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영어

신학 & 영어 >20<

stevision 2012. 12. 6. 15:17

신학 & 영어 시리즈가 계속 이어짐.

12. The Humanity of Christ

12. 그리스도의 인성

In answer to the question, “Who is the Redeemer of God's elect?”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says: “The only Redeemer of God's elect is the Lord Jesus Christ, who, being the eternal Son of God, became man, and so was, and continueth to be God, and man, in two distinct natures, and one person, for ever.” And in answer to the question, “How did Christ, being the Son of God, become man?” the Catechism says; “Christ, the Son of God, became man, by taking to Himself a true body and a reasonable (i.e., reasoning) soul, being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and born of her, yet without sin.”

“하나님의 선민(選民)의 구세주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말합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선민의 구세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인간이 되셨고,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으로서 두 본성(本性)과 한 인격을 가지셨고 영원히 그렇게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인간이 되셨나?”라는 질문에 그 소요리문답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참 육체와 이성(理性)적 (즉, 이성을 가진) 영(靈)을 자신에게 취하심으로 인간이 되셨는데, 동정녀 마리아의 모태(母胎)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으나 죄가 없이 잉태되셨다.”

>> 예수의 성육신은 “완전한 신성(하나님의 아들) + 완전한 인성(영과 육체)”이라는 말입니다. 신성이 인성으로 둔갑한 것도 아니고, 인성이 높여져 신성으로 변화하여 둔갑한 것이 아니라 두 본성(신성과 인성)의 병존이라는 말입니다. 즉 한쪽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한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다만 이 경우 두 본성 안에 단 하나의 인격만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성육신 후에도 인성을 신성이라 하지 않고, 신성을 인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즉, 두 본성을 혼동하여 해석하는 것을 금합니다. 예를 들자면 나무의 눈접이 있습니다. 접붙일 나무의 눈을 도려내어 접본의 껍질 틈에 접붙이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나무의 눈이 접본에 붙여지면 그 접본과 한 나무가 되어 한 생명을 가지게 되지요. 성육신의 경우 접본은 바로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시고, 눈은 성령으로 잉태된 인성입니다. 접붙여진 나무가 두 나무들이 아니듯,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과 인간 두 인격들이 아니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이십니다. <<

How much we should have missed if the Last Adam had appeared on earth as did the first Adam, mature! Instead He has passed through all the stages of human experience, from childhood to manhood. He knows human life fully, by personal experience.

마지막 아담(그리스도)께서 첫 아담처럼 이 땅에 성숙한 상태로 오셨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대단히 착각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분께서는 인간 경험의 모든 단계, 즉 어려서부터 성년까지 다 겪으셨다. 그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인생(人生)을 다 알고 계신다.

In dozens of places the New Testament ascribes to Jesus the reactions and experiences which are common to human nature. The following will serve as a fairly representative list. (1) Birth: Matt. 2:1, Luke 2:11. (2) Growth: Luke 2:40, Luke 2:52. (3) Fatigue: John 4:6. (4) Sleep: Matt. 8:24, Mark 4:38. (5) Hunger: Matt. 4:2, Matt. 21:18. (6) Thirst: John 19:28. (7) Indignation: Mark 10:14, Mark 3:5. (8) Compassion: Matt. 9:36, Mark 1:41. (9) Love: Mark 10:21, John 13:23. (10) Joy: John 15:11. (11) Sorrow and anxiety: Matt. 26:37, John 11:35, John 12:27. (12) Temptation: Matt. 4:1, Heb. 4:15, Heb. 2:18. (13) Prayer: Matt 14:23, Heb. 5:7, Luke 22:44. (14) Suffering: Is. 53:5, Luke 24:46, Heb. 5:8, Heb. 2:10. (15) Death: Matt. 27:50, I Cor. 15:3.

신약성서 많은 말씀들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반응들과 경험들이 예수께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다음의 것들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1) 탄생: 마2:1, 눅2:11. (2) 성장: 눅2:40, 눅2:52. (3) 피곤: 요4:6. (4) 잠: 마8:24, 막4:38. (5) 허기짐: 마4:2, 마21:18. (6) 갈증: 요19:28. (7) 노함: 막10:14, 막3:5. (8) 동정심: 마9:36, 막1:41. (9) 사랑: 마10:21, 요13:23. (10) 기쁨: 요15:11. (11) 슬픔과 근심: 마26:37, 요11:35, 요12:27. (12) 시험: 마4:1, 히4:15, 히2:18. (13) 기도: 마14:23, 히7:7, 눅22:44. (14) 고난: 사53:5, 눅24:46, 히5:8, 히2:10. (15) 죽음: 마27:50, 고전15:3.

The genealogies given in Matt. 1:1-17 and Luke 3:23-38 make plain His human descent, and prove Him to have been the royal and legal heir of David. And the title, “Son of Man,” regardless of how much more it may mean, certainly means that He was truly human. Down through the ages the Christian Church has always believed that her Christ was not only Divine but also human.

마1:1-17과 눅2:23-38의 세계(世系, 족보)들은 그분의 인간적 혈통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그분께서 다윗을 이을 적법한 왕위(王位) 계승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인자(人子)”라는 호칭은, 그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더 광범위한가에 상관없이, 분명 그분께서 진짜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다. 예로부터 교회는 교회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도 되신다고 항상 믿었다.

The limitations of Jesus in the realm of knowledge present an interesting study. We have already noted that he “advanced in wisdom” as well as in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men. But as man he did not and never can become omniscient, for the simple reason that human souls by their very nature are finite. He “marvelled” at the faith of the centurion, Luke 7:9.

예수의 지식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흥미로운 연구거리다. 전술(前述)했다시피 그분께서는 키가 자라시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도 받으셨고 “지혜도 자라나셨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그분께서는 과거에도 전지하시지 않으셨고 절대 그렇게 되실 수도 없으시다. 인간의 영이 그 본질상 유한하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 근거다. 눅7:9에 보면 그분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에 “놀라셨다.”

