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시43편) :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stevision 2012. 11. 29. 09:32

 

(2007년 10월 20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English
말씀: 시43편

  

 

>> 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너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제가 크게 낙심하여 그냥 자취방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오랜 기간 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던 때였지요.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었지요. 자취를 했는데 어느 날 반찬까지 떨어졌어도 이미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그런 것조차도 새삼스럽게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멍하니 정신을 놓고 방에 앉아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께서 반찬을 가져오셨습니다. 보통은 제가 집에 내려가 그것을 가져왔는데, 집에 갈 때가 되기도 전에 반찬이 떨어져 그냥 방에 앉아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제가 마음에 떠올라 반찬을 가져오실 맘이 생기셨다는 겁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가련한 자를 도우시려 다른 자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제 자취방에 오신 어머니가 얼마나 고맙게 느껴졌는지 아마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 여러분, 갑자기 교인 중 누가 불쌍하게 느껴지고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십니까? 그게 혹시 성령의 감동은 아닐까요? ‘그 자가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제 어머니께서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신 분이셨는데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어 자식의 딱한 상황을 구하러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을 믿는 분들이시라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실까요? 여러분의 마음에 가끔 떠오르는 남을 사랑하는 마음,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은 절대 쓸데없는 잡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 악인이 나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악인을 단칼에 없애버리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악인이 쓸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인들이 하는 일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군대에서 국가를 지키는 일, 도로 공사를 하는 일, 자동차를 만드는 일, 광물을 캐는 일, 등등 악인들이 사회 곳곳, 세계 곳곳에서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악인들 다 죽여버리면 누가 그 일을 합니까? 또 악인들의 자식 중에는 착한 기독교인도 있는데 그 악인 죽여버리면 누가 그 기독교인을 부양합니까? 무엇보다 많은 악인들이 여러분의 가게나 회사의 고객들인데 그들을 다 죽여버리면 여러분에게 손해가 크겠지요? 또 악인들 다 죽여버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일이 없게 됩니다. 악인들에게 전도하여 새사람 되게 해야 우리들이 사는 보람을 느끼고 천국에서 상도 많아질 게 아닙니까? 또 악인들 다 죽여버리면 당신은 무사히 살아 남을 것 같습니까? 왕년에 악한 짓 안 해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저 악인 좀 없애주세요’라고 개인적으로 기도드려도 큰 문제가 안될 것같이 보이지만 온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다 그런 기도를 드리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다 들으셨다간 문제가 커집니다. 여러분, 옆집 악인이 왜 명이 긴지 이제 그 이유를 아셨지요? 사실 여러분이 잘 모르시겠지만, 여러분의 가게의 고객 중에 악인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간음하는 고객, 사기치는 고객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게에 악인이 물건을 사러 오는 것을 나쁘지 않게 여긴다면 세상의 악인들이 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불공평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안에 악인이 만들어 놓은 제품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 물건들을 여러분이 직접 만들 시간 없으면, 또 그런 물건 만들 재주가 없다면 그 물건들을 만든 악인이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되겠네요.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2절)?” 여러분, 여러분의 현 상황이 매우 어려워 이와 같은 탄식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올지라도 그건 육신의 생각일 뿐이고, 그것은 선지자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눈을 가진 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인들이 뭔가 하는 일들이 있어서 그들을 살려두시는 대신 당신의 자녀들이 악인들에게 고난을 받는 곳에 찾아가셔서 그들을 지켜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절대 ‘나 하나님께 버림받았어’라고 불신앙적인 고백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다” 구세주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 자리에 우리의 구세주께서 함께 계심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넘어질 것 같아도 아주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미시어 끌어 올리셨습니다. 게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왜 한 번 넘어진 것을 가지고 세상 다 끝난 것처럼 한탄을 하고 주님을 원망합니까? 7번 넘어져도 8번 째 일어나 제 갈 길 가는 자가 바로 의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이고, 믿음이 있는 자는 한 번 넘어진 것을 영원한 실패나 패배로 여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자기보다 강한 악인 앞에서도 두려워 떨거나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3절).” 여러분이 곤경에 처해 있는 바로 그 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십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갖고 그 자리에서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여러분에게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감당할 시험만 하나님께서 주시므로 하나님께서 고난을 이길 능력을 주시고 악인의 올무와 압제에서 탈출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때로는 악인보다 훨씬 나은 지혜를 주셔서 여러분에게 승리를 안겨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사업하는 자도, 학자도, 운동하는 자도, 목회하는 자도, 고3 학생도 신령한 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후히 주시고 절대로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특히 노벨 물리학상 급의 대발견은 예측 불가능한 것을 발견한 경우입니다. 기존의 것을 논리적으로 발전시키다보면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 벽을 극복하는 것은 영감(靈感)을 필요로 합니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던 기발한 아이디어가 머리에 갑자기 떠오릅니다. 그게 바로 “주의 빛과 주의 진리”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무한한 지혜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기발한 자연법칙이 이미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있어서 그 공식대로 지금까지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존전 즉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를 때, 나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눈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관심이 드디어 내 삶과 내 장래로 향할 때,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영감이고 이 영감은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를 머리가 되게 만듭니다. 그 영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깊은 지혜입니다. 