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눅5:17-26) : 죄용서

stevision 2012. 11. 29. 09:36

 

(2007년 10월 24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죄용서                                                 English
말씀: 눅:5:17-26

 

 

 >> ...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신성모독적)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 <<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중한 죄를 지어서 형벌을 받아 그 병에 걸렸습니다. 세상에는 죄를 지어야 걸리는 병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병이 죄와 상관없이 걸리기도 합니다. 중풍이 꼭 죄를 진 자만 걸리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중풍과 죄가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죄인에게 중풍이 들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감기는 바이러스 때문에 걸립니다. 이것도 죄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걸리는 병입니다. 감기가 무슨 병이냐고 할 분도 계시지만 세상에 감기처럼 사람을 고생시키는 병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어떤 병은 정말 범죄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매독은 문란한 성행위 때 감염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정결한 아내만 사랑하는 자는 절대 그런 병에 걸릴 이유가 없습니다. 같은 바이러스 질병이지만 감기와 에이즈는 차원이 다른 질병입니다. 에이즈는 문란한 성행위나 더러운 동성간의 교접행위 때 걸립니다. 감기가 공기를 통해 감염되는데 왜 에이즈는 공기를 통해서도 모기와 같은 해충을 통해서도 걸리지 않고 꼭 문란한 성행위를 통해 걸립니까? 그게 천벌(天罰)이란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왜 동성애 정신병자들은 그런 면을 간과하고 자신들의 행위가 죄가 아니라고 계속 우길까요? 마귀가 더러운 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으며 성경의 진리를 못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악한 인간들은 이성간의 교접을 통해서도 에이즈에 걸리기도 하고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동성애 파트너끼리는 그런 병 안 걸릴 것이니 그것이 죄 때문에 걸리는 병이 아니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정결한 아내와 남편은 서로 사랑하며 복을 누리되, 인간 성기 갖고 더러운 간음이나 매매춘이나 동성애 교접행위를 하는 자들은 서로 더러운 짓하다가 뼈만 남은 채 죽어야 한다는 게 하나님의 뜻이어서 그런 더러운 짓들을 하는 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에이즈에 걸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사악한 동성애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모든 동성애 정신병자들이 에이즈에 걸려 뼈만 남은 채 죽을지어다! 아멘, 아멘!