>> 지식은 의식 더 나아가 인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기독교 이단 중에 네스토리우스 이단이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인격과 인간적 인격이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전지하시지 않는다는 위와 같은 해석은 두 본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구분을 강조하려다 나온 오해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전지하지 않으시다는 것은 인성의 인격을 따로 구분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이는 옳지 못한 표현입니다. 더 나은 표현은 “신성과 인성을 갖추신 그리스도께서는 전지한 분이시다”입니다. 지식은 인격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미 전지전능하신 한 인격을 갖추고 계신 예수님의 인성의 지식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 책이 네스토리우스 이단은 배격하면서 이렇게 인성의 지식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자기 모순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영과 육을 갖추고 계시며 사실 때 경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인간성의 지식은 전지전능의 지식에 추가되게 됩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우리가 보기에 너무 인간으로서 충실하게 사시는 것을 보고 오해하여 그분의 인성에 전지성이 없다 생각하게 되는데, 거듭되는 말씀입니다만, 인성에 있는 지식을 따로 생각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만물박사가 무식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무식한 사람처럼 살았다면 불법입니까? 한 인격을 가지신 전지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사시며 하나님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서, 선지자로서 사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보통의 하나님의 종들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잠시 자신의 신성을 잠재우시지도 아니하셨고, 다 아시고 계신 것을 사람들에게 다 말씀하시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는 데에 불편을 겪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처럼 전지전능을 사람들에게 다 드러내 보이셨다면? 십자가는 어떻게 지시지? 또 종말에 관하여 하나님 아버지만 그 날을 아시고 자신은 모르신다고 하셨는데, 이는 단순히 그 날을 지정하는 결정권이 성부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고, 그 확정된 날짜는 아직 미정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자신은 그 날을 모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르시는 게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그분의 전지성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And since Jesus Himself was true man His own human soul was subject to the same limitation. The Holy Spirit revealed to the human soul of Jesus many things concerning the future ... As Dr. J. Ritchie Smith has observed, however, “It was only the time of His coming that was hidden from Him. The precedents, concommitants, and consequences He foresaw and foretold. This single acknowledgement of ignorance serves to confirm our faith in Him by assuring us that he taught only what he knew. His ignorance pertained to His human nature, and He recognized the limits of His knowledge because they were self-imposed. He is the only man that ever lived who could describe the boundaries of His knowledge with absolute precision. ...”

그리고 예수 자신께서 완전한 사람이시므로 그분의 인간영혼은 그와 동일한 제한 가운데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많은 장래의 일들을 예수의 인간영혼에 계시하셨습니다. ... 리치 스미스 박사가 말했습니다. “그분께 비밀인 사항은 그분의 재림 시점뿐입니다. 그에 대한 전례(前例), 부대상황, 결과는 그분께서 미리 아셨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알지 못한다는 하나의 고백은 그분께서 아시는 것만 가르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킴으로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견고케 합니다. 그분의 무지는 그분의 인성에 속한 것이고, 그분께서 지식의 한계를 스스로 부과하셨으므로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분께서 유일한 그런 분이십니다. ...”

We may not fear, therefore, that we may emphasize too strongly the true, the complete humanity of Christ. All that man as man is, that Christ is to eternity. The Reformed Theology which it is our happiness to inherit, has never hesitated to face the fact and rejoice in it, with all its implications. With regard to knowledge, for example, it has not shrunk from recognizing that Christ, as man, had a finite knowledge and must continue to have a finite knowledge for ever. ... It is certain that the knowledge of Christ's human nature is not and can never be the infinite wisdom of God itself. ...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되고도 완전한 인성을 너무 강조한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인간,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토록 바로 그러한 인간이십니다. 행복하게도 우리가 물려받은 개혁교회 신학(장로교 신학)은 그 사실을 접하고 그것과 그것의 모든 의미들을 기뻐하는 것을 주저한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식을 고려하면, 개혁교회 신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유한한 지식을 가지셨고, 유한한 지식을 영원토록 소유하실 것임이 분명하다고 굳게 믿습니다. ... 그리스도의 인성이 지닌 지식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아니고 결코 그와 같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 역시 분리기독주의(네스토리우스주의)적 발상입니다. 이런 발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그분의 인성과만 관련되어 있어서 신성에는 아무런 해가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십자가의 인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게 아니지요.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은 자신이 취한 인성을 통해 인성의 부분으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고통의 주체적 인격은 하나이고, 그 인격은 영원 전부터 계셨던 성자 하나님의 인격이십니다. 정통 교리가 그리스도 안에 두 의지, 즉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두 인격이 있어 서로 분리된 채 있는 건 아니지요. 한 인격의 인간이 양손으로 일을 하듯 한 인격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성과 인성을 통해 사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이 성자 하나님의 고난인 것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자면, 어떤 사람이 감각기관이 있는 남의 몸을 이식받았다고 합시다. 그 이식받은 부분을 악한 자가 불로 고문하면 이식받은 자가 그 부분을 통해 고통을 당하게 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취한 인성을 통해 친히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

Something of the importance of a correct doctrine of the humanity of Christ can be seen when we look at the errors into which the Roman Catholics have been led. They have emphasized His majesty and Deity to the almost total exclusion of His human qualities, with the result that they have come to think of both the Father and the Son as far removed from them. Almost invariably their pictures and images have represented the human Christ either as a helpless babe in a manager, or a dead Christ on a cross. Yet through all this they have continued to feel the need of a Divine-Human Mediator, one who as man can act as their true representative when he stands before the throne of God, and one who as Deity is able to intercede effectively with God. But since the Roman catholic theology did not present this kind of a mediator they have been forced to invent something else, and in their groping they have turned to the idolatrous worship of the Virgin Mary. They have hailed her as the “Mother of God” and have enthroned her as the “Queen of Heaven,” this for all practical purposes exalting her to a position of equality with God.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바른 교리의 중요한 일면이 로마 카톨릭이 빠진 오류를 고려할 때 눈에 들어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분의 권위와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분의 인성을 거의 배제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그들은 성부와 성자께서 자신들로부터 멀리 떠나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의 성화와 성상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구유에 있는 무력한 아기나 십자가의 죽은 그리스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통해 그들은 줄곧 신인(神人)인 중보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 중보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선, 자신들의 참 대리자로서 행할 수 있는 분이고, 그 중보자는 신성을 가진 분으로서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자신들을 위해 중보할 수 있는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신학이 이러한 중보자를 제시하지 않아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수단을 강구했는데, 그리하여 암중모색 중에 그들은 동정녀 마리아 우상숭배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 칭송했고 그녀를 “하늘의 여왕”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 일은 실용적 목적들이 있었음에도 그녀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로 높여버리고 말았습니다.

The poor, rough, uncultured fishermen of Galilee became His intimate and trusted friends. And we who live nearly two thousand years after these events find ourselves bound to Him with strong personal ties of love and friendship. To us, as to the early Christians, he says, “Ye are my friends.”

가난하고 거칠고 무식한 갈릴리의 어부들이 그분의 가깝고도 신뢰하는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있은 지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 사는 우리들도 자신들이 강력한 우정과 사랑의 개인관계로 그분과 연합되어 있음을 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내 친구들이다” 말씀하십니다.

13. The Humiliation of Christ

13. 그리스도의 비하(卑下)

The Apostle Paul tells us that Christ in order that He might accomplish His work of redemption “humbled” Himself (Phil. 2:8). The meaning of this is perhaps expressed more clearly and briefly in the Shorter Catechism than anywhere else when in answer to the question, “Wherein did Christ's humiliation consist?” the answer is given: “Christ's humiliation consisted in His being born, and that in low condition, made under the law, undergoing the miseries of this life, the wrath of God, and the cursed death of the cross; in being buried, and continuing under the power of death for a time.”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다”고 말합니다(빌2:8). 그 의미는 아마도 소요리문답에 가장 간단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변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비하는 그분의 탄생과, 낮은 신분 가운데 율법에 종속되셨음과, 이생의 불행들과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셨음과, 무덤에 묻히셨음과, 한동안 죽음의 권세하에 계셨음을 말한다.”

