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마10:24, 25) : 불교 중들에게 해주는 설교

stevision 2012. 11. 23. 16:38

 

(2006년 10월 21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제자가 선생보다 못하다                                                                            English

 

 

성경말씀: 마10:24, 25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당신이 남을 속이려 마음을 먹었다고 합시다.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상자를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으로 보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은 먼저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 지혜를 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단은 먼저 당신에게 빈 상자를 금과 은과 보석으로 겉을 치장하라고 조언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치장된 그 빈 상자를 보며 생각할 것입니다. ‘저 안에 무슨 귀한 것이 들어있길래 겉을 금, 은, 보석으로 치장했나? 아마 보석보다 더 귀한 뭔가가 저 안에 있을 것이 분명해!’ 사람들이 빈 상자 주위로 몰려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어 잘 치장된 그 빈 상자를 보며 감탄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 모습을 보며 생각할 것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니 저것은 분명 굉장한 것일거야!’


여기에 덧붙여 사단이 자기 동역자를 붙여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학문과 지혜로 명성을 날리는 자입니다. 이 자가 그 빈 상자를 높게 평가합니다. 이에 많은 사람이 생각합니다. ‘저렇게 지혜로운 자가 좋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저 안에는 분명히 참 지혜를 발견케 할 뭔가가 있음이 분명해.’ 사단은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더 할 것입니다. 저 빈 상자를 신성시하고 많은 종교 의식을 행하게 하라. 사람들이 그 빈상자의 실체를 알아보기 전에 많은 연막을 쳐라. 많이 굶은 자가 그 상자의 실체를 잘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해라. 결혼하지 않고 음식도 가려먹어야 그 실체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해라. 웃지 않아야 깨달을 수 있다고 해라. 그래서 30년 정도 몸과 마음을 수양해야 깨달을 수 있다고 해라. 그들의 젊음이 그런 종교행위를 하는 동안 지나가게 해라. 이참에 아주 종교인으로 만들어라. 종교적 삶에 길을 들이고 만족하게 해라.


사단이 또 다른 조언을 합니다. 상자가 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30년 수행한 자 중에 특히 더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낙심한 자 중에서 몇을 뽑아 이 교의 선생이 되게 하라. 그리고 아직 저 상자의 실체를 모르고 몰려드는 많은 자들로 하여금 많은 존경을 받게 하라. 그러면 저들은 그것을 자기의 업으로 삼아 네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저희들끼리 사람들을 모으고 가르치고 종교의식을 행할 것이다. 이 선생들 중 어느 하나가 늙어 죽을 때쯤이면 자기가 뭔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는 자기를 존경하며 바라보는 남들의 눈 때문에 그 조직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러면서 이 자는 죽으면서 말할 것이다. 내가 일평생 저 거룩한 상자를 알려 했으나 내가 죄가 많고 수양도 잘 못하여 부족한 것이 많아 아직도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그는 아마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속았다고는 말못하고 죽을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감탄합니다. 남을 가르치며 저렇게 훌륭하게 살고도 자기가 부족하다고 말하니 저 자는 참 스승이다. 이 교에는 참스승이 많다. 마지막으로 사단은 당신에게 이런 조언을 할 것입니다. 마침내 그 빈상자가 빈 상자임을 깨달은 자들에게 세상이란 게 다 헛되고 빈 것이라 믿게 하고, 그 빈상자가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참 진리라 믿게 해라.


