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욥2:10) :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한 설교

stevision 2012. 11. 23. 16:30

 

(2006년 10월 18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English

 

 

성경말씀: 욥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과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이 세상에서는 계산에 빠른 자가 지혜롭다 인정받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습니다. 밑지고 장사하다 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분명히 어리석은 자임이 분명합니다. 성경 여러 말씀 중에서 욥기가 우리에게 가장 심오한 신앙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욥기의 주제는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거래에서 과연 밑지고 장사할 자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가 있다면 당장 찾아가서 고함을 지르고 멱살을 잡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주먹질하거나 경찰에 넘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다 손해를 보면 이런 분풀이를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 옷자락이라도 보여야 붙잡고 하소연을 하지요!


오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왜 우리에게 욥과 같은 고난이 닥칠 수 있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이유를 알고 나면 우리는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이기고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욥1:1에 보니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이 순전하다 하는 말은 그 마음과 행실 속에 잡된 것이 섞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잡된 것은 탐욕과, 음란과, 시기와, 불평, 그리고 미움과 같은 것들입니다. 욥은 이런 잡된 것이 마음에 없는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정직한 자였습니다. 세상에는 정직한 것만큼 타인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정직한 자는 거짓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분이시므로 거짓을 싫어하시고 거짓말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잠12:22에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요8:44에 의하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항상 거짓이 자리잡고 있어 입으로 거짓을 말하는 자는 다 마귀의 자녀이고 마귀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이런 것은 사랑이라 할 수 없고 종노릇이라 하겠죠. 욥이 항상 정직히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 사랑과 신임을 받았으나 마귀의 눈에는 가시와 같은 자였습니다. 욥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욥의 이러한 아름다운 믿음 생활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돌아온 사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8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세상에서 사단은 수없이 욥을 유혹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욥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유혹을 이겨내자 사단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나님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울타리)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비록 거짓의 아비 사단이 한 말지만 이 말은 전혀 틀린 게 아닙니다. 사실 욥은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의 소유물은 아들 일곱, 딸 셋, 양이 칠천, 약대가 삼천, 소 오백 겨리, 암나귀 오백, 다수의 종이 있어서 그는 동양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자였습니다.


여러분, 왜 욥이 고난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미워하셔서, 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냥 맘에 내키는 대로 다루실 수 있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욥의 의로움을 아시고 계셨고 여전히 사랑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한 마디 더 합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마귀가 예언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예언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것이 마귀의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께 혹시 불길한 말을 했을지라도 마음에 담아 두거나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욥의 모든 소유물을 쳐도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엄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욥이 하나님께는 그의 믿음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사단에게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믿음을 완전히 인정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그가 고난의 잔을 마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승인하신 것은 욥이 사단을 완전히 이길 수 있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자를 자꾸 의심하며 시험하여 고난을 주는 것이 바로 마귀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단을 이길 수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많은 시험을 거쳐야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법관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투옥시키고 심지어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는 법관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도 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이 시험은 세상적인 지혜를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시험에서 나오는 모든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가난을 견뎌내야 가난 때문에 시험이 든 자를 권면할 수 있습니다. 모욕을 견뎌내야 모욕을 당해 시험든 자를 권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자연히 마귀의 방해가 있게 되고 교회에 고통이 임하게 됩니다. 이 때 과거에 마귀의 시험을 거뜬히 이긴 자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교회를 이끌 수 있습니다.


마귀가 욥의 자녀와 그의 가축을 하루아침에 다 죽이거나 약탈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욥은 큰 시험을 견뎠습니다. 욥의 아내도 이때까지는 용케 견뎌 냈습니다. 이런 엄청난 시험을 이기게 한 욥의 믿음은 1:21에 보니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였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사실 맞는 말입니다. 이때까지도 욥은 자기의 자녀, 자기의 가축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고 있었고,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것을 도로 찾아가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는 정직하기로 소문난 욥으로서는 당연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돈을 꾸고 나서 갚을 때 왠지 아까운 마음으로 돌려줍니다. 그러나 이는 정직한 마음이 아닙니다. 욥처럼 현실을 바로 보고 마음이 정직한 자는 자기의 자식이나 자기의 재물을 하나님께서 도로 찾아가실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갖고 있을 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재물이나 자식의 상실 또는 가족의 상실 때문에 오는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가난하여 돈 많은 자에게 가서 돈 좀 꿔 달라고 간청해도 그가 거절했다고 해서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소문내고 돌아다닐 수 있습니까? 마음이 정직한 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자는 그가 거절해도 돈을 꿔주고 안 꿔주는 것이 그의 권리라 여기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혹시 가난하여 하나님께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안 들어 주실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정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욥처럼 정직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러한 기도 응답을 못 받아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욥은 정직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졌던 자기의 모든 재물과 자식이 하나님의 것이었다고 인정하였고,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도로 가져가셨을 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욥처럼 정직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자가 정직한 자입니다.