As He grew up He accommodated Himself to the limitations of human existence. Though He was the Giver of the law, he were an ordinary Israelite, and assumed its obligation in man's place and stead.

그분께서 성장하실 때 그분께서는 인간경험의 한계 안에 자신을 두셨습니다. 율법 수여자이셨지만, 그분께서는 보통 이스라엘인이셨고, 인간의 자리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율법의 의무를 지셨습니다.

Though Lord of all, He was subject to Joseph and Mary like an ordinary child of men, labored at the carpenter's bench, and subjected Himself to the hardships and limitations of the poor and lowly.

만민의 주님이셨지만, 그분께서는 여느 사람의 자식처럼 요셉과 마리아 부모님께 순종하셨고, 목수로 일하셨으며, 가난하고 천한 자의 역경과 한계를 감수하셨습니다.

The humiliation of Christ was completed in His burial.

그리스도의 비하는 그분의 장사(葬事)됨에서 완성됩니다.

14. The Exaltation of Christ

14.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귀히 높여지심)

In answer to the question, “Whence consisteth Christ's exaltation?” the Shorter Catechism says: “Christ's exaltation consisteth in His rising again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in ascending up into heaven, in sitting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nd in coming to judge the world at the last day.”

“그리스도의 승귀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소요리문답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승귀는 그분께서 제 삼일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과, 하늘에 오르심과,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심과,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심을 말합니다.”

In the first place it must be apparent to all that the exaltation of Christ, and well as His humiliation, relates not to His Divine nature, which is and always has been infinitely blessed and glorious, but only to His human nature. His divine nature is immutable, and therefore not capable of either increase or diminution. His humiliation was temporary. It began with His birth and was completed with His burial, and it can never be repeated. His exaltation is permanent.

첫째로 모든 자들에게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승귀와 그분의 비하가 그분의 신성(神性)아니라 그분의 인성과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성은 항상 무한히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십니다. 그분의 신성은 불변하여 증감(增減)이 없습니다. 그분의 비하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 비하는 그분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어 그분의 장사(葬事)됨으로 완성되었고, 절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승귀는 영원한 것입니다.

>> 비하라 하면 낮아짐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낮아졌다는 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음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성을 입으셔서 낮아지셨으니 낮아지심의 주체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닌가? 따라서 그리스도의 비하가 그분의 인성에만 관련된 것이라는 말은 그릇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에는 네스토리우스주의(분리기독론)적 오류도 첨가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의 주체는 그분의 영원한 신적(神的) 인격(人格)이시다. 그분의 비하와 승귀가 그분의 인성에만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 거듭되는 말이지만, 이는 그분의 인적(人的) 인격(人格)을 분리해 따로 생각하는 것이고, 이는 사실상 네스토리우스주의이다. 성령에 의한 잉태 순간부터 영원한 성자 하나님께서는 유아기부터 장년에 이르는 인간적 인격을 형성해가셨던 것이다. 한국에 살던 자는 한국인의 인격을 갖는다. 이 한국인이 다른 나라에 가서 오랜 기간 살면 다른 나라 사람의 인격을 점차 형성해간다. 이 외국인으로서의 인격은 원래 인격에 첨가된 인격이지만 한 생명의 첨가된 인격일 뿐이다. 이 경우 한 사람 안에 두 독립적인 인격이 있어 독립적인 활동을 하는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시다. 그분께서 성육신과 함께 완전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자신의 존재에 첨가시키셨기 때문에, 이 땅에 사시며 인간적 인격을 점차 형성해 가신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적 인격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독자적 행보를 하는 게 아니다. 그 인격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인간적 인격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의 주체는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

>> 삼위일체론과 성육신론은 두 가지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독자적인 신적 인격(인격체)을 갖추신 분들이시지만, 그 세 분 안에는 단 하나의 신적 의지만 존재합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는 각각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두 의지들이 있지만, 두 본성들 안에는 오직 한 인격(인격체, 성자 하나님의 인격)만 존재합니다. 삼위일체 안에 단 하나의 신적 의지만 존재하는 이유는, 유일하신 한 하나님께서 세 위격적 실체들(성부, 성자, 성령)로 동시에 존재하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위격적 실체도 엄연한 실체이기 때문에 독자적 사고활동이 가능하고, 그래서 독자적 인격(인격체)을 갖추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 인격만 존재하는 이유는, 한 분의 신적 인격께서 인간실체를 자신의 존재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나타나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두 의지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육신 이후에도 신성과 인성이 변질되거나 두 본성들의 벽이 허물어져 혼합되지 않고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병존하기 때문입니다. 신성은 신적 의지를 포함하고 있고 인성은 인적 의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 두 의지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의지는 인격(인격체)의 지배하에 있고, 그래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인적 의지는 유일한 그분의 인격(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인격)의 지배하에 있는 것입니다. <<

>>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좀 더 살펴봅시다. 그분께서 성육신 하시기 전에는 신적 인격만 갖추고 계셨으나 성육신 이후로는 완전한 인성을 덧입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서의 인격을 갖추시게 됩니다. 인격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 특징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인격이, 아내에게는 남편의 인격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니라 평범한 유대인으로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격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았을 때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인격을 그들에게 보이십니다. 이 인격을 신인격(神人格)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단 하나의 인격입니다. (굳이 구분을 좀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신적 실체)과 인성(인적 실체)은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융합되지 않고 병존해 있지만, 신적 인격과 인간적 인격은 완전 통합되어 단 하나의 인격체만 존재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통합이라는 말은 분리되어 있던 것이 하나로 된다는 의미이므로 약간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더 나은 표현은 ‘신적 인격체가 인성을 덧입음으로 인적 인격체에로 확장되어 신인격체가 되셨다’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분의 부활 전에 그분께서 인간으로서 충실한 삶을 사셨다고 그분을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는 두 인격(인격체)들의 연합체로 여겨 비하와 승귀를 그분의 인성에만 적용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낮아짐과 높아짐이 인격체와 관련되어 있기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

>> 성부 하나님께 “이 세상의 창조주는 누굽니까?”라고 질문드리면 “바로 나다”라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께 같은 질문을 드려도 같은 대답을 듣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께 “의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을 벌하는 분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드리면 “바로 나다”라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동일한 질문을 성자와 성령께 드려도 같은 대답을 듣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께 “저를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드리면 “그렇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같은 질문을 성자와 성령께 드려도 같은 대답을 듣게 됩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안에는 오직 동일한 하나의 의지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부, 성자, 성령께 “제 친한 친구가 되어주시겠다는 분은?”라고 말씀을 드리면 오직 성자께서만 “바로 나다”라는 대답을 주십니다. 또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며 살았던 분은 누구십니까?”라고 어떤 사람이 질문하면 오직 성자께서만 “바로 나다”라는 대답을 주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인간의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존재는 인간적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인간으로서 성부 하나님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또 자신과 성부 하나님이 하나(한 존재)라고도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성육신 하신 성자 하나님 안에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두 가지가 다 존재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신으로서만 사실 수 있는 분’은 성부와 성령이시고, 그분들 안에는 오직 신적 의지만 있습니다. ‘신으로서도 살 수 있고, 인간으로서도 살 수 있는 분’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 분 안에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 두 가지가 다 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

