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12. 18. 동아 시사 발언대)
서슬퍼런 5공시절 대통령과 영부인을 골탕먹일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 단 안기부나 검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 안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한 화가가 멋진 생각을 했다. 그는 문어가 밥주걱을 쥐고 있는 그림을 그려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이런 일이 과거 이스라엘에도 있었다. 이스라엘(남유다)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후 바벨론이 페르시아(바사)에게 멸망당한다. 바사왕은 정복민들에게 유화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포로들을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그들의 신도 맘대로 섬기게 했다. 이 때 이스라엘도 종교적으로 해방되어 고향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축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가 바로 이 때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이 곧 정치적으로도 해방되어 독립국가를 이룰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리스가 세계를 제패하면서 정치적 독립은 고사하고 종교적으로도 극심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인들은 종교를 말살당하게 된다. 모든 종교의식은 금지되었고 성전 안에는 그리스 우상을 세워 놓았다. 이런 강압정책에 저항하는 자들은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묵시문학이다. 이 시대에는 이스라엘인 중에 왕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희망이 꺾여진 상태였다. 왜냐하면 몇차례 그런 시도를 했지만 다 처참한 결과를 낳고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새로운 유형의 구세주가 기대되었다. 그것이 바로 '인자(son of man)'이다. 이 인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기적까지 행할 수 있는 자였고, 이 땅의 악의 세력, 특히 마귀의 종이 되어버린 외국의 정치세력을 박살 낼 자였다. 정치적 왕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어져서 하나님의 전권적 대리자인 인자가 나타나 모든 이방인 왕들을 다 제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을 사람들이 소망했다.
이런 소망을 담은 소설이 바로 묵시문학이다. 묵시문학은 이스라엘의 예언자 시대가 마치고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 후 1세기에 걸쳐 나타난다. 주로 아무개의 묵시록으로 되어 읽혀졌다. 여기서는 당시 학정의 장본인들을 이스라엘인들만 아는 상징으로 표현했다. 악인으로 낙인찍힌 당시 정치인의 실명을 기록했다가는 죽음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폭군 네로는 '666수를 가진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히브리어(이스라엘어)는 우리글처럼 표음문자이다. 또 히브리어 알파벳은 얼정한 수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ㄱ-1, ㄴ-2, ㄷ-3...) 그래서 네로를 히브리어로 쓴 다음에 그 글자의 수를 따지면 666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묵시록을 보면 온갖 이상한 짐승과 상징이 난무하여 이해하기가 힘들다. 특히 묵시록 작가들은 자신들의 실명 대신 과거 성경의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저자명으로 삼았다. 이 역시 당시의 집권세력들의 핍박을 면하기 위함일 것이다. 따라서 묵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본래 뜻하던 바와 아주 다른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된다. 그래서 현대에도 묵시록 때문에 이단이 많이 나온다. 이 이단 교주들은 묵시록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 묵시문학 작품이 사람들에게 적잖은 희망을 줬다. 솟아날 구멍이 없는 절망의 시대에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묵시문학 작품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이 많이 읽혀지면서 사람들은 묵시록의 신앙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고백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이스라엘에는 메시야 사상과 인자 사상이 당시 사람들의 신앙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래서 당시에 몇몇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이 그리스도나 인자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펼쳤다. 물론 다 실패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구약성경에는 다니엘서 후반부, 스가랴서 후반부, 그리고 이사야서 후반부가 묵시문학으로 분류된다.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여기에 든다. 따라서 구약의 묵시문학에 예언된 예수님은 '인자'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전권 대리자이시다. 그분께서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 의인들을 핍박하는 정치세력들을 박살내시고 이 땅에 평화의 왕국을 세우실 분이시다. 이 또한 종교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서나 시편이나 예언서나 묵시록에서 예언되어 있으시다. 그 예언의 과정은 다분히 정치적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후세에 진리가 될 그 예언을 그런식으로 기록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예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아있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정치적 사건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다. 이것에 대해 죄인인 인간이 가타부타 말할 수 없다.
'단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서 속의 네 부부 (0) | 2012.12.07 |
---|---|
신약성서의 그리스도 (0) | 2012.12.07 |
예언서의 그리스도 (0) | 2012.12.07 |
모세 신학과 아론 신학 (0) | 2012.12.07 |
수난의 종 (0) | 2012.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