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직접계시 - 왕상19:11-18 -
(2011년 2월 1일 인터넷에 공개)
제목: 하나님의 직접 계시 – 왕상19:11-18 –
>>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전에도 말했다시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도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정결한 자가 복이 있는데,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깨끗한 마음, 호수와 같은 잔잔한 마음에 하나님이 음성으로 임하신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13절).’ 말씀에는 말하는 자의 인격과 의지가 담겨 있다. 눈에 보이시지 않으시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가장 확실히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이 바로 ‘말씀’이다. 어머니가 다른 방에 계셔서 눈에 안 보여도 그 분께서 내게 말씀을 하시면 나는 어머니의 현존을 인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 때 우리는 그분의 현존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면하실 때에는 한가하게 그냥 만나시는 게 아니라 어떤 특별한 계시를 주시기 위해 만나신다. 본문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만나셔서 다메섹의 하사엘에게 아람의 왕으로 기름 붓고, 예후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붓고,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실 때에는 어떤 패턴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셔서 특별 계시를 주는 광경을 살펴보자.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2-14).”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하고 나서 큰 민족이 되어 출애굽할 것이라는 실로 어마어마한 장래의 사실을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개인의 장래도 계시해 주셨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창15:15).”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잠자는 중에) ‘두려움’ 다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다는 것이다. 야곱의 경우를 살펴보자.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1-15).”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잠자는 중에)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셨다는 것이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고, 야곱이 땅에 있었다면, 그는 어떤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일종의 ‘두려움’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에 특별계시를 주신 것이다.
자, 이제 엘리야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엘리야는 강한 바람과 불과 지진을 겪은 후에 특별 계시로 주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은 다 인간에게 위협적인 것이고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렇다! 역시 두려움 이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위엄과 존엄을 앞세우시고 다니신다. 그 분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위엄과 존엄이 사람들에게 강한 바람이나 불처럼 임한다. 우리가 신적 위엄과 존엄을 감지했다면, 그 다음에 세미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임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꿈에 신적 위엄과 존엄을 감지한 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하여, 특별히 아브라함과 야곱과 엘리야의 경우와 비슷한 절차를 밟아 개인과 교회의 일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한국의 어떤 교단에서는 장래의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계시는 없다고 단언하며 그것을 교리로 삼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유를 억압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맨날 개꿈만 꾸고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라 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도 있다. 둘 다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개인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고, 신앙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다.
꿈에 거룩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 다음에 마음에 나타나는 세미한 음성(혹은 귀로는 들리지 않는, 마음에 떠오르는 문장(文章))이 있었다면, 그 말씀에 위엄과 거룩한 인격이 담겨 있고 나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 말씀이 요즘 내가 하고 있는 기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그 음성이 하나님의 계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말씀이 임하면 함부로 타인에게 발설하지 말고, 마음에 담아두고 그 말씀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 특히 그 말씀이 나에게 위로와 큰 소망을 주는 말씀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일 가능성이 크고, 요즘 내가 지은 죄를 책망하는 말씀이라면 100%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 분께서 교회 목사님을 놔두고 평신도에게 교회와 교인들에 관한 계시를 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평신도가 개꿈 꾸고나서 함부로 교회와 교인들에게 예언하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병원에 있는 성도가 언제 죽을 것인지 따위를 하나님께서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알리실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가한 분이신가? 혹시 좀 한가한 분이시더라도 그런 일 따위를 뭣하러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알리시나? 내 말은 어떤 평신도가,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는 다른 평신도를 자기가 꿈에 봤는데 그 날 죽었더라 하면서 자기가 뭔 신령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양 착각하고, 그런 꿈 못 꾼 담임 목사님을 은근히 무시하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 성도 중에 누가 병원에 있으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더라도 이 성도, 저 성도에게, 이 날 저 날 아무 때나 꿈에 나타나는 법이다. 