본문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공개적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친구를 예수께 데리고 가려 했으나 사람들이 많아 그럴 수 없자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께 그 중풍병자를 내려보냈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이 경우는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풍병자 자신은 공개적으로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나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0절).” 아 글쎄 예수께서 이 자의 병이 죄 때문이라고 그러시네요. 여러분, 이 얼마나 그 병자에게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자는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습니다. 자비로우신 예수께서 굳이 그런 말씀 안 하시고 그 자의 병을 고쳐주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만인이 듣는 앞에서 그 자가 병이 든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자비로우신 예수님만 부각시키고 그 중풍병자가 받은 치욕은 전혀 고려치 않고 그 자가 병고침 받은 것을 복 받은 거라 여깁니다. 물론 죄용서 받고 병고침 받은 것은 복이지요. 그러나 이 얼마나 부끄러운 구원입니까? 예수께서는 이 병자에게 치욕을 안기시고 나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죄를 경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죄를 경시하거나 미화하지 마십시오. 죄는 심각한 것입니다. 많은 자들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말씀하신 것을 두고 예수께서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착각합니다. 정죄(condemn, 유죄선고)하지 않는다는 용서(forgive)한다와 다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신 적이 절대 없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심판자로 오시지 않고 평화의 왕으로서 인류구원 사역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때가 때인 만큼 그 여자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내리셨을 뿐입니다. 선고유예는 결코 ‘용서’와 같은 게 아닙니다. 용서는 죄짓기 이전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선고유예는 단지 형벌면제만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형벌을 받고 나서 관계회복이 된 경우도 있고 관계회복이 없는 상태에서 형벌면제만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관계회복은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자에게 사랑의 용서를 해주었을 때 성립됩니다. 또 사실상 예수께서는 당시에 정부관리도 아니셨고 국가 종교지도자도 아니셨으므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정죄’하실 위치에 있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 여인을 정죄 안 하신 것까지만 생각합니다. 그 여인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미 그 여인의 행위가 사람들에게 다 발각되었으니 나중에 집안 사람들에게 다 알려졌을 것이고, 율법에 따라 정부 당국에 의해 그 여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겠지요.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집행유예’도 선언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설사 예수께서 그 여인을 용서하셨더라도 정부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여인을 그냥 놔뒀을까요? 당시 분위기로 보아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예수께서는 율법 조항을 폐하러 오시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고, 국가형벌집행권을 무력화시키시려는 발언을 하신 적이 절대 없으십니다. 국가가 형사범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예수께서는 국가를 향하여 ‘용서하라’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의 무조건적인 용서는 개인차원의 용서에 국한하고, 그 개인차원의 용서도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한합니다. 여러분, 죄를 미화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맙시다. 오늘 본문 말씀의 중풍병자는 용서받고 치료받았으나 평생 부끄런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풍병자는 죄를 짓고 나서 중풍에 걸려 오랜 기간 죽을 고생을 한 다음에, 많은 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과거에 죄지은 자’로 선언 받은 다음에 병고침과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죗값을 철저히 다 치른 다음에 죄의 결과에서 놓임을 받은 거지요. 사람들은 이 자가 죄를 범한 후 병으로 그 고생을 한 것과 많은 자들 앞에서 과거의 숨은 죄가 다 들통나 치욕을 당한 것은 간과하고 그 자가 용서받은 것만 생각하려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죄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 중풍병자가 치른 죗값이 얼마나 컸습니까? 대개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신 후에 용서하셔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 그토록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이 살인을 저지르자 그의 집안에 칼부림이 떠나지 않고 네 명의 아들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쓰디쓴 결과를 안겨줍니다.

우리는 용서라고 하면 언제나 형벌이 면제된 관계회복만을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적당한 형벌을 준 다음에 하는 용서도 분명 용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형벌이 면제된 용서보다는 형벌 이후의 용서가 훨씬 더 많음을 보여줍니다. 후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은 형벌이 면제된 용서가 그만큼 예외적인 용서라는 말입니다. 용서는 약속된 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자가 용서를 못받으면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용서를 받으면 그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라고 선언하신 자는 그분을 믿어 영생을 얻을 자격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를 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 피해를 본 당사자에게 죄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유인 어느 한 인간을 해치면 이는 그 인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실 권한이 있으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온 우주의 창조주요 책임자이시기 때문에 의로운 법을 집행할 책임이 있으십니다. 가해자가 피해를 당한 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눈물을 흘리게 해놓고 하나님께만 죄용서를 구하고 피해 당사자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자를 하나님께서는 절대 용서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에게 용서를 받은 자에 한하여 용서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피해 당사자에게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래서 그 자를 피해자가 용서하게 하신 다음에 그 가해자를 용서해주십니다. 만약 가해자가 용서를 구함에도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피해자가 지은 죄 하나하나에 대한 책임을 다 물으시고 그 피해자의 모든 죄를 용서치 않으실 거라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그러면 어떤 자가 가해자가 용서를 구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할 경우 그 가해자는 어떻게 되나요? 그 피해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 용서를 못 받고 지옥에 가더라도 지금 자기를 해친 그 가해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그 경우 하나님께도 그 가해자를 용서하실 수 없어 그 가해자가 지옥에 가게 되나요?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그 피해자의 과거 죄와 현재 그 가해자가 그 피해자에게 행한 죄를 상쇄시켜 그 가해자를 용서하시겠지요. 그래도 현재 그 가해자의 죄가 상쇄되지 않고 약간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용서를 거부한 피해자에게 베푸신 은총을 가지고 그 가해자의 남은 죄를 상쇄시키시겠지요. 그런데 생명(목숨)은 보편적인 일반은총입니다. 그러니 피해자가 자신의 죄와 지금까지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할 때 가해자를 용서 못하겠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피해자 자신의 죄와 그분께서 그 피해자에게 베푼 은총을 고려하시어 피해자의 뜻과 상관없이 가해자를 완전히 용서하실 수 있으십니다. 문제는 피해자가 용서할 마음이 되어 있는데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그 가해자를 절대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가해자가 받을 이 땅에서의 형벌은 지금 언급한 용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용서는 하더라도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피해배상과 공권력의 법집행에 의한 형벌부과는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용서라는 게 하나님과 피해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현대인들 중에는 국가나 교회나 제3자가 범법자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 불의하고도 불공평하고도 비이성적인 생각입니다. 국가의 사면권은 피해 당사자의 의견을 무시한채 집행되면 안됩니다. 특히 국민의 정서를 무시한 사면은 옳지 않습니다. 또 때론 피해 당사자나 그의 가족이 형벌을 원치 않더라도 국가가 공공질서확립차원에서 형벌집행을 강행해야 함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성직자나 교회가 죄용서를 선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 피해자의 동의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며, 특히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절대 죄용서를 선언해서는 안되고, 더더욱 안될 일은 성경이 분명 죄라 규정한 것에 대해 교회나 성직자가 주제넘게 죄가 아니라 하는 경우입니다.