>> 우리가 “성부 하나님”이라고 외치면 오직 성부 하나님만 “왜 그러냐?” 대답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독자적 인격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자 하나님”라고 부르면 성자 하나님만 “왜 그러냐?” 대답하시고, “성령 하나님”라고 부르면 성령께서만 “왜 그러냐?”라고 대답하십니다. 삼위들께서 각자 독자적인 인격체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자 하나님”라고 부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그러냐?” 대답하시고, “나사렛 예수시여”라고 부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그러냐?”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 이 모든 말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라는 사실을 교리화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못하십니다. 그분의 존재도 인간에게 속임수로 보여주시는 게 아니라 사실 있는 대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그분께서 한 인격체이신데 세 인격체들인 양 거짓으로 보여주시는 게 아니고, 허깨비 인성을 취하시고 진짜 인간이 되신 것처럼 속인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위와 같은 정통 교리와 다르게 믿고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여기니 보통 죄가 아니지요. <<

The resurrection of Christ was not only the first step in His glorification. It was also one of the most important truths of the Gospel. For by this act Christ conquered death and came forth alive out of the tomb. It was the proof that His work of redemption had been fully successful, that He had made a complete conquest of death. It showed that His work had full satisfied the demands of the law (the law which God established at the original creation, that the soul that committed sin should die), and that death therefore had no further hold on Him nor on any of those for whom he died. It proved further that He was what He claimed to be, the Son of God, equal with the Father, God manifested in the flesh. And since He suffered and died not for any sin of His own but as the federal head and representative of His people, His resurrection is the guarantee that at the appointed time His people who are vitally related to His shall also be raised in a glorious resurrection. It means that the Gospel is true, that Satan has been finally and completely defeated, and that the triumph of life over death, of truth over error, of good over evil, and of happiness over misery, is forever assured.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그분의 영화의 첫 단계만 되는 게 아닙니다. 그 부활은 가장 중요한 복음의 진리에 속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살아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구원사역이 완전히 성공적이었음과, 그분께서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셨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 부활은 그분의 사역이 율법(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세우셨던 율법, 즉 죄를 범한 자는 죽어야 한다는 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셨음과, 그러므로 죽음이 그분을 더 이상 붙들어 두지 못하고, 그분의 죽음에 은혜를 입은 자들 그 누구도 붙들어두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 부활은 그분께서 자신에 대해 주장하셨던 내용,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과의 연합체의 머리와 대표자로서 죽음을 맛보셨기 때문에, 그분의 부활은 장차 정해진 날에 그분과 생명으로 관계를 맺은 그분의 백성들도 영광스런 부활 가운데 일으켜질 것을 보증합니다. 그분의 부활은 복음이 진리라는 것과, 사탄이 궁극적으로 완전히 정복되었음과,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 악에 대한 선의 승리, 불행에 대한 행복의 승리가 영원히 확정적임을 보여줍니다. 

 

The first and most impressive result of the resurrection, and, in fact, we say the strongest proof of the resurrection, was found in the complete transformation which took place in the minds and hearts of the disciples. ... They then became firmly convince that He had risen from the dead and that He was the Son of God, the promised Messiah, the Saviour of the world. ... We know that some of them did lose their lives in the service of their Lord. Tradition tells us that most of them thus died.

부활의 첫째 그리고 가장 괄목할만한 결과가 되고, 또한 사실 가장 강력한 부활의 증거가 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제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일어난 완전한 변화입니다. ... 당시 그들은 그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약속된 메시야, 세상의 구세주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 우리가 알기로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주님을 섬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승(傳承, 구전(口傳))에 의하면 그들 대부분이 그렇게 죽었다고 합니다.

Heaven is Christ's home, His throne, His temple.

하늘은 그리스도의 집이요, 그분의 보좌요, 그분의 성전입니다.

The great blessing which the prophets predicted as characteristic of the Messianic period, was the effusion of the Holy Spirit. To secure that blessing for the Church His ascension was necessary.

예언자들이 메시야 시대의 특징으로 제시한 크나큰 복은 바로 성령의 임하심입니다. 교회가 이 복을 얻기 위해 그분(예수님)의 승천이 필요했습니다.

In connection with Christ's resurrection and ascension it may be well to point out that it is in the person of the risen and glorified Christ that we shall see God. It would seem to be impossible for us ever to see God the Father or God the holy Spirit as distinct persons of the Trinity, for each is pure spirit and infinite as regards space. But we shall see God the Son in His resurrection body. Moreover, we should also remember that Christ Himself said: “I and the Father are one,” John 10:30;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11; and,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John 14:9.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뵙게 될 하나님은 바로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 위격(位格) 안에서 뵙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구별되어 계신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는 순수 영(靈)이시고 공간을 고려하면 무한한 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두 분들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육체 안에 계신 성자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10:30).”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14:1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

From His(Jesus') lips all men are to receive their final rewards or punishments.

만민은 그분(예수님)의 입으로부터 자신들의 최후의 상(賞)이나 형벌을 듣게 될 것이다.

15. The Relation of the Two Natures in Christ

15. 그리스도의 두 본성들의 관계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we find this very clear and complete statement concerning the person of Christ: “The Son of God,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being very and eternal God, of one substance, and equal with the Father, did, when the fulness of time was come take upon Himself man's nature, with all the essential properties and common infirmities thereof, yet without sin: being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of her substance. So that the two whole, perfect, and distinct natures, the Godhead and the manhood, were inseparably joined together in one person, without conversion, composition, or confusion. Which person is very God and very man, yet one Christ, the only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그리스도 위격에 관한 다음의 분명하고도 완전한 설명이 있다: “삼위일체의 제 2위(位)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바로 그 영원한 하나님(=영원하신 참 하나님)이시고, 성부 하나님과 한 실체이시고 동등하시며, 기한이 다 찼을 때 자신 안에 인성(人性)을 취하셨고, 그와 함께 인성의 모든 본질적 특성들과 보편적 연약함들을 입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그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모태에,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실체(영혼과 육체)에서 잉태되셨다. 그리하여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라는 두 온전하고도 완전한 서로 구별된 본성들이 한 인격(위격) 안에 분리(分離)불가능(不可能)하게 연합되었는데, 이 때 그 두 본성들의 연합은 (다른 본성에로의) 전환(변화), (두 본성의) 혼합, (신성을 인성이라 하고 인성을 신성이라 하는) 혼동을 배제한다. 그 인격(위격)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나 단 한 분의 그리스도,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다.”