우연히 꾼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다시 말한다. ‘소망, 약속, 일의 결정, 책망’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 소망과 약속은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관련이 있고, 책망은 우리가 요즘 지은 죄와 관련 있다. 소망과 약속은 성경에 보니 하나님께서 당사자에게 직접 하신 경우가 많고, 책망이나 징벌은 주로 타인을 통해 말씀하셨다. 죄 지은 인간 꼴 보기 싫은 것은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꼴 보기 싫으시니 직접 말씀 안 하시고 타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그보다는, 범죄한 자의 체면을 생각하시어 하나님께서는 먼저 범죄한 자에게 직접적으로 책망을 하신다. 그러나 대개 죄를 짓고 있거나 불순종하고 있는 자들은 이미 마음이 흐려진 상태라 천둥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이 있어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일부러 그 음성을 묵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차적으로 타인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것을 계기로 자신의 잘못을 확실히 깨달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로 삼게 하신다. 따라서 때론 하나님의 계시로 타인의 잘못이 눈에 보이고, 그 자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이 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그 자를 가만히 살펴보아 자기가 받은 계시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 있으며, 자기가 받았던 계시와 그 자의 행위가 일치하면 자기가 받은 계시의 말씀을 그 자에게 알려주어 속히 그 잘못을 시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언자가 경고하지 않으면 큰 직무유기이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약간 샛길로 갔군. 요컨대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임하는 직접계시’이다. 그것은 꿈을 통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 경우 ‘거룩한 두려움’ 다음에 ‘마음에 떨어지는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고, 그 내용은 ‘소망이나 약속이나 책망이나 일의 결정’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시지 사사건건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아 살게 하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구원 사역과 장래의 종말과 천국에 관한 것은 이미 다 기본 골격이 계시가 되었고, 일부는 우리가 몰라도 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관해 무슨 특별 계시 받았다고 주장하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생활 하며 생기는 궁금한 것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격을 믿음으로 그 궁금증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어떤 자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어떤 복을 약속받았다고 하면 그 이후에 그 자가 교만해지고 신앙이 나태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심만 믿고 주어진 일에 충성만 하라 하시고, 장래 일은 그분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니 장래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개인의 믿음만 가지고는 뭔가 부족할 때 발생한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이들의 자손들에 관한 특별계시를 받았다. 그 계시는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과 야곱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수백 년 후의 이들의 자손들을 위한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특별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들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갖고 살겠는가? 그리고 엘리야의 경우도 보자.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는 엘리야의 믿음과는 전혀 상관 없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없었다면 어떻게 엘리야가 이들에게 기름을 부을 수 있었겠나? 이렇듯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지극히 사무적이다. 물론 개인적인 특별계시도 있긴 하나, 이 경우는 오랜 기간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라보며 산 자를 격려하기 위한 차원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하여 우리는 절대 주제넘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계시록에 보면 이 땅의 심판을 적어 놓은 것이 인봉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 중에 그것을 뜯고 그 내용을 밝힐 자가 없었다. 오직 한 분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그 인봉을 뜯고 그 내용을 선포할 자격이 있으셨던 것이다. 어떤 국가가 올림픽을 개최하면 대개 그 국가의 국가원수가 개회선언을 한다. 아무나 그 엄청난 일의 시작을 선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게 정상적인 것이라면 한갓 어떤 인간이 무슨 특별 계시를 받았다며 지구 종말의 날, 최후 심판의 날이 언제일 것이라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짓인지 이제 아시겠는가? 수억 년 지속된 지구의 역사가 마치고 새로운 영원한 영생이 시작되는 시점을 알리는 그 위대하고 엄중한 선언은 오직 창조주 성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지구 종말의 날짜를 계시해주셨다며 기독교 신자들을 모아 종교집단을 만드는 자들은 다 건방지고도 교만한 날라리 신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자들은 신자들이 아니다. 마귀의 졸개들일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직접계시는 무한한 무게를 지닌 것이다. 구약성경을 보시라.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고 그것을 조금 어겼던 선지자가 사자에게 찢겨 죽었다!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받는 것은 지극히 엄중하고도 두려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절대 가벼이 다룰 수 없는 게 바로 하나님의 직접계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격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게 바른 신앙생활이다. 그런 중에 하나님의 어떤 특별계시가 임하면 그것을 잘 살펴 그 계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꼭 이루어 드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