보통 사람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 심오한 지혜는 단숨에 전세(戰勢)를 역전시키고, 깊은 구덩이에서 나를 건지고, 때로는 나를 거부(巨富)가 되게 하고, 나를 새로운 학문의 개척자가 되게 하기도 합니다. 이 영감은 기도만 한다고 얻어지는 게 절대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백년 골방에 틀어박혀 영감을 달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거야말로 헛수고입니다. 여러분, 젊을 때 방탕하며 허송세월 하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몸과 시간과 정성을 바치십시오. 젊어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많은 노고와 눈물과 손해를 본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하사하십니다. 그러니 골방에서 기도를 하더라도 자신을 위한 영감을 달라는 기도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게 큰 영감을 받기 위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물론 우리가 악인들에게 둘러싸여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깊은 지혜”를 구하면 그분께서 그 역경을 극복할 묘책을 주십니다. 반드시 주십니다. 세상에는 ‘경건치 않고 간사하고 불의한 자(1절)’가 많습니다. 이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깊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기도로 이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쁨의 근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極樂)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4절).” 악인은 하나님을 피해 다니며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시고 ‘나의 극락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기에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쁨이 되십니다. 인터넷에서 비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굉장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왜 있지도 않고 존재를 증명하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그렇게 지성스레 믿냐는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 계시다면 내게 한 번 나타나 보슈. 그러면 내가 믿어주겠소’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일국의 대통령도 아무나 안 만나 주거늘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지고의 하나님께서 악인이 ‘한 번 내 앞에 나타나보슈’라고 해서 나타나십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악인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의 기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제 어머니께서 오셔서 저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는데 그때 제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나 모릅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쁨이 되십니까? 제일 기쁜 때는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크게 도와주셨을 경우일 것이고, 그 다음으로 기쁜 때는 여러분이 기도 드렸을 때 필요를 채워주신 경우입니다. 우리가 언제 기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제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느낄 때 우리는 제일 기쁩니다. 교회에서 윷놀이해도 1등을 할 때 기쁩니다. 윷놀이는 그야말로 제비뽑기 그 자체인데, 제비뽑기의 결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거든요. 많은 교인들 중에 그 날만큼은 내가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날이니 기쁨이 더욱 크지요. (그냥 재미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대학 때 자취방에서 써클 선배들과 고스톱을 친 적이 있었는데, 1등은 과자를 사오기만 하고, 2등과 3등은 돈을 내기만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고스톱의 온갖 풍성한 열매들(?)을 다 거둬들였습니다. 피박도 여러 번 씌웠습니다. 결국 제가 1등 했는데, 사실 저는 전에 고스톱을 별로 치지도 않았고 실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선배는 그 방면에 꽤 실력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 이미 다 이긴 듯이 고스톱에 임하더군요. 그런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도 제게 화투패가 잘 들어오는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무리 화투를 못쳐도 항상 화투패가 잘 들어오면 이깁니다! 저는 그 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때마침 주머니가 텅 빈 상태였거든요. 꼴찌하면 꿔서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화투판에 나섰는데... 할렐루야! 오락으로 친 화투이니 죄가 될 건 없지요. 또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 속에 내가 산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잔잔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또 설교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도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을 줍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게 하는 기쁨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마음가짐이 되게 하는 기쁨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매를 맞자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당할 자격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제자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던 거지요. 이 기쁨은 수준이 있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내가 기뻐하겠다는데 누가 말립니까? 또 기쁨이 넘치는 곳에 어찌 감히 두려움과 근심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두려움과 근심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샘물이 계속 펑펑 솟아나면 그 샘에 떨어진 개똥 덩어리들은 다 밖으로 떠내려가 사라집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샘솟으면 근심과 걱정거리들은 저절로 물러갑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서 기쁨의 샘이 되십니다.

시편을 기록한 자들은 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는 고난 중에 있는 자기 앞에 하나님께서 친히 와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도우시기 위해 지금 내 앞에 와 계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겁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발견하고 그게 너무 감사하여 찬양을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면 마땅히 낙망해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시려 나에게 오셨다면 마땅히 내가 할 일은 그분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말을 할 때 가까이 가서 들어주는 게 예의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분께서 임하셔서 들어주셔야 피조물에 대한 예의(?)입니다. 아버지도 아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면서 삽니다. 우리가 찬양을 드릴 때 성령께서 그 자리에 안 계시고 천리 길 밖에서 들으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께 찬양을 드리는 곳에 그분께서 반드시 와 계십니다. 그래서 찬양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를 없애줍니다. 내가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게 오셔서 그 찬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개인 일로, 집안 일로, 교회 일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찬양도 함께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찬양도 받으시고 기도도 들어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찬양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