>> 사람들은 천지를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하신 참 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영원한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그분께서 바로 그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성부나 성령께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부와 한 실체이시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가 분리 가능한 실체들의 연합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한 관계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온전한 한 인간에는 머리와 몸통이 있습니다. 머리와 몸통은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어 독자적 실체를 이루지는 않지요.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 안의 구별된 인격체들이시라는 말입니다. 성자께서 성부와 동등하시다는 말은 인간적으로 말해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히 동일한 인간 본성을 가진, (부자관계를 떠나 인간의 자격으로 볼 때) 완전히 동등한 두 인간들이듯, 성부와 성자께서 완전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신의 자격으로 볼 때) 완전 동등한 신적 인격체들이시라는 말입니다. 이는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두 인간들이나 세 인간들의 연합체와 달리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능력의 힘으로 존재하게 되지요. 이 때 피조물은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께 종속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이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존재하고 있고, 하나님과 피조물이 분리되어 있는 실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속관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부와 성자께서 분리 불가능한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원어 성경이 영어와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어 나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영어와 한국어판 성경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원어 성경에 의존하고 있나요? 그렇지 않지요. 그 이유는 원어 성경 자신이 영어판과 한국어판으로 확장되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어판과 영어판 성경은 원어성경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존재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께 의존 관계에 계신 게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분리되어 있는 두 실체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이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성자의 존재를 좀 더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 능력으로 성부로 계시며, 자신의 존재 능력으로 성자로 계시며, 자신의 존재 능력으로 성령으로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존재 능력으로 영원부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계십니다. 이 말은 곧 성부에게도 성자에게도 성령에게도 자존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지금도 존재를 부여받고 있지만, 성자께서는 자신의 자존성으로 계시는 겁니다. 이는 성자께 완전한 신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 성경과 한국어판과 영어판 성경이 있다고 합시다. 한국어판과 영어판 성경이 지금 원어성경으로부터 존재의 능력을 부여받아 존재하는 게 아니지요? 원어 성경이 존재하는 존재원리와 동일하게 한국어판이나 영어판 성경이 존재하고 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성자께서는 존재에 있어서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존재에 있어서도 성자께서는 피조물처럼 성부 하나님께 종속되어 계신 게 아니십니다.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이러한 설명이 그릇된 것은 아니며, 이는 제가 “창조주 하나님”에서 상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또 ‘마리아의 실체에서 잉태되셨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성(인간의 영과 육)을 모친 마리아로부터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 그분들로부터 실체(영과 육)를 받았지요.) 그분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영원 전에 독생(獨生)의 과정을 거쳐 성부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신성과 인성 두 본성들을 갖고 계십니다.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혼합되지 않았다는 말은 두 본성이 함께 섞여 제 3의 새로운 단일한 본성이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산소와 수소가 만나 물이라는 새 실체를 형성하듯 신성과 인성이 합쳐져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실체로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신성이 변화하여 인성이 될 수 없고, 인성이 아무리 높여져도 신성으로 변할 수 없지요. 또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고 그분의 신성을 인성이라 부를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고 그분의 인성을 신성이라 부를 수 없지요. <<

The whole historical tradition testifies to a Divine-human Jesus, a Jesus who is intensely supernatural and yet who is possessed of a perfectly normal human nature. The tendency of these critics is to tear apart the natural and the supernatural elements in the Gospels, then to assign the natural elements to a supposedly “earlier” or “historical” narrative while discounting the supernatural elements as “accretions” or “myths.” Such criticism, however, is utterly illegitimate. It is based not on historical or textual criticism, which presents not a shred of evidence for a merely human Christ, but entirely on a priori reasoning. Specifically, it is based on the philosophical assumption that the supernatural is impossible.

전(全) 역사적 전승은 신인(神人)이신 예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께서는 매우 초자연적이시지만 완전한 정상적 인간본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비평들의 경향은 복음서들에 기록된 자연적 요소들과 초자연적 요소들을 나눠서, 자연적 요소들을 “이른 시기의” 즉 “역사적” 증언들로 분류하고 초자연적 요소들을 “첨가들” 이나 “신화들”로 치부해버립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평은 전혀 부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비평이나 본문비평에 근거하지 않고 완전히 연역적 추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역사비평이나 본문 비평이 겨우 인간 그리스도에 대한 단편적 증거만을 제공하는 건 아니지요. 특별히 그러한 비평 경향은 초자연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가정에 근거한 것입니다.

The evidence that we have concerning the historical Jesus comes primarily from the New Testament and secondarily from the beliefs and practices of the early Christians. This evidence admittedly sets forth a Divine-human Jesus. ... Whether the supernatural is possible or not, either in the person of Jesus or in the world at large, is not a question of historical or textual criticism, - which criticism should deal impartially and exclusively with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that has been handed down to us and which, incidentally, fully supports belief in the supernatural. It is rather a question of philosophical world-view, and cannot be disposed of by a arbitrary rejection of unwanted elements in the Gospel narratives. In this chapter it is our purpose to show that it is entirely resonable to believe that the two natures which the Gospel narratives ascribe to Jesus did function in His person with perfect harmony, and that only such a two-natured person would be capable of providing salvation for mankind.

우리에게 있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거는 일차적으로 신약성경에서 또 이차적으로 초대교회 교인들의 믿음과 행위들에서 나옵니다. 확실히 이 증거는 한 분의 신인(神人) 예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 예수의 인격체 안에서 혹은 넓게 생각해서 세상 안에서 초자연적인 것이 가능한 것인지의 여부는 역사비평과 본문비평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 비평은 우리에게 전해진,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신앙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신약성서의 본문을 편견없이 독점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것의 가능 문제는 오히려 철학적 세계관의 문제이고, 복음서 이야기들 안의 껄끄러운 요소들을 멋대로 거부함으로 간단히 처리될 게 아닙니다. 본 단원에서 우리가 원하는 바는, 복음서 이야기들이 예수께 있다 하는 두 본성들이 그분의 인격체 안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기능한다는 것을 믿고, 오직 그러한 두 본성의 인격체만이 인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게 온전히 합리적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In the incarnation our Lord added to His divine nature, not another person (which would have given Him a double personality), but impersonal, generic human nature, so that He was and continues to be God and man, in two distinct natures and one person for ever. There is, to be sure, mystery here which we cannot explain. Probably the nearest analogy we have to it is that which is found in man's own being. Man is composed of two radically different substances, - an immaterial soul or spirit which is subject to mental and spiritual influences, and a material body which is subject to all of the physical and chemical and electrical forces which operate in the world about him. These two natures are not fused or mixed so as to produce a third which is different from either of the others, but exist side by side in perfect harmony with all of their distinct attributes. Each continues to obey the laws of its realm as definitely as if detached from the other. And as in man the soul is the dominant and controlling factor, so in Christ the divine nature is dominant and controlling. ... If his spirit is moral or immoral, happy or sorrowful, wise or foolish, or if his body weighs one hundred and fifty pounds, is tall or short, has blue eyes, suffers pain or is sick, we do not bother to point out to which nature it is that these things apply but simply say that he as a person has these qualities or experiences these things.

