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6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 English
말씀: 롬12:3-1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권면)하는 자는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
일찍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입니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과 땅의 인간들 사이의 가로막힌 장벽을 허물고 곧고 넓은 길을 내는 자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구세주를 갈망하고 있던 자들에게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께서 옛적에 약속하시고 이제 보내주신 구세주이시라 말했고, 그는 예수님의 구세주되심이 세상적 왕권보다는 속죄양의 직분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줬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사람들이 요한에게 혹시 당신이 그리스도(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구세주)가 아니냐고 묻자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해줬고,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는 이로써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여 구세주를 영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켰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아보고 마땅한 예를 갖추려 했으나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께서 구약의 야훼신앙을 이어받으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구약의 토대 위에 신약이 세워졌음을 보이십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구약 율법의 일점 일획도 남김없이 다 유효함을 보이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명성과 영적 역량을 오직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모든 자들에게 그토록 추앙을 받던 선지자 요한이 나사렛 출신 촌사람 예수를 많은 자들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진리 앞에 겸손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데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로 한 일은 사람들의 죄악을 꾸짖고 죄씻음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병자 치료는 회복의 사역이고, 이 사역은 자신의 사역이 아니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임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례 요한은 젊은 나이에 한 소녀의 춤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초라하게 죽는 게 그의 소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초라하게 죽음으로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졌고 그가 그리스도로 지목했던 예수께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예수의 본격적인 사역은 세례요한의 죽음 이후에 시작됩니다. 때로는 초라한 죽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사용되기도 합니다. 겸손의 극치는 바로 초라한 죽음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성경은 하나님의 일꾼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의 한도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권한이나 권위를 벗어나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절).” 세례요한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러한 모범을 봅니다. 사람들이 그를 구세주로 생각했으나 그는 극구 부인했고, 초지일관 그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한계를 절대 넘어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한계를 넘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어놓으신 한계를 넘어서는 자는 위대한 자가 되기는커녕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자가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의 한계는 나라를 번듯하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을 멋들어지게 지으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금하시니 이에 군소리 않고 순종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반대로 사울왕을 보십시오. 그는 왕이 되었을 때 제사장 직분까지 탐내 제사를 드렸다가 처절한 몰락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성직을 탐내지 마십시오. 여러분, 성경에 제대로 된 정치인 제사장을 보셨습니까? 그런 사람 없습니다. 요즘 목사되고 나서 먹고살만하니 정치에 나서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초라해 보입니까? 길이 아니면 가지마십시오. 사탄은 뱀을 통해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가라고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시켰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지금 계획하고 있을 때 꿈에 뱀이 자주 보이면 거의 100%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는 길이니 그 길을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뱀을 꿈에 보여주어 내게 혼란을 주어 하나님의 일을 막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떤 길을 가려고 마음으로 간절히 소망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는데, 한 번은 꿈에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뱀이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 아직도 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낮에 도시의 길이었는데도 제가 그것을 생각하며 길을 가고 있는데 실제로 제 바로 앞에 뱀이 있더군요. 또 며칠 지나 그것을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도시 길인데도 또 실제로 제 앞에 뱀이 있더군요. 전부터 그 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여쭤왔던 차에 이러한 일을 겪고 저는 그 길을 포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을 허락하실 때의 꿈의 상징은 여러분이 맑은 물에 잠겨 있거나 맑은 시냇물을 헤엄쳐 건너는 것입니다. 맑은 물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과 바른 영적 교제를 하고 있다면 여러분에게 나타나는 여러 징조들은 성경에 이미 그 뜻이 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꿈을 100% 믿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참고는 하십시오. 평소에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고 보니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들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꿈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자기 암시의 언어가 자기 마음에 떠오를 수도 있으니 그것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응답을 주시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자신이 원하고 있는 방향으로 계속 전진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그 과정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과정이니 하나님께서 허용하고 계신 것이고, 그 과정이 끝나면 다른 길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맘이 없는 자에게는 자신의 온갖 허황한 잡념이 거창하고도 거룩한 꿈으로 탈바꿈하여 나타나고 세상의 여러 징조들이 다 자신의 출세를 예시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다가 몰락의 길을 가게 되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위를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본분을 열심을 내어 완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다른 기독교인들과의 바른 인간관계 설정입니다.