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from the moment he began to be a man, that man began to be nothing other than God's Son, the only Son, and this because the Word of God assuming him became flesh, yet still assuredly remained God. Just as every man is a personal unity - that is, a unity of rational soul and flesh - so also is Christ a personal unity: Word and man.
그분(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인간 예수)이 되신 순간부터 그 사람(예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이셨습니다. 이는 그 사람을 취하신 하나님의 말씀(성자)께서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분명 여전히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이 하나의 이성적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 즉 단일한 인격체이듯, 그리스도께서도 단일한 인격체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말씀(하나님) 겸 인간이십니다.
She was full of grace, since she was to be mother of her Lord, indeed the Lord of all.
그녀(성모 마리아)는 은혜가 충만한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주님의 어머니요, 진정 모든 자들의 주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In deed it was Truth himself, God's only-begotten Son - and, again, this not by grace but by nature - who, by grace, assumed human nature into such a personal unity that he himself became the Son of Man as well.
은혜로 인하여 인성(人性)을 취하시어 (신성과 인성의) 단일인격체가 되시고, 그리하여 친히 인자(人子)도 되신 분은 바로 진정 진리(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이는(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심은) (성부의) 은혜로가 아니라 (성자 자신의) 본질상 그런 것입니다.
>>************************************************************************* 성자께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신 것은 원래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시는 데에 다른 조건이 필요 없었음을 말함. 신성과 인성이 단일인격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에 속한 속성이 인성에 적용됩니다. 그리하여 마리아가 낳은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This same Jesus Christ, God's one and only Son our Lord, was born of the Holy Spirit and the Virgin Mary. Now obviously the Holy Spirit is God's gift, a gift that is itself equal to the Giver; wherefore the Holy Spirit is God also, not inferior to the Father and the Son. Now what does this mean, that Christ's birth in respect to his human nature was of the Holy Spirit, save that this was itself also a work of grace?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우리의 주님께서는 성령과 처녀 마리아로부터 탄생하셨습니다. 그 성령께서는 분명 하나님의 은사(선물)이십니다. 이 은사는 주시는 분(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부나 성자에 열등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하여 그분의 탄생이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이 사실이 이 일(성육신)도 은혜로 말미암았다 라는 것 외에 달리 의미하는 게 있나요?
Actually as we confess our Lord Jesus Christ, who is God from God yet born as man of the Holy Spirit and the Virgin Mary, there is in each nature (in both the divine and the human) the only Son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whom proceeds the Holy Spirit.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심에도 성령과 처녀 마리아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태어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하는 바와 같이, 각각의 본성 안에는 (신성의 안과 인성의 안에는)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계십니다. 그분으로부터 성령이 발출(발생)하십니다.
>>개신교 전통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믿습니다. 한 분의 독생자 하나님께서 신성과 인성 안에 계신다는 말.<<
The works of the Trinity are not separable.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When we confess, “Born of the Holy Spirit and the Virgin Mary,” the sense in which he is not the Son of the Holy Spirit and yet is the son of the Virgin Mary, when he was born both of him and of her, is difficult to explain. But there is no doubt as to the fact that he was not born from him as Father as he was born of her as mother.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처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셨다”고 고백할 때, 그분께서 성령의 아드님은 아니시지만 처녀 마리아의 아들이시다 라는 말의 의미를, 그분께서 성령과 마리아 둘 다로부터 태어나신 것을 고려하면,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분께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듯이 아버지로서의 성령에게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리아는 예수의 모친이 되나 성령은 예수의 부친이 될 수 없다는 말. 성령은 성부 그리고 성자와 더불어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임.<<
Wherefore, since a thing may be “born” of something else, yet not in the fashion of a “son,” and conversely, since not everyone who is called son is born of him whose son he is called - this is the very mode in which Christ was “born” of the Holy Spirit (yet not as a son), and of the Virgin Mary as a son - this suggests to us the grace of God by which a certain human person, no merit whatever preceding, at the very outset of his existence, was joined to the Word of God in such a unity of person that the selfsame one who is Son of Man should be Son of God, and the one who is Son of God should be Son of Man. Thus, in his assumption of human nature, grace came to be natural to that nature, allowing no power to sin. This is why grace is signified by the Holy Spirit, because he himself is so perfectly God that he is also called God's Gift.