성육신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적(神的) 본성(本性)에 (그분을 이중인격이 되게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인격(인격체)이 아니라 무인격(無人格)의 인간 본성을 첨가시키셔서, 영원히 두 구별된 본성들과 한 인격체의, 하나님이요 인간이신 분으로 존속하십니다. 분명 여기에는 우리가 풀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비유는 인간 자신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아주 다른 두 실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정신적, 영적 영향하에 있는 정신이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주위의 세상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모든 물리적, 화학적, 전기적 힘들의 영향 하에 있는 물질적 육체입니다. 이 두 본성들은 융합되거나 혼합되어 이 둘과 다른 제 3의 존재를 형성하지 않고 자신들의 모든 구별된 속성들을 지닌 채 완전 조화 가운데 병존(竝存)해 있습니다. 각각은 마치 다른 것과 관계가 없기라도 하는 듯 확실히 자기가 속한 영역의 법칙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영(靈)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지배하는 부분이듯,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신성(神性)이 우위에 있고 지배하는 부분입니다. ... 인간의 영이 윤리적이든 비윤리적이든, 행복하든 슬프든, 지혜롭든 미련하든, 혹은 인간의 육체가 무게가 150 파운드이든, 크든 작든, 벽안을 가졌든, 아프든 병들었든지 간에 우리는 이러한 사항들이 어느 본성에 해당하는 것인지 구분하려 신경쓰지 않고 단지 인격체인 그가 이러한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고 이러한 것들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 무인격(無人格)의 인간본성이 가능할까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하나의 인격(인격체)만 가지셨음을 설명하려 그분께서 인격만 제거된 완전(?)한 인성을 자신의 존재로 취하셨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과 이미 완전히 성숙해 있는 한 인간의 인성이 결합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인성(육체와 영혼)을 지닌 자가 인격이 없을 리가 없지요. 또 인격이라는 게 인간 수정란 때에도 존재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요?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제일 초기단계의 인성을 자신의 존재로 취하셨고, 인간으로 점차 성장하시면 자신의 인간적 인격을 형성해 가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성숙하신 나사렛 예수께 인간적 인격이 없으신가요? 분명 있잖습니까? 그럼에도 무인격의 인간의 본성을 그분께서 취하셨다고 해야 하나요? 그러면 모순이지요. 또 분명 정통 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가 있다고 하는데, 의지는 있는데 인간적 인격은 없다? 말이 더 이상해지지요. 따라서 성자 하나님께서 무인격의 인간 본성을 취하셔서, 그 인간의 본성이 신적 인격의 영향하에 인간적 인격을 보이게 된다는 주장은 좀 억지스러워보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영과 육이 자라면서 성자 하나님의 인간적 인격이 점차 형성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해야 맞습니다. <<

>> 참고로 위(位)란 독자적 인격체를 말합니다. 삼위일체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독자적 인격체들을 이루신다는 교리입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여 성부, 성자, 성령 세 독자적 신적 인격체들께서 한 하나님을 이루고 계신다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니나 세 신들의 연합체라는 약간 그릇된 인상을 주게 됩니다. 삼위일체론은 유일하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생각을 전개시켜야 모순에 빠지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 2 자아로 성자 하나님을, 자신의 제3 자아로 성령 하나님을 두신 것이고, 이는 영원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성자와 성령께서는 성부와 완전 동등한 신성을 가지셨습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독자적 인격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성부, 성자, 성령, 예수의 인간적 인격체 이 네 위들이 하나라는 사위일체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릇된 것이지요. <<

>> 위의 설명은 인간이 영과 육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두 본성들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한 인격체로 통합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이질적 본성들을 소유하고 계심에도 단 하나의 인격체이시다는 겁니다. <<

He takes the form of a servant, yet His proper and natural form was the form of God.

그분(예수)께서 종의 형상을 취하셨으나 그분의 원래 타고난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His soul is troubled, yet He is the Prince of Peace.

그분의 영혼은 괴로움을 당하셨으나 그분께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He is received up into heaven out of the sight of His disciples, yet continues to be with them even to the end of the world.

그분께서는 승천하시어 제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으나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The expression, “Mary, mother of God,” used so repeatedly in the Roman Catholic Church, is usually offensive to Protestant ears. Yet there is a sense in which it is true, provided that we keep in mind that Mary was the mother not of His divine nature but only of His human nature. But since it is so likely to be misunderstood by uniformed listeners and lends itself so readily to the propagation of error its use would be better discontinued.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매우 빈번히 사용되는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표현은 대개 개신교 교인들의 귀에는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마리아가 그분의 신성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분의 인성의 어머니일 뿐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표현은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용어가 일반 청중들에 의해 너무 쉽게 그릇 이해되고 너무 쉽게 오용되어 퍼지므로 차라리 사용금지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는데 누가 감히 이 일에 시비를 걸 수 있단 말입니까?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으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어머니”라고는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고서 사람들에게 “나 남자와 잔 적 없는데 성령의 능력으로 애를 뱄다”고 말한다고 누가 믿어줍니까? 정혼한 요셉이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지만, 바로 이 때 마리아의 약혼자 의로운 요셉이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자기 애인 마리아를 편들고 나섭니다. 요셉은 정식 결혼 전에 아내를 취했다는 오해를 감당하며 그 위기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이런 고생을 한 마리아와 요셉에게 예수께서 어머니와 아버지라 부른들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고와 고통을 인정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마리아의 젖을 먹고 성장하셨다는 게 너무 감격스런 스토리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마리아는 참 위대한 여성입니다. <<

It was necessary that the Redeemer of mankind should be both human and Divine. It was necessary that He be human if He was really to take man's place and suffer and die, for Diety as such was not capable of that. And it was necessary that He should be Divine if His suffering and death were to have infinite value. Briefly, His humanity made His suffering possible, while His Deity gave it infinite value. Had He been only man He would have needed to have worked out salvation for Himself, and even though he had been sinless he could not have paid a ransom sufficient for the deliverance of others. But since he possessed two natures united in perfect harmony and was no less truly Divine than truly human, the atonement which he made was infinitely meritorious and therefore sufficient to save as many numbers of this fallen race as put their faith in Him. Furthermore, since the race fell through the action of one man who acted in his representative and official capacity, it was possible for salvation to be provided in the same way.

인류의 구원자께서 인간이시고 하나님이시어야 함이 필요합니다. 그분께서 정말로 인간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려면 인간이시어야 했습니다. 신성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고난과 죽음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요컨대 그분의 인성은 그분의 고난을 가능케 했고 그분의 신성은 그 고난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분께서 단지 인간이셨다면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힘써야 했을 것이고, 죄가 없으셨을지라도 타인의 구원에 필요한 배상(賠償, 몸값 지불)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두 본성들을 갖추시고 완전한 인성 못지 않은 완전한 신성도 갖추셨으므로, 그분께서 행하신 속죄(보상)는 무한한 공로가 되어, 그분을 믿기만 한다면 이 타락한 인류 중 누구라도 다 구원받기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인류의 공식적 대표 자격으로 행동했던 한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인류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가능합니다.

