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시44편) : 하나님의 교육

stevision 2012. 11. 29. 09:38

 

(2007년 10월 27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하나님의 교육                                       English
말씀: 시44편

  

 

 >>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3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 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 11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13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 <<

신명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대적이 한 길로 쳐들어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면 일당백의 전과를 올려 적은 수의 군대로 대군을 무찌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토착민들이 더러운 죄에 빠져 그들을 다 몰아내고 진멸하는 대신 이스라엘을 그곳에 심어 나라를 이루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말씀과 함께 저주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지 않고 옛날 가나안 토착민들의 더러운 풍습을 좇고 우상숭배에 빠지면 적은 수의 대적에게도 패하게 되어 그들의 종이 되고,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셨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더러운 우상숭배를 하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적국의 포로로 잡혀가 외국에 다 흩어 놓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얼마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다시 흩어졌던 이스라엘인들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모아 다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실제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져 살다가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70년 포로 생활을 했고 일부가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와 성전을 짓고 다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현장학습이라는 게 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사람은 직접 가서 체험해야 모든 것을 확실히 파악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을 정복하여 국가를 이루기는 했으나 남으로는 애굽 북으로는 앗시리아와 같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회의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약소국인가?’ 그들은 이웃의 강대국들이 만들어 섬기는 우상에게 눈길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분명 애굽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신 여호와 하나님보다 저 강대국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더 강한 게 분명해!’ 이런 정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들을 이웃의 강대국에게 멸망당하게 하신 다음에 그들을 그곳으로 억지로 끌고 가 우상이 무엇이고 우상숭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합니다. 70년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겉으로만 화려할 뿐 내용은 하나도 없는 허망한 우상숭배를 지켜보게 됩니다. 때론 공권력에 의해 이스라엘인들도 그런 우상숭배 예배에 억지로 참가하게 됩니다. 가서 커다란 돌인형이나 나무인형에게 절을 하며 ‘이건 아닌데...’ 생각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시리아가 그들의 섬기던 우상과 함께 멸망당하고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이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결국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들이 섬기던 우상들이 돌인형이나 나무인형 그 이상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오랜 현장학습 후에 이스라엘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한눈팔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됩니다. 그 고된 포로 생활을 끝낸 후 그들의 머리에서 우상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씻겨졌습니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모든 하나님의 징벌은 그분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과오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가나안 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를 높이셔서 지도자의 역할을 잘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갈라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났으나 그 때 그 둘의 사랑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서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아 아담이 하와를 헌신짝처럼 버려 하나님께 ‘이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했으나 에덴에서 쫓겨나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에서 아담은 열심히 일해 먹을 것을 마련하게 되고 하와는 아담을 뒷바라지하며 아담의 자손을 낳아줍니다. 비록 죄를 지어 죽게 되었으나 이 둘은 하나가 되어 사랑하는 자손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덴의 밖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둘 다 망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에덴에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이렇게 그분의 백성들의 성숙을 위한 것입니다. 매를 맞으면 사람은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며 마음속 깊이 그 징벌의 의미를 새기고 자신 안에 있는 죄된 성품을 하나하나 없애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을 같은 수준으로 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살리시기 위해 악인까지 벌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겠다고 하시자 아브라함이 의인이 그 안에 있어도 악인과 의인을 함께 다 죽이실 것인가 여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그 도시를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전쟁이 나도 하나님께서는 악인들과 그들의 자손은 칼에 죽게 하시나 의인들과 그들의 자손은 눈동자같이 지키십니다. 다니엘이나 에스더 그리고 모르드개를 보십시오. 그들은 조국이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갔으나 높은 관직을 얻어 호강하며 살았습니다. 나라가 망해 온 백성이 노예가 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보호하십니다. 전쟁이 일어나 주위에서 수많은 자들이 칼과 활에 쓰러져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은 자기 목숨을 마치 노략물 얻듯이 상함이 없이 지키게 됩니다.

오늘 시편 44편을 지은 자를 생각해봅시다. 이 자는 바른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과거 가나안을 정복할 때 자신들의 힘으로 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그게 가능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라(3절).” 이 자는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입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라(6절).” 이 자의 삶은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17절).” 이 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싫어하셨던 우상숭배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20, 21절).”