붓다(석가모니)를 스승으로 삼는 모든 불교인들은 붓다 이상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며, 세상의 좋은 것을 거부하며, 마침내 세상이 헛되다고 말하며 죽습니다. 그들은 신을 믿지 않고 자아의 실체를 부정합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으면 자기의 존재까지도 거부하는 자들이 불교인들입니다. 그들은 빈 상자를 가지고 많은 자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붓다는 세상이 싫어서 세상을 도피한 자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긍정적인면 보다는 부정적인 면에 마음이 끌리는 자들이 불교인들입니다.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한 말이 있다고 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온 천하를 다 뒤져보아도 자아가 가장 존귀하다. 이는 엄청난 착각이요 교만입니다. 따라서 철학적 개인주의자가 불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사슴이 죽어 그곳에 파리가 알을 낳아 구더기가 그 사슴의 사체를 다 먹어치워 나중에 그 구더기에서 파리가 나왔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한 마리의 사슴이 여러 마리의 파리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전의 사슴은 지금에 와서 전혀 의미없는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의 파리도 개구리에게 먹히게 되므로 없는 존재나 다름이 없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실체까지도 거부해야 합니까? 불교 교리가 너무 초보적이고 유치한 관찰을 가지고 너무 거룩하게 승화시킨 것은 아닙니까? 자기의 자아까지도 환상이고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은 세상을 사랑하는 욕심이므로 이를 버려야 참 기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교 교리의 핵심이고 전부입니다. 불교의 그 나머지 모든 것은 인간의 말장난일 뿐이고, 헛된 종교의식일 뿐입니다. 그들은 ‘무’에다 너무 많은 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덧붙여 놓았고 ‘무’를 너무 고상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불교의 출발점이 한 인간의 세상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처음에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부담을 안 줍니다. 그러나 빈 상자를 거룩한 상자로 믿게 해야 하므로 많은 인간적 지혜와 궤변을 요구합니다. 처음에는 확실한 것 같으나 들어가면 갈수록 이해하기 힘들고 공허함을 주는 것이 불교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생각해 낸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계시로부터 생긴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거부감을 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신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인간 인격의 주체의 근거인 영혼을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와 불교가 도덕적인 면에서는 대화가 가능하나 교리적이고 실체적인 면에서는 대화가 힘듭니다. 물론 대화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입장만 표명하는 대화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빈 상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므로 기독교의 전제도 빈 상자라 말할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학적 방법으로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은 금, 은, 보석으로 겉을 치장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기독교인이 되는 첫걸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사슴도, 파리도, 개구리도 다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먹이 사슬은 하나님의 허용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고 스승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선생으로 모시는 우리도 최대한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계셨던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아들, 인간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따라서 육신을 입은 우리는 가장 거룩한 상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상태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도를 지나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시느라 많은 고통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는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더 많은 고통과 모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도 고통을 당했거늘 하물며 제자가...


당신이 불교인이라면 당신의 영혼은 고아와 같이 홀로 고민하는 자가 됩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당신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당신이 불교인이라면 고난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고난을 자처합니다. 당신이 불교인이라면 삶의 모든 욕구와 그 충족을 의식적으로 거부할 것입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이 모든 욕구와 그 충족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감사할 것입니다. 당신이 불교인이라면 죽을 때 세상은 헛되다고 말하며 죽을 것입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지금까지 동행하신 하나님을 몸소 뵐 것을 기뻐하며 죽을 것입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힙니다. 기독교는 좋은 나무입니다. 십자가는 좋은 나무입니다.

(ps. 한 왕자와 여러 상것들:
붓다(석가모니)는 원래 인도의 어느 왕국의 왕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왕궁 밖으로 나왔는데 인간의 생로병사의 모습을 모두 보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고 그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연구하려 출가를 해 고행과 수행을 했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모든 인간의 마음의 번뇌는 욕심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고행은 육체의 모든 욕구를 끊어버리는 훈련이며 명상은 마음의 분별심(좋고 나쁜 것을 가리는 마음)을 없애 마음의 욕심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훈련입니다. 그리하여 고행과 명상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어 자유로운 자아가 될 때 해탈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깨달음을 매우 중시합니다.


그런데 이 고행과 명상을 통한 깨달음은 무식한 자와 어린이들에게는 머나먼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불교에서 거지나 어린이가 해탈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습니까? 그래서 불교에서는 해탈을 위해 반드시 중이나 비구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인연을 모두 끊어 버리는 것을 구원의 길이라 가르치므로 불교는 개인주의입니다. 누가 가르쳐서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스스로 깨우쳐 해탈하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이므로 남에게 아쉬울 것이 없고, 남에게 부탁할 것이 없으므로 불교에 심취한 자들은 당당하고 떳떳해 보입니다. 중들이 얼마나 떳떳하고 오만합니까? 그리고 있는 것도 다 포기하고 버리니 얼마나 인격적으로 고상해 보입니까? 많이 포기한 자가 더 큰 스승으로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도올 선생이 고려대 교수직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니면서 얼마나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까? 불교인들이 붓다를 더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복되게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가장 큰 고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포기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붓다야 포기할 것이 많아서 많이 포기하여 종교적 성취감을 느끼겠지만 당장 하루하루 살기가 벅찬 자들에게도 포기의 종교가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많이 가진 자가 포기하여 고상하고 청빈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고 권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이러한 종교가 맘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많은 상것들로부터 출발합니다. 기독교의 본격적인 시작은 모세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포기할 것이라고는 자기 목숨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히브리인이라 불렸는데 이는 당시에 ‘상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천민층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고통을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분의 종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해방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종교입니다. 종의 종교입니다. 가진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분을 유일한 주님으로 모시되 그분의 보호와 은혜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가장 중요하고 이는 어린아이나 거지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보면 복만 바라며 하나님을 섬기는 천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알고 있고 겸손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확실한 참 구원을 마음에 품고 평안과 감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