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각 지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때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조화와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거나 자신의 체면과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전횡을 일삼으면 안됩니다. 모세와 아론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인 아론을 모세의 부하로 삼으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아우 모세를 상전으로 모시고 사역을 잘 감당한 아론을 본받아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 겸허히 모세의 지도에 따랐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도 저렇게 모세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는데 우리도 마땅히 모세의 말에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세는 왕 겸 선지자였고 아론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모세는 새로운 지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자였고, 아론은 모세가 받은 지시를 잘 지키고 따르는 자입니다. 한때 모세의 형 아론과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모세의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들도 모세와 동등한 자격을 주장하다 하나님께 큰 질책을 받기도 했지만 이들은 그런대로 자신들의 자리를 잘 지켰습니다. 동생을 상전으로 모시고 일을 했던 아론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아론은 이스라엘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자였습니다. 그러니 동생을 상전으로 모시고 산다는 게 불평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모세와 아론 그 이후의 세대를 봅시다. 모세의 직책은 모세의 아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여호수아에게로 넘어갔으나 아론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자손들이 세습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아론이 동생 모세를 모시고 일하는 동안 속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으나 자손이 계속 영광을 누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세상 공평한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타인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며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한 자는 대대로 자손이 잘되는 복을 받습니다. 그러니 자손을 위해서라도 사사건건 목사님의 목회에 시비를 걸고넘어지면 안되겠지요. 여러분, 모세의 형 아론을 생각하시고 아론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모세와 아론의 좋은 관계는 신학과 교회의 관계가 어떠함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신학자는 교만하게도 성경과 교회의 전통에 반하는 신학을 제시하다가 출교되거나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과 교회에 관한 새로운 사상을 기존의 신앙 공동체가 거부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가 바로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모세신학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 선포하는 신학입니다. 아론신학(교회의 전통)은 이미 받은 것을 고수하는 신학입니다. 아론 신학은 사이비 모세신학을 거부하고 퇴치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새로운 사상은 마땅히 교회가 거부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새 시대에 맞게 하나님께서 주신 새 모세신학은 교회가 진리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전통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가 새로운 진리를 거부하다가는 바리새인들처럼 버림받게 됩니다. 그런데 새 모세신학은 과거의 것을 계승발전시킨 진리입니다. 과거를 깡그리 부정하는 새로운 신학사상은 마귀가 주는 사상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동성애를 교회가 용인해야 한다는 궤변 사이비 신학사상입니다. 이런 사악한 사상은 교회가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교회는 안식일을 무효화시키려는 시도도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경외하는 전통도 교회가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대표적 모세신학은 다신론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에 오직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유일하신 참 신이시라는 사상과, 유일신론이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이스라엘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상, 예수님만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사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모세신학은 초기에 주위로부터 많은 저항에 부딪혔으나 결국은 신앙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이 됩니다.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진리를 가둬놓을 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사역자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1. 겸손(주제넘은 짓 하지 말기), 2. 타인과의 조화와 협력(몸의 각 지체됨을 생각하기), 3. 성실함과 부지런함과 즐거움으로(8절), 4.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9, 10절), 5. 악을 미워하는 마음으로(9절), 6.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10절), 7. 소망 가운데, 8. 인내하며, 9. 기도하는 중에(12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도 자기 적성에 맞아야 즐거움으로 할 것인데 자기 적성과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시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모세가 말주변이 없어 선뜻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나서길 주저했고, 바울도 모세처럼 말주변이 없어서 고생을 했으나 그들은 훌륭히 맡은 바 본분을 잘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말로 합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세와 바울은 새로운 진리를 하나님께 받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첨가하면 안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말이 많은 자들은 자신의 머리에 있는 생각을 덧붙이게 됩니다. 말주변이 없는 자는 귀로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기는 잘 합니다. 모세와 바울이 바로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또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아서 글에 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주는 데는 적격인 자들이지요. 반대로 제사장 아론은 말을 아주 잘 했습니다. 모세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잘 알아듣게 전해주려면 말재주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모습과 성격과 재능이 하나님의 도구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상태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순종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겨주시든 아멘 하며 순종하고 담대히 그 일을 감당하십시오. 성공과 승리는 이미 여러분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건강과 지혜와 좋은 신앙성품을 주시어 맡든 바 임무 잘 감당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여러분이 충성스런 일꾼이 되어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을 내어 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범사에 많은 도움을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할렐루야!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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