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7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예수의 살과 피 English
말씀: 마26:26-29
>>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필리오케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뜻은 ‘아들에게서도’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께서 성부로부터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출(발생)된다는 교리가 바로 필리오케입니다. 이 필리오케 논쟁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갈라놓게 했습니다. 동방 정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오신다고 믿었고, 서방 교회(카톨릭과 그 이후 개신교까지)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 교리가 교파를 나눠 놓기도 합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필리오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성자께서 모든 면에서 성부와 동등한 신성을 가지셨다면 그분으로부터도 성령께서 나오시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성찬식에 대한 교리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성찬식과 관련된 성경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에 더하여 요한복음 말씀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47-55).” 성찬식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이전의 신앙의 선배들은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께서 약속하신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루의 삶을 위해 밥이 필요하듯 영생을 누리기 위해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과연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시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고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는데, 과연 그 예수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어떤 관계에 있냐에 따라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미사 때 신부가 떡(빵)과 포도주를 향해 “이것은 내(예수님) 살이고, 이것은 내 피다”라고 했을 때,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의 살과 피로 바뀌면서 겉모습만 떡과 포도주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 떡과 포도주는 실제 예수의 피와 살이고, 그것을 먹는 자는 실제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라 합니다. 더군다나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렇게 탈바꿈한 예수의 살과 피를 미사 때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순서를 갖습니다.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의 예수의 살과 피이니 경배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요. 카톨릭에서는 이렇게 실제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신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카톨릭의 성찬을 우상숭배라 규정하고, 십자가에서 단숨에 영원히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예수의 제사장 사역을 카톨릭 신부들이 미사 때마다 반복하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카톨릭에서는 성찬 때 떡과 포도주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의 살과 피와 동일한 실체로 바뀌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창시자 루터는 카톨릭의 화체설을 배격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공재설’로 표현됩니다. 그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속성이 서로 교류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속성의 교류라고 합니다. 우리가 인간 예수를 보며 그 인간 예수를 영원한 성자 하나님이라 할 수 있듯,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이 예수의 인성을 통해 표현되듯, 인성도 신성의 속성으로 표현된다는 말이지요. 신성의 대표적 속성은 바로 편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어느 곳에나 다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의 인성이 이 신성으로 표현되면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의 인성이 모든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물론 이 속성의 교류가 실제로 맞는 말인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루터의 성만찬 이론이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속성의 교류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예수의 인성(살과 피)이 공존한다고 합니다. 이 공존하는 예수의 인성이 실제 떡과 포도주와 연결되어 신자가 그것을 먹고 마실 때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게 바로 루터의 주장입니다. 카톨릭은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둔갑하여 겉모습만 떡과 포도주의 모양으로 되어있다고 했으나 루터의 성만찬 이론에서 떡과 포도주 자체는 실체나 속성이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의 인성이 절대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는 떡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고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실 때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신자가 먹고 마실 때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예수의 신성이 편재하므로 성만찬 때 신성의 영으로써 예수께서 현존해 계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성은 절대 하나님 우편을 벗어나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의 성만찬 이론은 성찬식 때 예수의 신성은 임재해 계시나 그분의 인성은 존재적으로 떡과 포도주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봅니다.
칼빈은 츠빙글리의 성찬론에서 신자가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예수의 살과 피를 실제로 체험하는 게 아니고 단지 그것을 상징하고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것뿐이라고 한 것에 반대했습니다. 칼빈도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의 인성이 실제로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는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의 공재설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신자가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사실상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양으로 예수께 임하신 것에 주목합니다. 비둘기가 성령인 것은 아니나 비둘기는 분명 성령의 임재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은유라 함은 ‘내 마음은 호수다’라는 표현이지요. 호수가 내 마음은 아니나 내 마음의 현상을 잘 표현해줍니다. 비둘기가 성령은 아니나 비둘기의 임재는 성령의 임재와 똑같은 효과를 나타냅니다. 비둘기가 있는 곳에는 성령도 계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둘기가 내려앉은 예수께 성령께서 실제로 임재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현존이 비둘기라는 은유라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의 인성의 현존은 바로 떡과 포도주라는 은유라는 게 바로 칼빈의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예수의 실제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효험을 체험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츠빙글리처럼 떡과 포도주가 단순한 상징이라면 그런 효험은 없겠지요. 칼빈은 떡과 포도주가 우리에게 예수의 살과 피를 나타낼(represents)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것을 실제로 준다(presents)고 말합니다. 카톨릭이 화체설, 루터가 공재설, 쯔빙글리가 기념설(상징설)이라면 칼빈은 은유제공설(隱喩提供設) 정도가 되겠네요. 은유라 함은 떡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를 나타냄을 말하고 제공이라 함은 떡과 포도주가 하늘에 계신 예수의 인성을 신자에게 줌을 말합니다.
츠빙글리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예수의 실제 인성(살과 피)과 결부시켰습니다. 그리고 신자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그럼으로써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성찬에 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신자들은 성찬에 참여하며 그 떡과 포도주를 자신의 영생과 관련시켜 먹고 마시는지 궁금합니다.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카톨릭의 화체설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루터의 공재설도 예수의 인성의 공재를 말하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츠빙글리의 기념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에 비추어 볼 때 성찬식을 너무 간단히 생각한 면이 있습니다. 칼빈이 떡과 포도주의 실체의 변화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성만찬의 효험(영생을 얻음)을 말하고 있어서 현대에도 무난한 성만찬론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비유나 도덕적 권고 차원이 아닙니다. 사실 ‘나(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그분께서 말씀하셨을 때 많은 자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주 심각한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떠나갈지라도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6-68).” 사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말씀을 들을 때 얼마나 섬뜩했을까요? 떡과 포도주는 일차적으로 십자가의 예수를 의미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철저히 우리들을 위한 희생이었음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나를 위한 것으로 믿을 때 영생을 얻습니다.
내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뭘까요? 먼저 우리는 우리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어 자기 독생자의 살과 피를 우리의 영생을 위해 먹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남의 먹이가 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힘센 사자가 인간에게 잡아먹히면 좀 부끄러운 일이지요. 또 먹이가 되는 존재는 먹는 자보다 낮은 지위에 있습니다. 인간이 소보다 더 나은 것은 소가 인간의 먹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성자 예수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그분을 우리의 먹이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을 떼어먹고 그분의 피를 빼어 먹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예수께서는 스스로 인간의 먹이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들을 섬기고 희생하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젖먹이 아이를 둔 어머니를 생각해봅시다.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 그 어미는 자신의 몸을 자식에게 먹이는 겁니다. 자신의 몸을 먹이며 어미는 한없는 사랑으로 아이를 안아줍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항상 우리를 젖을 먹이는 어미의 심정으로 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먹이시고 성령을 부어주시어 우리를 기르십니다. 말씀도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성령도 그분으로부터 나옵니다. 사실상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양식으로 영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만찬은 우리를 향한 예수의 지극한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젖을 먹이는 어미의 사랑이 성찬식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입니다. 성찬식을 통해 우리는 나를 향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히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고, 그분의 살과 피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자식이 자기에게 몸을 준 부모의 것이듯 우리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고 고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로열 젤리를 먹은 애벌레는 여왕벌이 됩니다. 성자의 살과 피를 먹고 자란 우리는 얼마나 고귀한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자란 우리의 몸은 온전히 거룩함 덩어리입니다. 그 거룩한 광채와 향내 때문에 마귀가 감히 우리에게 접근도 못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합니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자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을 깊이 생각하며 깊이 감사드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런 존재인지 깊이 자각하며 예수님을 더욱더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의 삶을 감싸길 기원합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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