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들

천부교 박태선의 어이없는 착각

stevision 2012. 12. 26. 11:32

(2012-12-24 , donga.com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박태선이 본격적으로 자신을 신격화하는 단계는 자신이 ‘이슬성신’을 내려준다고 주장했을 때이다. 여기서는 이 과정에서 박태선이 얼마나 큰 착각을 했는지 증명하겠다.

 

본래 성령은 예수님의 구원사역과 관계된 분이시다. “나(예수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8, 39).” 이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즉 영광을 받으신 후 그분을 믿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다. 행2:1-21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바람과 같이 또 불과 같이 제자들에게 임하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한 첫 행동은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것(행2:36)’이었다. 누가 성령을 받고 누구에게 성령이 임하시는가?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즉 예수님의 구속사역(십자가 죽음을 통한 인류 구원)을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성령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받은 증표로 주신 것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구원받은 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주신 것이다.

 

성령이 임하는 경우는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세례를 받을 때’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겠다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수했을 때에도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19:5-6).”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바울이 안수해서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했을지라도 바울은 한번도 자기를 신격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언제나 “예수님의 종(빌1:1)”임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연한 태도가 아닌가? 바울은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았지만, 언제나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 일을 했음을 고백했다(행3:3). 심지어 세상 사람들이 바울을 신(神)으로 여겨 섬기려 했으나 바울은 자기는 인간일 뿐이라며 그들을 말렸다(행14장).

 

그런데 천부교 창시자 박태선은 바울의 태도와 너무나 달랐다. 박태선은 자신의 종교집회 때 ‘성령이 이슬처럼 사람들에게 내렸다’고 말했다. 박태선은 구약 호14:5-6에 “내가 이스라엘에 이슬과 같으리니...”라는 말씀이 나오니 자기가 신도들에게 성령을 주는 자라 했고, 이를 근거로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천부교는 박태선이 주는 영을 ‘이슬성신’이라 했다. 그런데 또 천부교는 박태선과 이슬성신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천부교는 박태선이 주는 이슬성신을 받고 천부교 종교단체 안에서 살 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바울과 박태선을 비교할 때 박태선이 얼마나 무모한 주장을 했는지 바로 드러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종이 어떤 기적을 일으키거나 하나님의 종이 안수해서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도 절대 그 하나님의 종을 하나님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태선은 자신의 종교집회에서 나타난 어떤 종교현상을 자신을 신격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박태선이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죽은 역사를 고려하면, 박태선의 주장은 기독교측에서 볼 때 전혀 무가치한 주장이다. 박태선의 주장과 행태는 기독교 정신과, 기독교 경전인 성경과 전혀 맞지 않는다.

 

박태선이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이슬성신’이 기독교의 성령이 아님은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이 땅에서 신자들에게 완성시키시는 분이신데, 박태선은 예수께서 구세주가 아니라 가짜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그리고 박태선이 인용한 호세아서 말씀 “내가 이스라엘에 이슬과 같으리니...”는 “이슬이 광야에서 가지는 의미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촉촉한 은혜를 주시는 분이심을 뜻한다”고 비유적으로 해석함이 옳다. 저런 성경 말씀을 인간 박태선을 신격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슬’의 비유는 욥기에서도 나온다.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이슬같이 됨이니라(욥29:22).” 여기서도 이슬은 비유로 사용되었다. 욥의 말이 실제로 이슬의 모습처럼 사람들에게 임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마른 땅에 이슬이 내려 적시듯 욥의 말이 그 정도로 효과가 있었다는 말이다.

 

성경에 나온 비유적 표현을 어떤 정신현상(예를 들어 집단최면이나 환각이나 환상)과 결부시켜 그 비유의 성경 말씀을 성경 전체의 주제와 전혀 다르게 해석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