큼은 예외였습니다. 따라서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 누구나 다 제사장으로 임명 안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신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이스라엘인들 중에 아론 집안이 제사장 된 것을 시기하여 그들의 영권에 도전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불에 멸망당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면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와치만의 주장대로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되었습니까? 하지만 성경을 다 찾아봐도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취소하신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취소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 금송아지가 정말 문제였다면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우상숭배를 용서하시고 재차 그분의 약속을 강조하실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와치만이 '제사장'과 '제사장 나라'의 차이를 간과한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 제도를 세우신 이유는 당신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지 않은 자가 당신께 나아오는 것을 금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룩한 제사장을 세워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그분께 나아오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은 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주위의 이방인들 가운데 거룩한 백성이 되어 참 신이신 하나님을 바로 섬겨 그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거룩한 생활을 합니까? 바로 자기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을 통해 거룩하게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법을 배웁니다. 또한 그 제사장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 나라' 안에 '제사장'이 없으면 '제사장 나라'라는 말의 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을 본받아 제사장처럼 살게 됩니다. 이는 현재의 기독교에도 적용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다 제사장이긴 한데, 이는 불신자들에 대해 그렇다는 말입니다. 모든 믿는 자는 자기 위에 제사장(목사님)을 둡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신자들 위에 목사님을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믿는 자들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무리에서든 제사장은 단 한 명으로 족합니다. 전부 제사장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은 제사장 외에 다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권위자(성직자)를 세우신 또 다른 이유는 교회의 치리를 위함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지금에도 교회 안에 악한 무리가 들어와 교회를 파괴하려 합니다. 바로 가라지들이 그들이지요. 교인 행세를 하며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자들을 권위를 가지고 말씀으로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목사님)을 세우셨습니다. 모두가 다 평등한 형제라며 자기들이 다 제사장이라면 어떻게 교회가 운영되겠습니까? 교회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며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잘 조직된 군대는 힘을 한 곳으로 모아 적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성직자 제도와 교파제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군대 조직입니다. 한 국가에 육해공군이 있고 특수부대가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도 여러 다양한 교파와 기독교 단체들이 있습니다. 합하여 선을 이루며 마귀 군대를 무찌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다양한 교파가 필요합니다.
눅10:7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복음전파하라며 파송하시는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바울은 천막장이 일을 하며 자비량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그가 말합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8)."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있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신25:4)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을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 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느니라(고전 9:4-14)." 이로써 바울의 예를 들어 목사님들도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스스로 벌어 생활하라고 하는 것은 비성서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께서 다른 직업을 가지시면 복음전파에 방해를 받게 되고, 성도들을 온전히 지도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기독교 성직자가 다른 직업을 가지라는 와치만의 주장은 성경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바울의 가장 큰 근심거리가 뭐였는지 아십니까? 일부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사도로 인정 안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바울이 자신들처럼 세상 직업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니 그들이 바울을 주의 종으로 여기지 않고 다만 '형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서신서에서 "나는 정말로 예수님의 사도다"라고 얼마나 자주 외쳐댑니까? 예수님의 친형제들도 예수님을 '형제'로만 여겨서 약간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직자들이 온전히 성직에만 종사하도록 성도들에게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우신 것입니다. 성직은 거룩한 '직분이요 직업'입니다.
그러면 과연 니골라당은 누구일까요? 하나님께 부름 받아 주의 종이 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양심껏 목회사역을 잘 감당한 분은 분명 니골라당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고, 성도들에게 마땅히 존경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중재자 계층이 있음을 와치만이 비판했고 그 중재자 계층을 니골라당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합법적인 성직자들은 니골라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니골라당입니까?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지도 않으셨는데 자칭 하나님의 종이라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당한 권세를 부리고 그들로부터 과분한 존경을 받으려 하는 자들이 바로 니골라당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직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이고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인데도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권세를 부리고 존경을 받으려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그들이었지만 그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께서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책망했지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직자는 마땅히 큰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성직자는 명예도 크지만 그 직분을 감당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합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당시의 대제사장이 올바른 자는 아니었으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이어서 (결과적으로) 그의 말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나 바울은 절대로 제사장에게 독사의 자식이라 안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을 뽑아버리시겠다고 하셨는데, 당시에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것은 제사장 직분이었고, 뽑혀야 했던 것은 바리새인들의 사이비 영권(靈權)이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는 지지 않으면서 존경과 명예만 좇는 자들이 니골라당은 아닐까요? 이 경우 물론 성직자나 평신도 다 해당됩니다. 저는 특히 평신도들 중에 니골라당 행세를 하는 자들을 간혹 봅니다. 평신도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나 하나님께서 성직자로 세우지도 않으셨는데 성직자직을 탐내고 성직자 행세를 하는 모습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웃시야 왕이 이런 우를 범했습니다. 평신도들은 하나님께서 그어 놓으신 선을 넘으려 하면 안됩니다.
성직자 제도와 관련하여 와치만이 비판한 것에서 어떤 점을 배워야 합니까? 평신도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자발적인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교만과 특권의식, 월권, (평신도들과 대립하는) 성직자만을 생각하는 집단 이기주의, 파벌의식, 위선적인 삶 등을 조심해야 합니다.
