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04. 12. 27. 동아 시사 발언대)
이 삼남매는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이 가정에 불행이 닥쳤다.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이었다. 세 남매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을 것이다. '하나님, 제발 이 병이 낫게 해 주세요. 그래서 두 여동생 뒷바라지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것은 아마도 나사로의 기도였을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하나님, 오빠마저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제발 우리 오빠 좀 구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다. 빨리 오셔서 오빠 병 좀 고쳐달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태평하셨다. 꾸물럭 꾸물럭 늦으신 것이다. 결국 이 삼남매의 간절한 기도소리는 사그라졌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다. 남은 두 여동생들이 얼마나 서글피 울었을까? 나사로 자신은 죽어가며 얼마나 기가막혔을까? 그러나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법이다.
나사로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죽고, 죽은지 며칠 지나 시체가 썩을 때 드디어 기도가 응답되었다. 예수께서 오셔서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응답의 법칙을 발견한다. 애타는 맘 때문에 죽음과 같은 고통이 지나고 맘이 썩어갈 정도의 절망 가운데 계속 기도하면 소망이 없어보이는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그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다.
죽음과 같은 고통, 맘이 썩는 듯한 절망감을 겪고 나면 세상이 달리보인다. 다른 자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들에 대한 애절한 동정심이 생긴다. 그 때 평소에 보잘것 없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소중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때 마음이 깨끗해져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주 가까이 계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고통을 통하여 마음이 깨끗해지고,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때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해 주시고,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이렇게 효과적으로 쓰이는 고통을 왜 하나님께서 사용 안하시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