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마13:1-9) : 옥토

stevision 2012. 11. 29. 09:43

 

(2007년 10월 31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옥토                                                   English
말씀: 마13:1-9

  

 

 >>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

여러분 미련한 게 죄가 될까요? 여러분, 사람이 정말 미련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불교야 허무맹랑한 교리를 이해하고 고행을 하는 자만이 구원(해탈)받는다고 하니 다 알고 다 깨닫고 또 고행까지 해야 하니 일부 식자(識者)들 만이 종교적 목표에 달성하겠지요. 물론 제가 불교의 구원론을 지지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불교가 그만큼 유식한 자에 비해 무식한 자에게 불공평한 종교이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와 다릅니다. 기독교는 지식과 지혜로 구원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어떤 교리는 매우 난해하지만 그런 것 완전히 몰라도 기독교의 구원은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에게 공평하게 다 열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그분께서 인간이 되시어 만인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다. 누구든지 그분을 구세주로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 여러분, 누구든지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것은 마음이 열려진 자들에게 다 진리로 받아들여집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어려운 수학 문제나 어려운 영어 문장처럼 이해하기가 힘들어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또 수능점수 전국 상위 0.1% 안에 들어야 들어가는 명문대 인기학과처럼 기독교가 제시하는 인간의 구원이 뭔 대단한 업적과 노력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마음을 연 자에게 누구에게든지 쉽게 제공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어린 아이라도 마음을 열면 구원받고, 대학 교수라도 마음을 닫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세주 예수께서 중시하시는 것도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계3:20).” 그러니까 기독교의 구원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유식한 바리새인들은 구원에서 멀어져 있고, 종교진리에 무식한 회개하는 세리에게는 구원이 가까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를 제시한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구약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13:14-15).”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바로 ‘두려워함이라’입니다. 이는 옳은 번역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꺼림이라’고 하는 게 옳습니다. 또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께서 죄를 진 인간들에게 보복하시려 인간들의 마음을 미련하고 완악하게 만드셔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게 하시어 그들이 죄 가운데 있게 하셔서 벌을 내리신다고 해도 안됩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즉 완악함의 원인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들의 의지입니다. 따라서 오해의 소지가 없게 하려면 위의 성경말씀은 “이 백성들이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귀로 듣기에 둔하고 눈을 감았다. 그 이유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하나님)게 와서 고침을 받는 것을 그들이 꺼리기 때문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실제로 독일어 성경의 경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이 보고 들어 깨닫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내게 돌아왔을 것이고, 나는 그들을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스테반 집사가 바른 말을 하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스테반)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행7:57-58).”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네 말이 옳은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듣기 싫다. 누가 너를 우리 선생으로 삼았냐?’라며 선포된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전하는 자를 해치고 있는 거지요. 귀를 막고 눈을 감는 행위는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이 100% 진리라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완악한 마음을 잘 표현해줍니다. 이런 경우 백약이 무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 놓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순종하든 않든 일단 주의 종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도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 그들이 받아들이든 말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마13:14-15)을 통해 예수께서는 “네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복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다”라고 정확한 진단을 하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완고한 마음 때문에 복음을 거부했던 자들 가운데 몇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마음을 순하게 했을 것이고 그리하여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어 벌하신 문제는 전에 제가 다룬 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에 대한 심판을 목적으로 선포되는 말씀과 회개를 촉구하고 복을 주시기 위해 선포되는 말씀은 차원이 다릅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목적으로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듣는 자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또 다른 이유로 마귀의 역사를 드셨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마13:19).”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이해하는 것만 받아들이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해도 전하는 자의 인격과 지위를 봐서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는 게 있습니다. 서로 모순·대립되는 두 명제가 동등한 타당성을 가지고 주장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와 ‘하나님께서는 온 공간 안에 동시에 계신다’라는 명제는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관계에 있지만 각각 나름대로 어떤 타당성이 있는 주장들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증명 능력인데, 인간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문제의 본질상 인간의 힘으로 명쾌한 답을 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존하여 계시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수학 공식으로 풀 수 있나요? 그것을 물리 법칙이나 물리 현상으로 증명할 수 있나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어떤 이율배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명이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문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시기 때문에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원하실 때 공간 안에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으셔서 공간에 존재하실 수 있으시다’라고 우리가 이해한다면 두 명제가 대립이나 모순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두 번째의 경우 우리는 절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수학이나 논리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고, 단지 그분의 자기계시로 인해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과 세상을 고려한다면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유추할 수는 있겠지요.