그러므로 어떠한 것이 “아들”이 아님에도 다른 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반대로, 아들이라 불리는 자가 전부 다 그의 아비라 불리는 자에게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예를 들어 양자로 삼는 경우) - 이 경우가 바로 (아들이 아닌 채) 성령으로부터 그리고 아들로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남”의 방식인데 - 이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그 은혜로 인하여 어느 한 인간(예수의 인성만을 말함)이 기존의 아무런 (자신의) 공로 없이 그 자신의 존재가 시작되는 순간에(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는 순간에) 말씀 하나님(예수의 신성만을 말함)과 결합되었다. 이는 단일인격체가 되는 결합이 되어서 인간의 아들이신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의 아들이 되셨다. 그리하여 그분(하나님 아들)께서 인성을 취하실 때 그 인성에 자연스레 은혜가 더하여져서 그 인성에서 죄의 권세를 몰아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은혜를 의미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완전한 하나님이셔서 그분께서 또한 하나님의 선물(하나님)로 불리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신성과 인성이 각각 자아 의식을 갖추고 있는 독립된 두 인격체들(신적 인격체와 인간적 인격체)의 느슨한 연합이 아니라는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하나의 신인격을 소유하신다는 말씀.<<
그분(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독생하시고 육욕의 만족 없이 (마리아에게) 잉태되셨기 때문에 - 그리하여 원죄의 영향을 받지 않으셨는데 - 그분(인간 예수)께서는 (놀랍고도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독생하신 성부의 말씀(성자)과, 즉 은혜로가 아니라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과 단일인격체로 연합되셨습니다. 또 그분 자신은 죄를 짓지 않으셨으나, 자신이 취하여 세상에 나타난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8:3)” 때문에 그분 자신이 죄로 불리셨고 죄들을 씻어내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성자 하나님과 결합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데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되어 있다고 말하는군요. ***************************. 또한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자식을 낳는 부모의 성적 쾌감 때문에 자손에게 이어진다고 보고 있군요.<<
He himself is therefore sin as we ourselves are righteousness - not our own but God's, not in ourselves but in him.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이 의(義)가 되듯 그분 자신은 죄가 됩니다. 그 의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고, 우리 안에 있지 않고 그분 안에 있습니다.
The death of Christ crucified is nothing other than the likeness of the forgiveness of sins - so that in the very same sense in which the death is real, so also is the forgiveness of our sins real, and in the same sense in which his resurrection is real, so also in us is there authentic justification.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죄의 용서와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사실이듯 우리 죄의 용서도 그처럼 사실입니다. 그분의 부활이 사실이듯 우리 안의 확실한 의인(義認)도 그처럼 사실입니다.
그것(세례 때 받는 은혜)은 원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해독제입니다. 그리하여 출생 때 감염된 것이 중생(세례를 통한 거듭남)에 의해 제거됩니다. 그것은 또한 마음이나 말로나 행위로 지은 자범죄도 제거합니다. 이 중대한 용서는 인간이 중생하는 시점이고 이 때 유전되었거나 스스로 범한 모든 죄가 사라지는데, 이 중대한 용서를 제외하고 그 이후의 삶은, 즉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시기로부터는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의로움에 진보를 보였나에 상관없이), 죄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세례를 받으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와 그때까지의 자범죄를 다 용서받지만, 세례 이후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받는 과정을 거쳐 용서받는다는 말. 그래서 평상시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례는 늙거나 죽기 얼마 전에 받는 자들도 생겨났음. 콘스탄틴 황제도 그런 잔꾀(?)를 부렸음. 카톨릭의 경우 세례 이후의 죄에 대해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해주고 있음. 개신교는 각자 회개기도하여 아주 간단히 죄문제를 해결하고 있음.<<
No matter how great our crimes, their forgiveness should never be despaired of in holy Church for those who truly repent, each according to the measure of his sin.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자신의 죄에 맞게 진실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교회는 절대로 죄용서를 거부하면 안 된다.
For, of course, outside her they are not forgiven. For she alone has received the pledge of the Holy Spirit, without whom there is no forgiveness of sins. Those forgiven thus obtain life everlasting.
물론 교회 밖에서는 죄용서가 없다. 그 이유는 교회만이 성령의 보증(고후1:22)을 받았고, 성령 없이는 죄용서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용서받은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어떤 죄가 가벼운 죄이고 어떤 게 중한 죄인지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 결정합니다.
Woe to the sins of men! We shrink from them only when we are not accustomed to them. ... Living with them often we come to tolerate them, and tolerating them, we even practice some of them!