아사셀이라는 게 있습니다. 레위기 16장에 속죄일이 나옵니다. 이 날에 온 이스라엘이 금식을 하고 회개하여 죄용서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염소 두 마리를 가져다 제비 뽑아 한 마리는 하나님께 속죄제로 드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내보냅니다. 이 광야로 내보내진 염소는 들짐승에게 죽겠지요. 이 규례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범죄하면 그 책임을 져야 하는데 반쪽은 하나님께 반쪽은 피해 당사자에게 용서를 받아야 온전히 용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죗값 전체의 반을 하나님께 속죄제로 드리고 나머지 반은 세상에다 바쳐야 한다는 게 바로 속죄일의 두 염소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에 대한 피해보상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 어느 가장이 살해당하면 국가가 그 살해범을 마땅히 사형시켜야 하겠지만 살해당한 자의 가족이 당한 피해를 생각하여 살인자의 재산도 압류하여 피해자 가족에게 줘야 공의로운 법집행입니다. 교회도 피해자에게 무조건 사랑으로 가해자를 용서하라고만 하지말고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신중히 고려해 중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시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는 신성모독죄이다. 어찌 인간이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나?”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죄용서를 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나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온전한 죄용서는 하나님과 피해 당사자가 할 수 있으니 인간이 죄용서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피해자인 인간의 죄용서는 자기 몫의 용서일 뿐입니다. 피해자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몫까지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타인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 ‘신성모독죄’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건방진 짓입니다. 물론 피해를 당한 자의 부모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 그 부모가 완전한 제3자는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께서는 제3자였나요? 아니지요. 예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죄용서를 선언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께 시비를 건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3절)?” 사실 둘 다 어렵지요. 보통인간이라면 제3자의 입장에서 남의 죄를 용서하거나 병자를 말 한 마디로 일어나 걸어가게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셨기에 그 두 가지가 다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다 이루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영안(靈眼)이 열리지 못해 예수의 병고치는 기적을 보고서도 그분의 신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께 어찌 죄용서의 권세밖에 없으셨겠습니까? 요한복음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성자 예수 그리스도)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1-24).” 이 권세 있으신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오늘 말씀은 중풍병자의 고침에 대한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던 중풍병자는 스스로 예수께 나올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중풍병자와 같이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예수께 나아올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나와 구원받게 하는 게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명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