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여성관
(04. 12. 28. 동아 시사 발언대)
바울이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 말하여 만인이 하나님 앞에 평등함을 말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노예제를 국가 유지의 수단으로 삼은 로마제국 내에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으로서 만인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남녀간의 구별을 말했다. 여자는 남자를 도와주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성부 하나님)이라 했다. 즉, 남자가 가정을 이끄는 지도자이고, 교회에서 여인들은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기보다 겸손한 가운데 교회 남자 지도자들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고 그는 말한 것이다. 혹시 교회에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조용히 자기 남편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바울은 말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바울이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다는 것이다.
일부 여성신학자들은 이러한 바울의 태도가 성차별이라고 발끈한다. 과연 그럴까? 집안에서 자녀와 부모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고 동일한 발언권을 갖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직분에 따라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근육질의 몸을 허락하신 것은 튼튼한 몸으로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 굶기지 말라고 그러신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여성다운 갸냘픔을 허락하신 것은 남자의 보호본능을 부추겨 남편에게 사랑받으라고 그러신 것이다.
바울이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의 형상은 정치적 형상, 사회적 형상을 말한다.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여자로부터 존경을 받을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쌍한 인간들을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가운데 인간들로부터 독점적인 경배를 받을 때 진정 기뻐하시는 것과 같다. 남녀가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특히 정치적, 사회적인 면을 고려할 때 남자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아내가 남편의 머리가 되어 남편을 휘어잡으려 한다면 남편은 본성적으로 고통을 당한다.
바울의 여성관은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아무리 남녀 평등이라지만 서로 구별되게 창조된 이상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여자에게도 행복한 것이다. 진정한 평등은 상호 의무와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다. 남편은 아내의 생계를 책임지려고 밖에 나가서 타인에게 머리 조아리며 온갖 굴욕을 다 참고 돈을 벌어야 한다. 이러한 수고의 대가로 그는 아내로부터 밖에서 당한 모욕과 고통에 상응하는 극진한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다. 아내도 자신의 생계 수단을 남편으로부터 공급받을 권리가 있는 반면 의무로서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 이 얼마나 공평한 것인가? 상호 권리와 의무를 망각한 무차별적 평등은 가정파괴만 초래할 뿐이고 남녀 피차 공히 불행해질 뿐이다.
기독교 복음은 사회 통념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남녀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 안에서의 평등을 주장해야 한다. 그래야 복음이 사회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기독교인의 가정과 교회에 평화와 기쁨이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