문제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선포된 진리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마땅히 그분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놓고 세상의 여러 징조들을 참고하여 믿어야 마땅한데, 어리석은 자들은 존재를 증명 못하니 믿어서는 안된다는 태도를 취하고 덩달아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거부합니다. 물론 그들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취합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체험한 자들은 절대 그분의 존재를 부인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지(이해하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뿌리운 것을 악한 자(마귀)가 와서 빼앗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3:19).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라는 말을 초등학생 기독교인도 대학교수 무신론자도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생은 그것을 사실이라 깨달아집니다. 그러나 대학교수는 그것이 거짓이라 생각합니다. 둘 다 언어적 이해력은 정상이나 선포된 권위있는 말씀에 대한 태도는 제각각입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초등학생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으셨고 자기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고, 대학교수는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귀를 막고 눈을 감는 것은 선포된 말씀이 사실이라 믿어져도 그것을 따르기 싫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에게는 선포된 말씀이 문법적으로는 이해되나 그것이 사실(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 안에 악한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는 그 악한 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악한 자와 상반된 복음이라는 진리는 거부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권위를 인정하는 유물론자는 절대 복음이 진리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귀신을 상전으로 모시고 사는 자는 절대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허망한 불교 교리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는 절대 참 진리인 기독교 복음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자의 마음은 길가와 같습니다(19절). 길은 사람이나 차가 다니는 곳이지 결코 곡식이 자랄 곳은 못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제쳐두고 악한 사상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가 바로 마음이 길가와 같은 자입니다. 이런 자는 소귀에 경 읽기에 해당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자기 마음에 무엇이 권위자로서 자리잡고 있는지 살펴보라 하십니다. 물리 이론? 유물론? 범신론? 여러분, 냉정해집시다. 물리 이론은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지혜의 산물이고, 물질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고, 범신론은 순전히 인간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허깨비 권위를 여러분의 머리에서 추방하십시오! 쾌락주의, 황금만능주의도 사악한 권위이니 이것들도 척결해야 합니다. 마귀가 그런 악한 권위들을 자꾸 여러분의 마음에 세우려 합니다. 그런 악한 권위들을 여러분의 마음에서 추방해야 예수의 복된 말씀이 진리로 내게 다가옵니다. 그 말씀이 내게서 자라납니다.

예수께서는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는 돌밭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마13:20-21)”입니다. 냄비처럼 갑자기 펄펄 끓다가 불이 꺼지면 팍 사그러지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냄비의 반대로 사람들은 뚝배기를 듭니다. 일단 달궈지면 그 온기가 오래 가는 게 뚝배기입니다. 산에도 보면 바위 위에 얇게 토양이 덮여 있는 곳에 있는 나무는 바람이 불면 쉽게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나무는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뿌리를 내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끄덕도 안합니다. 굳건한 바위(반석)에 뿌리를 내리니 바람이 분다고 넘어지나요? 돌밭과 비슷한 비유가 바로 모래 위에 세운 집입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대조되는 게 바로 반석 위에 세운 집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환란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뿌리를 가져야 합니다. 바위도 뚫을 수 있는 믿음의 뿌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살아있는 나무는 조그만 바위틈도 비집고 뻗어 내리는 뿌리를 내려 기어코 생명을 유지합니다.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을 믿을 때 세상의 모든 환란이나 핍박은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환란과 핍박은 계속될 것입니다. 내 힘으로 그것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굳센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 그런 바위와 같은 문제들도 심각한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바위는 나를 더욱 굳세게 서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역경을 극복한 자의 믿음은 그 누구보다 굳셉니다.