멸망당해야할 인간의 죄들이여! 우리는 그것들에 익숙하지 않을 때에만 그것들을 피하려 합니다. ... 우리가 자주 그것들과 같이 지내면 우리는 그것들을 용인하게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용인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 중 일부를 실행에 옮깁니다!
We sin from two causes: either from not seeing what we ought to do, or else from not doing what we have already seen we ought to do. Of these two, the first is ignorance of the evil; the second, weakness. We must surely fight against both; but we shall as surely be defeated unless we are divinely helped.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죄를 범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 중에 전자는 악에 대한 무지이고, 후자는 연약함입니다. 우리는 기어코 이 둘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Wherefore, not only for one to repent, but also in order that he may be enabled to do so, the mercy of God is prerequisite.
그러므로 사람이 회개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회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비가 먼저 역사해야 합니다.
That Peter might be enabled to weep bitterly, the Evangelist tells, “The Lord looked at him.”
복음서 기자는 베드로가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게 하기 위해 “주께서 그를 쳐다보셨다”고 말합니다.
When he acteth, he acteth through mercy; when he doth not act, it is through justice.
그분(하나님)께서 행하실 때에는 자비 때문에 하시는 것이고, 그분께서 행하시지 않는 것은 공의 때문에 그러신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해 주시고, 그분께서 택함을 받지 않은 자들을 그냥 멸망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 때문이라는 말씀.<<
Where his mercy is not shown, it is not unfairness but justice. For with God there is no injustice.
그분의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이는 불공평이 아니라 공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고선(最高善)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정당하게 형벌을 받을 자들로 예정하신 자들의 파멸을 위해, 또한 은혜를 받을 자들로 예정하신 자들의 구원을 위해, 악행들을 선용하십니다.
For, as far as they were concerned, they did what God did not will that they do, but as for as God's omnipotence is concerned, they were quite unable to achieve their purpose. In their very act of going against his will, his will was thereby accomplished.
그들(파멸당할 자들) 자신들을 고려해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지 말았으면 하는 짓을 했으나, 하나님의 전능을 고려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한 그들의 바로 그 행위 중에 하나님의 뜻은 그로 인해 성취되었습니다.
For it would not be done without his allowing it - and surely his permission is not unwilling but willing - nor would he who is good allow the evil to be done, unless in his omnipotence he could bring good even out of evil.
그것(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없이 그것은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 때 그분의 허락은 원치 않음이 아니라 분명 원함입니다. 또한 전능하심으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없으셨다면 선하신 그분께서는 악이 행해지는 것을 불허하셨을 것입니다.
For example, it is a good son's will that his father live, whereas it is God's good will that he should die. Or, again, it can happen that a man of evil will can will something that God also willeth with a good will - as, for example, a bad son wills that his father die and this is also God's will. Of course, the former wills what God doth not will, whereas the latter does will what God willeth. Yet the piety of the one, though he wills not what God willeth, is more consonant with God's will than is the impiety of the other, who wills the same thing that God willth.
예를 들어, 아버지께서 죽지 않았으면 하는 게 선한 아들의 뜻이고, 이에 반해 그 자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일 수 있습니다. 혹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으로 원하시는 것을 악한 뜻을 가진 자도 그것을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전자는 하나님께서 뜻하시지 않는 바를 원하고, 후자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께서 뜻하시지 않는 바를 전자가 원함에도 그의 경건함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을 원하는 후자의 불경건보다, 하나님의 뜻에 더 부합합니다.
Actually God achieveth some of his purposes - which are, of course, all good - through the evil wills of bad men. For example, it was through the will of the Jews that, by the good will of the Father, Christ was slain for us - a deed so good that when the apostle Peter would have nullified it he was called “Satan” by him who had come in order to be slain.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악의(惡意)를 통해 (물론 가장 선한) 몇몇 그분의 목적들을 달성하십니다. 예를 들어, 성부 하나님의 선의(善意)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유대인들의 의지를 통해서입니다. 그 죽으심은 매우 선한 것이어서 사도 베드로가 그것을 막으려 했을 때 그는 죽임을 당하기 위해 오신 그분(예수님)께 “사탄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라는 말 대신 “사탕아”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죠^^. 여기서 사탕은 “달콤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용~.<<
그것(인간의 의지)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 해방이 가능합니다. 그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받습니다.
