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요21:12) :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설교

stevision 2012. 11. 23. 16:35

 

(2006년 10월 20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큰 스승 예수님                                                                                English

 

 

성경말씀: 요2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저에게 기억에 남는 두 분의 선생님이 계십니다. 한 분은 초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저의 담임 선생님은 아니셨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선생님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그냥 악의 없이,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거울을 이용하여 그 선생님의 얼굴에 햇빛을 비췄습니다. 그런데 이분께서 말없이 다가오시더니만 갑자기 작은북 채로 제 등을 몇 대 내리 치시는 거였습니다. 얼마나 황당했는지요. 그 때 맞은 것이 얼마나 아팠는지 지금까지 기억이 납니다. 또 다른 분은 고 3때 담임 선생님입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선생님들께서 봉급에서 얼마를 떼시어서 장학금을 주셨습니다. 이 장학금은 성적이 좋다고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자기 반 학생을 한 사람 지목하셔서 주는 장학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혀 기대도 안 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그 장학금을 저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약간 좀 무서운 선생님으로 학생들 간에 소문이 나긴 했지만 저에게는 가장 존경스런 분이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좋은 스승은 역시 학생들을 인정해주고 가능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잘 성장시키도록 돕는 분일 것입니다. 학창시절 선생님의 칭찬 한 마리로 인생이 바뀐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선생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남자 나이 30에 들어서야 비로소 랍비(선생님)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30세에 들어서시며 선생님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스승은 지도자입니다. 스승은 지도자가 되어 제자를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그 제자를 제자를 낳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웁니다. 우리의 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지도자의 본을 보이셨습니까?

1. 지도자는 제자들보다 더 일을 많이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물론 제자들도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누가 제일 고생했습니까? 누가 제일 하나님의 일을 많이 했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항상 돌아다니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도하시느라 예수님은 잠이 부족했습니다. 그리하여 광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배 안에서 주무셔야 했습니다. 잡히시던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음식을 잡수셨겠습니까? 잠을 주무실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자는 길게는 1주일까지도 산다고 합니다. 저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지 몇 시간이 못되어 돌아가신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혹시 고통 기간을 줄여주시려 봐주신 것 아닌가 하고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의 어느 전사는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40 km를 뛰어 와 전하고 기진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께서도 3년 동안 머리 둘 곳도 없이 돌아다니시고, 특히 잡히시던 때부터 굶주리고 맞고 하시어 기진하여 일찍 돌아가신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스승은 제자보다 일을 더 많이 합니다. 손끝으로 지시만 하는 게으름뱅이가 아닙니다. 교만한 자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잠 잘 동안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자입니다. 제자들이 무서워 다 도망해도 자리를 지키는 자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하고 저주하는 말을 내뱉어도 자기 자리를 지키며 일을 하는 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1주일간 버틸 수 있는 자는 그 이전에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한 자입니다. 최선을 다 하지 않은 자입니다. 죽는 마당에 유산을 자식들에게 어떻게 넘겨줄까 걱정하는 자가 바로 이런 자와 비슷합니다. 우리의 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경계선에서 십자가를 맞이하신 것입니다. 최선을 다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2. 지도자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인간적인 말씀은 “내가 배가 고프다”나 “내가 아프다”가 아니라 “내가 목마르다”였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 정도는 큰 스승으로서 하셔도 될 말입니다. 지도자는 행동 뿐 아니라 말을 통해서도 제자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는 자입니다. 가능한 말이 있고, 해서는 안될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두 말씀을 안 하심으로 십자가의 죽음이 원통한 일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이셨습니다. 또한 세상 욕심이나 육신의 안락함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으심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단 세상 권력이 예수님 자신에게 아무런 해도 못 끼쳤음을 상징적으로 보이셨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세상 유혹과 육신의 안일함과 세상 권력에 휘둘리는 자가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을 보여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고통을 다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숨기고 제자들에게 늠름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고통이 실제적임을 보이셨습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허깨비의 모습으로 가짜로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충실한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을 부탁하십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의 마음의 시원하게 해갈시켜주는 냉수 한 그릇과 같습니다. 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목이 마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하나님 나라의 충직한 종들을 원하시고 찾고 계십니다. 큰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미지근한 물과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교육하셔서 마침내 냉수와 같은 자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그러니 이제는 너희들이 시원한 냉수처럼 충성스런 자들이 되거라.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을 마감하기까지 예수님의 이 절규를 기억하고 거의 다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승은, 지도자는 냉수 한 그릇과 같은 제자들을 길러내는 자입니다.

3. 지도자는 제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자입니다. 본문 성경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 아침상을 차려 놓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사실 누가 위로를 받아야 하고 누가 아침상을 대접받아야 합니까? 잡히신 후 갖은 고난과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입니까, 제 목숨 구하기 급급하여 도망친 제자들입니까? 당연히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로하고 그분께 아침상을 차려드려야겠지요. 하지만 제자들은 역시 제자들이고 예수님께서는 역시 큰 스승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아픔과 괴로움의 시간을 기억 속에다만 간직해 두시고 내색을 안 하십니다. 대신 철부지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며 힘을 주십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다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곤해서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셔서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큰 스승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책망 안 하시고, 그들의 소심한 마음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무능력을 이유로 그들에게 모욕을 안 주시고 대신 힘내라고 밥상을 차려 주셨습니다. 교회에서도 부흥 못시킨다고 아랫사람을 괴롭게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예수님을 닮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전도사가 좀 시원찮아서 교회학교가 부흥이 덜 되더라도 좋은 레스토랑으로 그 전도사를 불러 한 턱 내며 격려하며 뒤에서 기도로 밀어주는 목사님이 큰 스승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약점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분으로 여기지 그것을 핑계로 제자들을 괴롭히는 자가 아닙니다.