와치만이 카톨릭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특히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상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이단이 등장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회 주교들의 지도를 받아 기독교가 하나의 정통교리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경우 제국의 공권력을 사용했습니다. 이단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로마 제국의 공권력에 의해 제거된 것이지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지 않았다면 현재의 보편적인 기독교 정통교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기독교가 사분오열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과 비교하여 국교가 되었을 때 신자들이 훨씬 더 많아졌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가짜들도 수두룩했겠지요. 하지만 이들은 그나마 교회에 약간의 유익을 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사이비 신자들이었지만 이교도들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종교개혁 이후에 많은 교파가 생긴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일단 기독교 정통교리가 확립되고 기독교가 세계에 자리잡으면 여러 건전한 교파가 나와야 기독교 전체에 유익입니다. 중세 카톨릭의 부패는 구조적인 면, 즉 단일교파와 단일 교권에 기인했습니다. 오직 한 교파만 있다면 내적으로 부패하기 쉽고, 그 교파가 이단이라도 되면 기독교 전체가 공멸하기 때문에,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여러 교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혹시 한 교파가 이단이 되더라도 다른 교파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와치만은 한 지역에 한 교회만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근거를 그는 초대교회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한 지역에 한 교회라는 원칙은 교인수가 극히 적은 지역에만 해당됩니다. 바울 시대에 바울이 그랬고, 와치만 시대에 중국이 그러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단시간에 많은 곳에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황이 바뀌어 오늘의 한국처럼 한 도시에 수천 혹은 수만의 교인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런 때는 한 지역에 많은 교회가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와치만의 주장에서 배울점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무리하게 자본주의 생존법칙을 교회에 끌어들여 문어발 교회와 재벌교회가 등장하여 복음의 참 모습을 가리고 있습니다. 문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머리는 크고(꾀는 많음) 다리는 많은데(신자를 긁어 모으기는 잘 하는데) 가슴(따뜻한 예수님의 마음)은 없습니다. 한 목회자가 한 교회면 족하지 여러 지교회를 두고 자기 휘하의 부목사를 파견하여 재벌총수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 자는 하나님의 종을 자기 종으로 삼으려는 자이고 천국의 상급까지도 독차지하려는 자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심으면 잡초가 돋아나 양분을 다 빨아먹어 곡식을 말라죽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지역에 교회를 심으시면 인근 도시의 재벌 목사가 그곳의 성도들까지 다 긁어 모아 그 새싹교회를 시들어 죽게 합니다. 사랑을 외치는 자가 사랑을 행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하라고 외치는 자가 그렇게 재물과 명예를 탐하면 어찌 주의 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성직자 제도와 교파를 철폐하고 오직 형제들로 이뤄진 교회를 한 지역에 하나만 두어야 한다는 와치만의 주장은 이단일까요? 물론 이단이 아닙니다. 또한 쓸데없는 말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와치만의 말년과 그 이후의 중국 기독교를 고려할 때 그렇습니다. 중국은 공산화됩니다. 공산사회에서 개인의 직업은 국가가 지정해 줍니다. 물론 무신론을 국시로 삼고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주장하는 공산당이 기독교인들이 내세우는 어떤 한 사람을 전임 성직자로 임명할 리가 없습니다. 공산화된 중국에서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 부름받아 목사가 되겠다고 하며 자기 교인을 모으려 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산화된 중국에서 교회가 살아남으려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산주의는 모든 자들의 평등을 주장하고 서로를 '동무(형제)'로 부릅니다. 따라서 모두 서로 형제(동무)라 부르며 각자 다 국가에서 지정해준 직업을 가진 채, 그 중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가 목사가 아닌 형제로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그곳에 필요합니다. 물론 그런 곳에서 교파는 쓸데없는 것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공산화된 중국에서도 교회가 살아남게 하시려고 와치만 니라는 선지자를 미리 보내시어 그 길을 닦게 하셨던 것입니다. 와치만 니는 예수님께서 공산화된 중국 교인들에게 다가가시게 하는 길을 예비한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교회의 정통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특정 교파나 교회 형식에서 찾는 것은 곤란합니다. 누구는 카톨릭 풍을 좋아하고, 누구는 감리교나 장로교 풍을 좋아합니다. 제 경우는 약간 자유로운 신학이 좋습니다. 저에게 앞뒤 꽉 막힌 근본주의 신학만을 강요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어떤 자들은 목사님 없는 형제들로만 구성된 교회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교파나 교회 형식은 성령께서 인간들이 좀 더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배려하셔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의 정통성은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 나왔나 고찰함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려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개인과 교회나 교파가 정통성을 소유합니다. 그러므로 이단교리를 갖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배신행위를 하지 않는 모든 교파나 교회가 정통입니다.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분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이방나라 사람들이 행한 성범죄를 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할례받은 자가 후에 간음을 하면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욕되게 한 것이 되고, 그는 간음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됩니다. 신약에 예수께서는 은혜언약의 증표로 포도주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술을 먹어 난잡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시고 언약의 증표로 포도주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술먹고 난잡한 생활을 하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징인 술(포도주)을 통해 거룩함을 상실했으므로 은혜의 복음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와 개인의 기독교적 정통성은 거룩함이 또한 그 중심을 이룹니다.
