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물

에라스무스의 글(자유의지에 관하여) >1<

stevision 2012. 12. 3. 08:55

>>전에 2008년 donga.com 시사 발언대에 올렸던 글들임<<

 

영문출처: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Ichthus Edition.

 

에라스무스의 글: 「의지(意志)의 자유(自由)에 관하여」

 

>> 국역자 서언: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카톨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자들이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처럼 교회 개혁을 외치는 자였으나 기존의 카톨릭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채 교회 개혁을 외쳤다. 그러나 루터는 카톨릭에서 나와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루터는 카톨릭의 구원론 체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선행(공로)을 통한 구원은 절대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카톨릭 사상이었다. 루터는 그러한 카톨릭의 구원 사상을 비판하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선행을 할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의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 외쳤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인간에게 본래적 의미의 ‘의지의 자유(선과 악을 구별하여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 없고 다만 마귀의 종으로서의 노예의지만 있다고 보았다. 카톨릭에서는 이러한 루터의 신학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고(물론 루터도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했다), 루터의 사상을 뒤엎을 자로 에라스무스를 택하여 그에게 루터의 사상을 깨뜨릴 글을 쓰라고 당부했다. 이에 에라스무스가 “On the Freedom of the Will(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다. 이에 질세라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글에 대항하여 “On the Bondage of the Will(의지의 속박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다. 국역자(Z^_stevision)가 먼저 에라스무스의 글을 읽었을 때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겠으며, 또한 자유의지가 없는 자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실 수 있으시단 말인가? 맞는 말 같았다. 그러나 루터의 글도 읽어보니 루터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성경에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루터의 주장도 맞는 것 같았다. 이 두 저작들이 이미 한글로 번역이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독자들께 이 두 사람들의 글을 직접 소개해서 영의 양식으로 삼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번역을 시도해본다. 이 ‘자유의지(free will)’ 문제는 카톨릭과 개신교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카톨릭은 아담의 타락 이후 자유의지가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 하고, 개신교(특히 루터교와 장로교)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고 노예 의지만 있다고 본다. <<

 

============== on the Freedom of the Will ==============

               A Diatribe or Discourse

 

--------------Desiderius Erasmus(1469경 - 1536)

 

............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비평  혹은  논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서문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한계와 형편을 말함

그의 관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사드립니다.)

난제들 중에는 많은 수가 성경에서 발견되는데, 그 중에서도 “자유 선택력(自由 選擇力, 자유의지를 말함, 역주)”이 가장 복잡한 미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랜 세월 과거와 현재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마음을 극도로 단련시켰지만, 내 생각에 그 소요된 노력보다는 열매(결과)가 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문제는 매우 온건한 태도로 진행된 칼스타트(Carlstadt)와 에크(Eck)간의 논쟁에서 재개되었고, 현재는 그 문제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좀 더 격렬하게 제기되었습니다. 루터는 “자유 선택력”에 관련된 주장(Assertion, 책이름인가?)을 발표했고, 그가 여러 저술가들로부터 이미 필요한 답변을 들은 상태지만,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우리의 조촐한 쟁론을 통해 진리가 좀 더 밝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내 독자들(친구들)에게 유익일 것 같습니다.

이쯤해서 나는 즉시 내 말을 안 들으려 귀를 막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먼(강이 거꾸로 흐르는구먼)!” 하고 외칠 자들이 있음을 압니다. ‘파리가 코끼리에게 덤비듯 에라스무스가 감히 루터에게 덤벼?’, 그런 걸까요? 그들을 기쁘게 해주려면, 진정해달라는 양해를 구하고 서론에서 절대로 내가 루터의 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만 말하면 되겠군요. 따라서 어떤 자가 다른 자와 확실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수 있듯, 어떤 점에서든 내가 루터와 공개적으로 다른 점이 있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비쳐지면 안 되고, 그의 어떤 교리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죄라 여겨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와 온건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죄라 여겨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Prefatory Observations

Erasmus Acknowledges His Limitations and States

His Point of View

 

In the Name of Jesus

Among the difficulties, of which not a few crop up in Holy Scripture, there is hardly a more tangled labyrinth than that of “free choice,” for it is a subject that has long exercised the minds of philosophers, and also of theologians old and new, in a striking degree, though in my opinion with more labor than fruit.

More recently, however, it has been revived by Carlstadt and Eck, in a fairly moderate debate, and now it has been more violently stirred up by Martin Luther, who has put out an Assertion about “free choice” and although he has already been answered by more than one writer, it seemed good to my friends that I should try my hand and see whether, as a result of our little set-to, the truth might be made more plain.

Here I know there will be those who will forthwith stop their ears, crying out, “The rivers run backward” - dare Erasmus attack Luther, like the fly the elephant? To please them, if I may be allowed to ask for a little quiet, I need say no more by way of preface than what is the fact, that I have never sworn allegiance to the words of Luther. So that it should not seem unbecoming to anybody if at any point I differ publicly from him, as a man surely may differ from another man, nor should it seem a criminal offence to call in question any doctrine of his, still less if one engages in a temperate disputation with him for the purpose of eliciting tru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