4. 지도자는 자기의 공로를 아랫사람들에게 돌리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차려놓으신 음식을 너무 먹어 큰 트림을 연거푸 하며 자기 배를 쓰다듬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인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께서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열심히 나가서 전도하여 예수님의 양을 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전도하고 양육한 공로가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사실상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모든 일에 마지막으로 참가하여 이삭을 거두는 제자들입니까? 그 공은 마땅히 예수님께 다 돌려야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천국에서 상을 주실 때 그 전도와 양육의 공로를, 즉 그 생명들의 구원에 대한 공로를 제자들에게 돌리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십자가에서 고생 당하신 예수님께 모든 공로가 돌아가야 마땅하지만 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공로 대부분을 제자들의 공으로 돌리십니다. 교회 지도자는 아랫사람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돌리는 자가 아니라 사실상 자기가 다 한 일인데도 그것을 아랫사람의 공로라 선포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아랫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자는 수준이 한참 낮은 지도자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자는 예수께서 이룩하신 구원 역사의 열매를 예수님과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좋은 지도자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좋은 계획을 세우고 그 실현 방안을 모색하여 확신이 있을 때 휘하의 사람들에게 적당한 일을 분배시켜 그들로 하여금 큰 성취감을 맛보게 하고, 성공했을 때의 공로를 휘하의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일의 전과 진행 중에 열심히 기도하고 어려움이 없도록 필요한 조치와 도움을 주는 것도 그의 몫입니다. 남들이 봤을 때 휘하의 사람들이 일을 다 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지도자가 일을 다 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거꾸로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누가 나쁜 지도자입니까? 나쁜 지도자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큰 직책을 맡습니다. 이 자는 전혀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않으며, 조그만 일을 벌여놓고도 힘들어 죽는소리를 하며, 거룩한 일을 위해 고통 당하는 척 하며, 휘하의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맡겨 놓고, 혹시 그들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없이 그들을 잘라버립니다. 이 나쁜 지도자가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섬김을 받고 있을 때 휘하의 사람들은 죽을 고생을 하여 하나님의 일을 완성시키면 이 나쁜 지도자는 그 모든 공로를 자기의 것으로 돌립니다. 여러분은 이런 자를 본받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독교 교육을 강의하신 적도 없고 교회 지도자론을 책으로 내신 적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기독교 교육과 교회 지도자론의 근거가 됩니다. 좋은 지도자는 훈련에서 탈락된 자들을 그 탈락을 이유로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도 훈련에서의 탈락 자체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개인별로 능력의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자는 봉사의 능력, 순종의 능력, 기도의 능력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습니다. 큰 스승은 이 능력 부족으로 인한 훈련의 탈락을 죄로 여기지 않고 그 탈락자의 약한 모습으로 여기며 인내를 가지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그를 지도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겠다는 예수님을 꾸짖으며 말렸습니다. 제자가 건방지고 교만하게 선생을 꾸짖어? 그것도 짧은 생각을 가지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감이 아직 덜 익은 것을 아시고 베드로를 속으로 용서하시며 계속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까지 퍼붓는 베드로는 인간의 약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아! 3년 간의 기나긴 실습이 헛수고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베드로는 세상으로 다시 갔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이것은 완전한 배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갈릴리 바다까지 찾아오셨습니다. 끝까지 포기 안 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끝까지 베드로를 포기 안 하셨습니까? 포기는 제자나 하는 것이지 스승이 하는 게 아닙니다. 큰 스승일수록 마음이 넓습니다. 예수께서는 창녀, 세리, 심지어 속 좁은 바리새인까지 제자로 삼으실 수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드로를 끝까지 버리시지 않은 이유는 베드로의 진심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타인으로부터 직접 나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기분이 어떤지 아십니까? 한국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카이스트에서 교수가 한 학생에게 ‘이 미련한 놈’이라고 진심으로 말했다면 이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선함을 근본 이념으로 삼는 교회에서 ‘나쁜 놈’이라고 선생이 제자에게 말했다면 그 제자가 얼마나 낙심하겠습니까? 교회에서는 ‘능력 없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까지는 가능하나 능력만 없는데 죄 없는 형제에게 ‘나쁜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나쁜 사람’이 어떻게 ‘선한 교회’ 안에 머물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 선생은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의 제자들을 나쁜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넓으신 큰 스승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또한 교회에서는 이렇게 예수님을 본받아 가르치기를 잘 하는 참 스승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대학 교수보다도 더 존경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성직자나 평신도 지도자 다 해당됩니다. 살면서 참으로 기절초풍할 뻔했던 일은, 전혀 본받을 것이 없던 어떤 성직자가 제게 “나를 본받아라”고 호통을 쳤던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대들보와 같은 자신의 단점을 발견해서 고칠 생각은 안하고 타인의 눈에 있는 티끌만 보고 호통을 치려 합니다. 큰 스승이신 예수께서 당시에 많은 자들로부터 스승대접을 받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교훈이 바로 그런 것이었지요. 예수님의 교훈 중에 중요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또한 스스로에 대해서는 자신의 외모보다 내면의 정결함을 추구하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외모란 개인의 학력, 재산, 개성, 외적 종교 생활이 해당될 겁니다. 교회 지도자는 자신이 세운 기준에 따라 지도자 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교회 지도자는 예수님의 인격과 행동과 그분의 가르침을 기준 삼아 지도자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