>>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공로가 뭔가 부족하여 마리아를 비롯한 죽은 성인(聖人)들의 공로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떠받드는 카톨릭 신자가 있다면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

>> ‘속(贖)하다’라는 말은 형(刑)을 사는 것 대신 재물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redemption은 속전(贖錢)을 내어 죄인을 석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redemption)은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형을 지신 것을 말합니다. <<

Those who despoil Christ, therefore, either of His Divinity or His humanity either diminish His majesty and glory, or obscure His goodness.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서 신성이나 인성을 제거하려는 자는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흠집 내거나 그분의 선하심을 가리는 자입니다.

We have said that it was not with another man that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united Himself, but with impersonal generic human nature. This human nature had no personality apart from the Divine nature, but came to consciousness and found its personality only in union with the Divine, in such the same way that our physical bodies if separated from our spirits are devoid of all reason and sensation and are as nothing, but when united with our spirits they share our true personal life because we, whose bodies they are, persons. In this union the Divine nature was basic and controlling, so that this was not the case of a man being exalted to Deity, but of God voluntarily humbling Himself and descending to the plane of man in such a manner that he shared equally with us the experiences which are common to men. In the same manner that our spirits take precedence over and control our bodies, the Divine nature in Christ took precedence over and controlled the human; yet each nature continued to have its own distinctive attributes or properties and to fulfill its own functions.

전술했다시피 삼위일체 안의 제2 위격께서 자신에게 취하신 것은 한 개인(個人)이 아니라 무인격(無人格)의 인성이었습니다. 이 인성은 신성에 독립하여 인격을 갖추지 않고 오직 신성과의 연합 가운데 의식이 나타나고 인격을 구성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육체가 우리의 영과 분리되었을 때 모든 이성과 감각이 사라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되지만, 그것이 우리의 영과 연합하면 그 육체가 인격체의 삶에 동참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몸을 가졌고, 우리는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서 신성이 근본이고 지배하는 부분이어서, 이 연합이 신성으로 높여진 한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시어 인간 세계에 내려오시어 보편적 인간경험을 동일하게 함께 나누신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의 몸의 상위(上位)에 있고 몸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듯,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분의 인성의 상위에 있고 인성에 대한 지배력을 갖습니다. 그럼에도 각 본성들은 자신들의 구별된 속성과 특성을 계속 유지하고 각각의 기능을 계속 수행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령에 의한 잉태 때 취해진 것이므로, 그 당시에는 인성의 인격체는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인성이 계속 성장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인격이 나타나는데, 이 때의 인격은 성자 하나님의 인간적 인격입니다. 다 성장한 인성을 두고 무인격의 인성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성자께서 무인격의 인성을 취하셨다는 교리는 성자께서 다 성장한 한 개인을 자신의 존재로 취하신 게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제일 첫 단계의 인성을 취하셨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성자께서 자신의 인성이 점차 성장함에 따라 인성을 통해 인간적 인격을 갖추셨다고 해야 합니다. 인성이 다 성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무인격의 인성이라 하는 것은 좀 이상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인격이 나타나는 장소는 그분의 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장한 인성은 분명 인간적 인격체이기는 하나 성자 하나님의 인간적 인격이라는 말이지요. 결정적 요소는 바로 ‘자아의식’이 몇 개냐는 겁니다. 아무리 인성이 신성과의 연합에서 의식과 인격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신성의 자아의식과 인성의 자아의식이 따로따로 논다면 단일한 인격체가 아니라 이중 인격체가 되고 말지요. 성자께서는 인간의 가장 초기 단계의 인성을 자신의 존재로 취하시었고, 그 인성의 성장과 함께 그 인성을 통하여 자신의 인간적 삶을 사셨습니다. 인성에 발생하는 모든 감각을 성자께서 친히 그 인성을 통해 느끼셨습니다. 즉 자아의식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십자가의 고난을 그분의 인성만 당하고 신성은 객관적 입장에 있었다고 한다면 신성의 자아의식과 인성의 자아의식이 따로 노는 거지요. 십자가의 고난을 인간이 되신 성자 하나님의 고난이라고 할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단 하나의 자아의식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 경우가 바로 역사적 사실입니다. <<

 

The fact that Christ took into union with Himself not another person but impersonal generic human nature throws considerable light on the problem of His immaculate conception by the Virgin Mary. ... Sin and guilt are attached not to human nature as such, but to individual persons, - specifically to all who are sons of Adam by ordinary generation. ... This consideration also shows how unnecessary and even ridiculous is the Roman Catholic doctrine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of the Virgin Mary as an explanation of the sinlessness of Christ's nature.

그리스도께서 한 개인을 자신의 존재와 결합시키신 게 아니라 무인격(無人格)의 인성(人性)을 결합시키신 사실은 그분의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죄 없이 탄생하심의 의문점에 해명을 줍니다. ... 죄와 죄책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관련된 게 아니라 개인들, 특히 보통의 탄생을 거친 모든 아담의 자손들에 해당됩니다. ... 또한 이러한 설명은 그리스도의 본성의 무죄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된 로마 카톨릭의 동정녀 마리아 무흠(無欠)잉태 교리(무죄잉태교리)가 얼마나 불필요하고 웃기는 것인지 보여줍니다.

Though as truly God as is God the Father and as truly man as we are, in the new Testament records He invariably speaks of Himself and is spoken of as but a single personality. Never are the pronouns “I,” “thou,” or “He,” used to distinguish between the Divine and human nature as is done to distinguish between the different persons of the Trinity, and never does Christ use the plural number in referring to Himself. The distinction seems to lie in the fact that the different members of the Godhead have distinct (that is, individual) subsistence with powers of consciousness and will, but that the human nature of Christ does not and is therefore of itself not a distinct personality.

그분께서 성부 하나님처럼 참 하나님이시고 우리들처럼 참 인간이셨지만, 신약성경은 그분께서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단일한 인격체라 말씀하시고 사람들도 그분을 단일한 인격체로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 “당신”, “그”라는 인칭대명사는, 삼위일체 안의 상이한 위격들을 구분할 때 쓰였던 것같이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는 데 결코 사용되지 않았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대해 복수(複數)를 결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스스로를 단수 ‘나’라고 하셨지 결코 ‘우리’라 안 하셨다는 말씀.) 그 차이는 아마도 신성 안의 상이한 구성원들께서는 의식과 의지를 갖춘 구별된 (즉 각자의) 자존(自存, 존재(存在))을 갖고 계시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자체가 구별된 인격체로 활동하지도 않고 그러므로 구별된 인격체가 아님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And for any one to confound the two natures so that they are merged into a third which is neither Divine nor human (as was the heresy of the Eutychians - condemned by the Council of Chalcedon, 451 A. D.), or to separate the two natures so as to give Christ a double personality (which was the heresy of the Nnestorians - condemned by the Council of Ephesus, 431 A. D.), is equally erroneous.

그리고 사람이 (A.D.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죄된 유티케스 이단처럼) 두 본성들을 혼동하여 신성도 아니고 인성도 아닌 제 3의 본성으로 융합하고,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 이단처럼) 두 본성들을 분리하여 그리스도께 두 인격체를 부여하면 그릇된 것입니다.