There is no denying that the souls of the dead are benefited by the piety of their living friends, when the sacrifice of the Mediator is offered for the dead, or alms are given in the church.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죽은 자들의 교우들에 의해 그 죽은 자들을 위하여 중보자(예수)의 희생제물(미사를 말함)이 드려지고 교회에 구호금이 드려질 때, 죽은 자들은 그들의 이승 교우들의 경건함 때문에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과거 천주교에서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의 연옥에서의 해방을 위해 선행을 쌓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
Actually, God's name is even now hallowed in the spirit, but the Kingdom of God is yet to come in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사실 하나님의 성호는 지금 영혼 속에서도 높임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장래 몸의 부활 때에 임합니다.
A final peace is in store for him who continues to go forward in this course toward perfection through steadfast piety. This will be perfected beyond this life in the repose of the spirit, and at the last, in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궁극적 평화는 꾸준한 경건으로 이 완전함에 이르는 길을 계속 가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이 생을 넘어 영혼의 안식 가운데, 그리고 마침내 몸의 부활 때에 완전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거스틴의 Enchiridion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Augustine: Later Works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Ichthus Edition. Vol. 8)]에서 발췌하겠습니다. 그 책에는 “The Trinity”, “The Spirit and the Letter”, “The Homilies on The First Epistle General of St. John”이 나옵니다.<<
Terms which distinguish the Persons of the Trinity from one another denote relations only. Terms applicable equally to each Person and to the whole Trinity denote substance or essence. How can we apprehend the divine essence? The first necessity is to dismiss the quantitative notions which we acquire from the world of sense perception. The Persons of the Trinity are co-equal, simply because in absolute truth or reality there can be no degrees. We cannot grasp, otherwise than by momentary intuition, the conception of ultimate truth (reality) because our minds are weakened by sin and error.
삼위일체의 위격들을 서로를 구분케 하는 용어들은 오직 (위격들 간의) 관계들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 위격들과 삼위일체 전체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용어들은 실체(substance)나 본질(essence, 실체라는 의미도 있음)에 관한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나요?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감각 세계로부터 얻는 양적인 개념들을 깨끗이 버리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위격들께서는 서로 동등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절대적 진리나 실재의 경우에 등급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순간의 직관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죄와 오류로 약해져 있어서 궁극적 진리(실재)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용어는 세 위격들 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용어는 삼위일체 전체에 대해 적용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라 정의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성부 하나님은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한 위격이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라는 말과 성부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라는 말은 다 맞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전체와 어느 한 위격에 동시에 적용할 수 있는 속성은 하나님의 실체나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말씀.<<
The soul can hold to the supreme Good only by love; and love, for its advance to the knowledge of vision, must be supported by the knowledge of faith.
영혼은 오직 사랑으로 최고선(最高善, 하나님)에 접할 수 있고, 사랑은 통찰적 지식으로 나아가기 위해 믿음에서 나온 지식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지식은, 감각으로부터 도출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 자신들 안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오직 실제로 영혼에 현존하는 모형의 형식에 근거되어질 수 있습니다. 영혼은 오직 사랑으로 그것에 도달합니다.
Because God is love, we can know him when we love our brother.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그분을 알 수 있습니다.
All love must have an object; and John's Epistle teaches us that the love which has a brother for its object is not only “of God,” but “God.”
모든 사랑은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 서신은 형제를 대상으로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올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And all love implies, besides itself, a loving subject and a loved object: three entities, one of which (love) is link between the other two.
모든 사랑은 그 자체 외에도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세 실체들(사랑,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이 있고, 그 중 하나(사랑)는 다른 두 실체들 사이의 연결이 됩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심리와 정신, 그리고 언어를 분석하며 그 비유를 찾으려 합니다.<<
The only terms which can strictly be applied to distinguish the several Persons of the Trinity are those which denote their mutual relations: Father, Son, and holy Spirit, Gift of both. The Trinity is neither Father nor Son nor Gift. But the terms applicable to the several Persons, regarded in themselves, denote not three beings in the plural, but one, that is, the Trinity itself: thus the Father is God, the Son God, the Holy Spirit God; the Father is good, the Son good, the Holy Spirit good; the Father almighty, the Son almighty, the Holy Spirit almighty; yet there are not three Gods, or three good, or three almighty; but one God, good, almighty - the Trinity itself; and so for every other term which denotes not a mutual relation, but the several Persons regarded in themselves. We may describe such terms as “essential”; for the essence or being for God is the same as his being great, good, wise, and anything else which is true either of each several Person or of the Trinity itself. We use the expression three Persons, or three substances, not to suggest any difference in essence, but to furnish ourselves with some one word by which to answer the question: What are these “three”?