물론 예수께서 말씀하신 돌밭은 말씀이 뿌리를 깊게 못 내리게 하는 마음 상태를 말하고 뜨거운 햇빛은 세상의 환란과 시련을 의미합니다. 시련이 닥칠 때 돌밭의 마음을 가진 자는 믿음을 포기하겠지요. 아무리 좋은 보약이라도 체질에 안 맞으면 효험을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나쁜 것이라도 자꾸 접하면 체질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이 담배를 열심히 피우면 처음에는 맛없는 담배가 나중에는 그것 없으면 못살게 될 정도로 맛있게 됩니다. 술도 마찬가지이지요. 체질은 긍정적 방향이든 부정적 방향이든 사람이 노력하면 변하게 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도 아직도 정신과 몸이 세상체질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과 육이 복음이라는 보약을 받아들일 체질로 바뀌면 말씀이 귀에 들리는 대로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영과 육이 세상 체질인 자는 복된 말씀이 영 거북하게 느껴집니다. 자꾸 토해내려 합니다. 사람이 헌신, 인내, 희생이라는 말만 들어도 영 속이 거북해집니다. 그러나 사람이 기독교인 체질로 바뀌면 헌신, 인내, 희생이 기쁨으로 느껴집니다. 세상의 환란과 시험을 우리가 없앨 수는 없으나 우리가 기독교인 체질이 되면 그러한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운전면허 땄다고 곧바로 능숙한 운전자가 되는 건 아니지요. 오랜 기간 운전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자가 베테랑 운전사가 됩니다. 우리가 참된 기독교인의 체질을 갖추려 매일매일 노력할 때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깊게 내려 우리의 믿음이 시들지 않고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반대로 좋은 신앙체질을 갖췄던 자가 자꾸 교회를 허무는 짓을 하면 그런 짓이 체질에 맞게 됩니다. 그걸 마귀체질이라고 하지요. 돌밭은 바로 세상 체질과 마귀 체질로 되어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다면 말씀이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체질, 성령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경우(마13:22)”라 하십니다. 어떤 자는 마음에 악한 다른 권위를 모셔두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체질도 기독교인 체질이지만, 즉 길가도 자갈밭도 아니지만 신앙이 성장하지 못한 채 있습니다. 잡초가 무성한 곳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더라도 햇빛을 받지 못하고 양분도 다 빼앗겨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이런 자는 헌신, 인내, 희생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할 수도 있는 자입니다. 이 자는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역량을 갖추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 자의 마음은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이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엄격히 말해 이 자에게는 기독교인 체질과 세상 체질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자의 마음은 말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세상의 좋은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세상 것을 포기하라 명령할 때 이 자는 근심하게 됩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께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런 근심 저런 근심 쓸데없는 근심이 이 자의 마음에 잡초처럼 자라나 마음을 지치게 만듭니다. 이 자는 영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복은 자기 능력과 세상적 수단으로 얻을 수 있다고 보는 자입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의 방식을 포기하려 하는 자가 바로 이런 자입니다. 또 자신의 무능을 보며 근심하는 자가 바로 이런 자입니다. 이 자는 온전히 하나님의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내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자입니다. 이 자의 결정적 약점은 바로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22절). 물론 세상 열매는 주렁주렁 맺혀 있겠지요. 돈 열매, 사회봉사 열매, 학위 열매와 같은 것들은 주렁주렁 맺혔겠지요. 그러나 신앙의 열매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회사 사정 나쁘다고 건축헌금 쥐꼬리만큼 하고, 명문대 합격해야 하니 성가대와 교회학교 봉사를 하지 않았고, 사업 바빠 교회일 할 시간이 없었지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하고도 순수한 믿음이 부족한 기독교인! 사명을 망각한 기독교인!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기독교인! 세상 욕심이 너무 많은 기독교인! 이런 기독교인이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 마음에는 온갖 쓸데없는 잡목과 잡초가 자라나고 있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자리잡을 틈조차 없습니다.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맞출 때 여러분은 단숨에 옥토밭이 됩니다.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 때 비로소 열매가 맺혀지기 시작합니다. 100배, 60배, 30배.

여러분, 완고한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순한 마음이 되게 하십시오. 또한 허수아비와 같은 사이비 권위들을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 또 세상 체질, 마귀 체질에서 참된 기독교인 체질로 바뀌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매사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선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와 같은 것이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일 때 하나님의 말씀은 씨가 되어 싹이 나 자라 열매 맺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귀한 열매 많이 맺으시길 기원합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