>> 유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부인하고 그 둘의 융합인 하나의 본성을 주장했고, 이는 단성론(monophystism)이라고 합니다. 정통 교리는 양성론이지요.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의 신적 인격과 인적 인격 두 인격체의 병립을 주장하여 인격을 둘로 분리해서 분리기독론자가 되었습니다. 정통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 단 하나의 인격만 존재한다고 봅니다. <<

The doctrine of the Two Natures supplies, in a word, the only possible solution of the enigmas of the life-manifestation of the historical Jesus.

간단히 말해 양성론(兩性論)은 수수께끼와 같은 역사적 예수의 삶의 모습에 대한 유일한 해답입니다.

It is the portrayal of a human episode in the divine life.

그것은 단기간의 인간적인 하나님의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The Jesus of the New Testament is not fundamentally man, however divinely gifted: He is God tabernacling for a while among men, with heaven lying about Him not merely in His infancy, but through out all the days of His flesh.

신약성서의 예수께서는 철저히 인간이 아니라 신적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잠시 인간들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사시는(육체를 입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은 그분의 유아기시절 뿐만 아니라 전(全) 육체의 기간에 걸쳐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

It is one of those mysteries which the Scriptures reveal but which they make no effort to explain.

신약성서는 그러한 신비들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고 그냥 보여주었습니다.

As a matter of fact we do not understand the mysterious union of the spiritual and physical in our own natures; nor do we understand the attributes of God. But the essential facts are clear and are understandable by the average Christian. These are that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 added to His own nature a perfectly normal human nature, that His life on earth was passed as for as was fitting within the limits of this humanity, that His life remained as all times the life of God manifest in the flesh, that His action in the flesh never escaped beyond the boundary of that which was suitable for incarnate Deity, and that all of this was done in order that in man's nature and as man's Substitute He might assume man's obligation before the law, suffer the penalty which was due to him for sin, and so accomplish his redemption.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 안의 영과 육의 신비로운 연합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이해 못하지요. 하지만 꼭 필요한 사실들은 평범한 기독교인들에게 분명하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는, 삼위일체의 제 2 위격께서 자신의 본성에다가 완전한 정상적인 인성을 취하시었다는 것과, 이 땅에서의 그분의 삶이 이 인성의 한계 안의 삶이었다는 것과, 그분의 삶이 항상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삶이었다는 것과, 육체를 입으신 그분의 행동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께 적절한 한계를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과, 이 모든 것이 그분께서 인간의 본성 안에서 인간을 대신하는 자로서, 율법이 부과하는 인간의 의무를 받아들이시고, 인간의 죄로 인한 형벌을 받으심으로, 인간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행해졌다는 것이 있습니다.

16. The Incarnation

16. 성육신

In answer to the question, “How did Christ, being the Son of God, become man?” the Shorter Catechism replies: “Christ, the Son of God, became man, by taking to Himself a true body and a reasonable (that is, reasoning) soul, being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and born of her, yet without sin.”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인간이 되셨나?”라는 질문에 소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참된 육체와 이성적 (즉, 이성을 가진) 영을 취하심으로, 즉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모태 안에 잉태되심으로, 그리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으로, 인간이 되셨으나 죄 없이 태어나셨다.”

God may assume the form of man because man was made in the likeness of God. The Eternal Word may become the Son of Man because man is by nature the son of God. He could not take upon Him a nature wholly foreign to His own, nor become that which is altogether unlike Himself. ... Dr. J. Ritchie Smith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취하실 수 있으십니다.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영원하신 말씀(성자 하나님)께서 인자(사람의 아들)가 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본성과 전혀 다른 본성을 자신에게 취할 수 없으셨고, 자신과 철저히 다른 존재가 되실 수도 없습니다. ... 리치 박사

The incarnation was not an end in itself, but a means toward that end.

성육신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목적(인간구원)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Only a truly human person could suffer and die, and only a truly Divine person could give that suffering infinite value. The ultimate end of Our Lord's incarnation is therefore declared to be that he might die.

오직 참 인간이 고통과 죽음을 맛볼 수 있고, 오직 참 하나님이 그 고통에 무한한 가치를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성육신의 궁극적 목적은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The doctrine of the Deity of Christ is part of the Biblical teaching about God. This person whom we know as Jesus Christ would have been God even if no universe had been created and even if there had been no fallen man to save. He was God from everlasting. His Deity is quite independent of any relation of His to a created world.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on the other hand, is part of the doctrine of salvation. He ‘was’ from everlasting, but He ‘became’ man - at a definite moment in the world's history, and in order that fallen man might be saved.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이 위격께서는, 우주가 창조되지 않았더라도, 또 구원해줄 타락한 인간이 없었더라도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신성은 창조된 세상과 그분의 관계에 상관없이 독립적이십니다. 이와 달리 성육신 교리는 구원론에 속합니다. 그분께서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으나’, 세계사의 정해진 시간에 타락한 인간이 구원받게 하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There is no suggestion that on becoming man and subject to law, he ceased to be the Son of God or lost anything intimated by that high designation. ... All fulness of the Godhead dwells in Him bodily(Col. 2:9). ... The very Deity of God, that which makes God God, in all its completeness, has its permanent home in Our Lord, and that in a ‘bodily fashion,’ that is, it is in Him clothed with a body. He who looks upon Jesus Christ sees, no doubt, a body and a man; but as he sees the man clothed with the body, so he sees God Himself, in all the fulness of His Deity, clothed with humanity. ... Though truly man, He is nevertheless also our ‘great God’ (Titus 2:13).

그분께서 인간이 되시고 율법 아래 계시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를 그치셨다거나 그 거룩한 이름에 걸맞은 속성을 잃으셨다는 암시가 없습니다. ... 신성의 충만함이 그분 안에 육체로 거하십니다(골2:9). ...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신성은 그 모든 충만함 가운데 우리 주님 안에 자신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계신데, 그것도 ‘육체적으로’, 즉 그 신성이 그분 안에 육체로 옷 입혀져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분명 한 육체와 한 인간을 봅니다. 그러나 그가 육체를 입고 계신 그분을 보듯, 그는 자신의 모든 신성을 갖추시고 인성(人性)을 입고 계신 하나님 자신을 봅니다. ... 참 인간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십니다(딛2:13).

During the Old Testament dispensation God spoke to the people through the prophets, revealing to them something of His own nature, of man's sinful and lost condition, and of the plan of salvation. But the glory of the present dispensation is that in Christ God ‘came personally’, and through His own person and work has given man an incomparably more advanced revelation concerning both His own nature and the plan of salvation. The great God who made this world actually came down to the world that He had made, and walked and talked with the people whom He had created. When men looked upon Jesus, they actually saw with their eyes one who was truly God. That is the marvel of the incarnation.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어 자신의 본성의 일면과, 인간의 죄에 빠져 방황하는 상황과,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현 시대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자신의 본성과 구원 계획에 관한 비할 데 없이 진전된 계시를 인간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지으신 크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세계로 실제로 내려오셔서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들과 함께 걷고 대화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볼 때 자기 눈으로 참 하나님을 실제로 봅니다. 이게 바로 성육신의 경이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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