삼위일체의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해 엄격히 사용되는 용어들은 오직 그분들 사이의 상호관계만을 말하는 성부, 성자, 그리고 이 두 분의 선물(능력)인 성령입니다. 삼위일체는 성부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고 능력도 아닙니다. 그러나 (상호관계로가 아닌) 위격들 자신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용어들은 세 복수(複數)의 존재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단수(單數) 즉 삼위일체 자신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성부는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부도 선하시고 성자도 선하시고 성령도 선하십니다. 성부도 전능하시고 성자도 전능하시고 성령도 전능하십니다. 그럼에도 세 하나님들, 세 선(善)이나 세 전능이 있지 않고, 한 분의 하나님, 선, 전능이 계십니다. 즉 삼위일체 자신만 계십니다. 상호관계를 말하지 않고 위격들 자신들에게 적용되는 다른 모든 용어들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용어들을 “본질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우 본질이나 존재는 그분의 위대하심, 지혜, 그리고 각 위격들이나 삼위일체 자신에게 옳게 적용된 모든 속성들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 위격들 즉 세 실체들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본질에 있어 상이점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 분”은 어떤 분이신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어떤 한 단어를 갖추고 있기 위함입니다.
>> substance도 실체로 해석될 수 있고, essence도 실체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뒤죽박죽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글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분명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부, 성자, 성령은 유일하신 삼위일체 안의 신적 성품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몇분이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그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입니다.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1/3 하나님이신가? 라는 반론에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각각 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게 위 글의 취지입니다.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시므로 각각 substance(실체)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일반적으로 본질을 자신 안에 완전히 이룩한 존재를 실체라고 합니다. 성부께서는 자신 안에 완전한 신적 본질을 갖추고 계시므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성자와 성령도 마찬가지이고요. 아직도 위의 글이 가슴에 확 와닿지 않는 분들께서는 제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제하의 글을 올려놨으니 거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부분을 읽어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In this Trinity there is an absolute equality. In divinity the Father is not greater than the Son; nor are the Father and the Son together greater than the Holy Spirit; nor is any single Person of the three anything less than the Trinity itself.
이 삼위일체 안에는 완전한 동등성이 존재합니다. 신성에 있어서 성부는 성자보다 크지 않습니다. 또 성부와 성자의 합은 성령보다 크지 않습니다. 또 세 위격들 중의 어느 한 위격도 삼위일체 자체보다 더 작지 않습니다.
In this Trinity two or three Persons are not any grater thing than one of them.
삼위일체 안에서 둘이나 세 위격들은 그들 중 한 위격보다 크지 않습니다.
Only Truth itself has true being: in its substance there is nothing “greater” but that which more truly is. But in the realm of the spiritual and the changeless there cannot be degrees of truth; for all is equally changeless and eternal. What is called “great” is great only because it truly is. If then “greatness” is truth itself, to have more greatness must mean to have more truth: that which has not more truth cannot have more greatness. Whatever has more truth is the truer, just as whatever has more greatness is the greater. In this realm therefore the truer is the greater. But Father and Son together have no more true being than the Father alone or the Son alone. Both together, then, are no greater a thing than either of them singly. And since the Holy Spirit no less truly is, no more are Father and Son together anything greater than the Spirit, because they are nothing that more truly is.
오직 진리만이 참된 존재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의 실체에 있어서 “더 큰” 것은 존재하지 않고 더 참되게 존재하는 것만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불변적인 세계에서 진리의 등급이 있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다 동등하게 불변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크다”고 칭해지는 것은 그것이 진정 존재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렇게 불려집니다. 그 경우 만약 “거대함”이 진리 자체라면, 더 큰 거대함을 소유하는 것은 더 많은 진리를 소유한다는 뜻이고, 더 많은 진리를 갖지 못하는 것은 더 큰 거대함을 가질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진리를 가진 존재는 더 참된 존재입니다. 이는 더 큰 거대함을 가진 존재가 더 큰 존재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역에서 더 참된 것은 더 큰 것입니다. 그러나 성부나 성자를 합한 경우는 성부 단독이나 성자 단독의 경우보다 더 참된 존재를 갖지 않습니다. 그 경우 두 분을 합해 고려한 경우가 각각의 단독의 경우보다 더 큰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또 성령께서도 더 적게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므로 성부와 성자를 합친 경우가 성령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분들께서 더 참되게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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