그러면 정통교리는 무엇입니까? 대체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그분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정통교리입니다. 보통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와 신자는 정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 종교재판이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파나 교회를 자주 이단이라고 선언하는데,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근본주의 신학자께서는 신신학(자유주의 신학을 말함)자들의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보고 그러한 신학사상을 화염방사기로 다 태워 없애야 한다는 끔찍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신학의 거물인 바르트, 몰트만, 불트만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이겠군요. 하기야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 측에서 루터를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인정하고 용납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정통교리를 갖고 있는 교회에 나간다고 문제가 다 해결됩니까? 정통교리는 정신적인 정통일 뿐입니다. 행위정통이 남아 있습니다. 정통교리 쯤이야 마귀나 귀신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뭘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순종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중에 정통교리를 이해하는 분들이 얼마나 됩니까? 정통교리를 암기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을 다 지옥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교리에 좀 무식해도 누가 구원받습니까?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자"가 구원받습니다. 따라서 고의로 이단사설을 퍼트리는 자는 마땅히 지옥에 가겠지만, 좀 무식하여 교리는 잘 모르더라도 정통 교단에 속한 교회에 나가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산 자는 다 구원받는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정통교리입니까, 정통행위입니까? 정통신앙은 정통교리와 정통행위를 겸비한 것입니다. 정통교리는 정통교단에서 찾을 수 있고 정통행위는 성경에서 규정한 거룩한 삶을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대 교회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요약하여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훌륭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체계 안에 물들어 사는 자들이 교회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 안됩니다. 와치만이 마지막 교회로 라오디게야 교회를 언급했는데, 이는 현대교회의 문제를 잘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고 평신도들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경향이 현대교회에 보입니다.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신자들을 지도하지 않고 신도들의 중론(衆論)을 따라 목회를 하려 합니다. 물론 신자들의 중론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중론으로 하나님의 일을 결정하려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다라'는 그릇된 생각밖에 안됩니다. 중론을 따를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은 중론이라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자리를 걸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려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일입니다. 요즘 성도들은 '자유'를 부르짖습니다. 물론 많은 경우 방종으로 흐릅니다.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말씀을 무시함으로 요즘 미국 교회가 동성애자를 교회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세우기도 합니다. 예수님 대신에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을 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돌덩어리가 간교한 우상인 것을 깨달은 자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민주'를 부르짖습니다. 평신도와 목회자들이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다수결로 교회와 교단 일을 처리하여 세상의 지탄을 받으면서까지 교회세습과 선거부정을 저지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악랄하게 굴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더 이상 소망을 못 두시고 그 교회를 쓸어버리십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멸하시어 그들의 시체를 거름으로 삼으시겠다고 거듭 경고 하셨습니다. 유태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처하며 고리대금업과 매춘업과 무기거래를 하여 떼돈을 벌자 하나님께서 히틀러라는 악마의 화신을 보내시어 그들을 가스로 죽여 태워 독일 농민들의 거름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우상을 섬기는 중들보다 더 존경받습니까? 기독교인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정직하며 사회의 존경을 받습니까? 요즘 성도들은 '주의(主義)', 즉 인간의 뜻과 의지를 중요시합니다. 한마디로 고집이 세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하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어떤 기독교 성직자는 교회와 사회로부터 계속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킵니다. 엘리 제사장의 몸이 비대하여 넘어져 그 들보같은 목부터 부러져 죽었습니다. 평신도나 목회자나 자신의 '주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본래의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다른 책들을 살펴보니 여러 지명들이 지닌 뜻이 와치만의 해석과 약간 달랐습니다. 에베소는 '인내(忍耐)'라는 말입니다.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말입니다. 버가모는 '혼인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두아디라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사데는 '남은 물건'을 뜻합니다. 빌라델비아는 '형제애'를 말합니다. 라오디게아는 '정의'를 뜻합니다. 여기에는 와치만이 주장한 것과 같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뜻을 기초로 하여 현대 한국 교회에 맞게 새롭게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해석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도전해 보십시오. 제가 보기에 와치만이 주장하는 형제교회(형제단)은 이단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교회들을 좀 특수한 교파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교파는 와치만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습니다. 이 교파의 장점은 모든 성도들이 책임 있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고, 단점은 교회 부흥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 나라만을 보더라도 그 교세가 아주 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와치만이 그렇게도 비판했던 '목회 전문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와치만이 극찬했던 빌라델비아의 장점, 즉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도 십여 년 신학공부를 해야 어느 정도 권위를 갖고 도달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만으로 이뤄진 곳에서 그렇게 성경과 신학에 능한 자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와치만의 책을 번역하며 생각한 바는 "교회는 살아 있는 존재여서 경우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스스로 방어하며, 점차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 지금까지 제 졸고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stevisio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