그러나 이 자는 지금 어리둥절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패하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어져 살게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과거 가나안 토착민을 땅에서 추방하셨듯이 이제는 이스라엘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이해가 안가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패하여 포로로 끌려가 갖은 모욕을 당하는 게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방 땅에서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 게 분명 하나님께 영광이 못되고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일진대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허락하심이 그분께 손해가 아니겠냐는 게 시편 기자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에게 공짜로 파셨다고 그는 말합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12절).” 본문 시편 기자는 분명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그는 갖은 모욕과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며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11절).”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13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22절).”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아무 이익도 없이 당신의 백성을 이방나라에게 파셨을까요?

여러분은 이 경우를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있는 악인들과 함께 의인들을 지금 벌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전쟁 중에 다 죽게 하시고 의인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이들은 ‘남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이들의 자손들을 나중에 본향으로 불러들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방 나라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의인들을 ‘보배’로 여기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금과 은은 보배입니다. 금과 은에 불순물이 있으면 가치가 떨어집니다. 금과 은은 뜨거운 도가니에서 달궈져야 가치 있는 귀금속이 됩니다. 사람이 많은 공과 노력을 들여 불을 지펴야만 귀한 순금이나 순은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작금의 시편 기자의 고통을 통해 그의 안에 있는 찌끼가 제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시편 기자는 의인이 혼자만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세상의 여러 재앙이 자신만을 비껴 가는 게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의인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패한 나라를 그냥 방치하여 나라가 망하니 악인들의 죄를 자신들도 감당하게 됨을 그들은 뼈저리게 배웁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는 자신들만 잘 살라고 복을 주신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복을 받았으면 세상이 썩지 않게 소금의 역할도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이라는 찌끼가 다 제거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는 강대국에 끌려와 수많은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은 바닥 인생을 겪어봐야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가난을 모르고 산 자는 절대 공원에서 노숙하며 누워있는 자의 심정을 이해 못합니다. 해도 해도 안되어 노숙자 생활을 하는 자에게 ‘저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 하며 경멸의 눈으로 보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길에서 물건을 진열해 놓고 장사하는 자를 마치 머슴 대하듯 하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런 교만은 학교 교육이나 윤리 책 몇 권 읽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인생 밑바닥 생활을 해본 자만이, 모욕적 언사를 들어 본 자만이 노숙자가 인간으로 보이고 길거리 장사꾼이 성실한 인간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의인들은 이방인들을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으나 정작 그들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종노릇하며 자신들의 머리에 깊숙이 박혀 있던 종교적 우월감을 떨쳐버리게 됩니다. 자기네들이 섬겼던 이방인을 우습게 여기면 웃기는 일 아닙니까? 이런 교만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선민의식이라는 배타성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자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럴 때 자신의 무가치한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심은 만국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선민의식이 투철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거치는 돌입니다. 지나친 선민의식은 교만입니다. 선민의식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교묘한 탈을 쓰고 있는 교만입니다. 선민의식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계명대로 순종하여 살겠다는 각오를 할 때 필요한 것이지 남을 경멸할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자신의 혈기라는 찌끼를 다 제거하게 됩니다. 혈기 중에 으뜸은 제멋대로 삶의 계획을 세우고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오락기기 중에 두더지라는 게 있습니다. 두더지가 고개를 내밀면 망치로 두들겨 패서 쑥 들어가게 하는 게임입니다. 제가 볼 때 삶의 매력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게 자신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으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전능자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고 계시다는 말도 됩니다. 오늘 본문 시편 기자는 자신의 처지가 도살할 양 같다고 합니다(22절). 생명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면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장래의 삶의 계획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그 다음에 자신의 모든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됩니다. 한 마디로 기가 팍 죽은 상태가 되는 거지요. 오랜 기간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40년 간 광야에서 장인 어른의 양을 치던 모세처럼 온전히 자신의 혈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을 하는 양 같은 자가 됩니다. 내 안에 있는 혈기는 도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순한 양이 됩니다.

오늘의 시편 기자는 자신 안에 있는 그와 같은 찌끼들이 제거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처지를 못본 척 하고 계시냐고 하소연합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까? 어서 잠에서 깨소서!(23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백성이 지금 현장학습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서 편히 주무시고 계실 리가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열방에 흩어놓으시겠다 분명 말씀하셨고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을 찾으면 그들을 다시 본향으로 불러들이시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정하신 대로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시고 계신데 무슨 ‘주무십니까’라는 말을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자기 눈이 감겨있으면 온 세상이 깜깜한 법입니다. 신자라면 고난 중에도 믿음의 눈을 뜨고 살아야지요.

하나님의 징계를 경홀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징계에 낙심하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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