마귀가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꾸짖으시며 말씀하십니다. 2:3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이에 사단이 말합니다. 2:4,5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러분, 사단이 또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예언은 힘이 없습니다. 사단의 말을 요약하면, 욥이 하나님과의 거래에서 자기가 아직 밑진 장사를 안 해서 하나님을 원망 안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것을 하나님께서 취하셨으니 아직 손해를 안 봤다고 욥이 생각하고 있다고 사단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의 몸을 치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손해를 봤다고 여기게 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욥이 주께 대들고 욕을 할 것이라 사단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그의 몸을 치되 그의 생명만은 건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욥기 전체를 보면 욥의 고난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8 악창이 나서 피부가 견딜 수 없이 가렵고, 7:5 가죽이 합창되었다가 터지며, 19:17 숨쉴 때마다 냄새가 나고, 30:30 피부는 검어져서 떨어져 나가고 뼈는 열기로 인하여 타며, 30:17,30 갈비가 떨어져 나갈 것 같고, 19:20; 30:18 몸이 극도로 수척해지며, 7:4, 13-15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립니다.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몸의 병뿐만 아니라 불면증과 악몽도 마귀가 의인에게 일으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몽을 꾸는 것 자체가 자기의 신앙이 나빠서 생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괜히 계속되는 악몽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자기가 죄를 져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성령께서 떠나시고 악령이 와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물론 악몽을 꿀 때 자기의 신앙 생활을 점검은 해야겠지요. 어쨌든 욥의 몸이 이러니 욥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아내도 죽을 지경입니다. 어쩌면 병에 걸린 자보다 곁에서 간호하는 자가 더 역겹고 견디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욥의 아내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은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2:9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지키겠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의 아내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는 분명히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배신감 뒤에는 하나님을 믿어 손해봤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욥은 자기의 믿음을 지킵니다. 2:10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과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뇨.”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욥의 이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 혹독한 육체의 고난과 그로 인한 명예의 실추를 겪고도 욥은 아직도 자기가 하나님을 원망할 처지가 못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욥은 과거에 하나님께 받은 복을 생각해 봅니다. 건강한 복, 자식 복, 재물 복, 많은 자들에게 존경을 받은 복을 생각해 봅니다. 태어나서 지금 늙을 때까지 받아 누린 복을 생각하니 지금의 재앙은 자기가 받은 복보다 작았습니다. 욥의 아내는 이 단계에서 하나님을 만나 손해봤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꼈지만 욥은 그의 아내보다 생각이 더 깊어 아직도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입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들보다 더 생각이 깊은 자들이 되시라! 아마도 욥은 하나님께서 아주 비참한 방법으로 자기의 생명을 취하실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 자체도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이 단계에서도 마귀의 시험을 이긴 것은 과거에 자기가 받아 누린 복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간혹 납득할 수 없는 재앙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때도 욥처럼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자기가 이미 받았던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간혹 속을 썩입니까? 여러분들께서는 그 자녀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 자녀가 여러분께 준 기쁨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가끔 서운하게 굴 때가 있습니까? 여러분께서는 그 남편이나 아내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상대방이 자기에게 준 기쁨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는 정직하지 못한 자입니다.


여기까지는 욥이 옳았습니다. 욥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자기 몸에 재앙이 닥쳤습니다. 이때 욥이 가진 믿음은 자기가 적신(벌거숭이)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갈 사람이라는 것과, 과거에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았으니 현재 재앙을 만나도 원망할 처지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재앙 자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믿음만 가져도 사단의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하기 시작합니다. 사단은 규정에도 없는 트릭을 씁니다. 물론 그것이 사단 자신의 고유한 업무이긴 합니다만, 사단은 인간들을 통해 욥의 자존심을 건드려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드디어 욥이 화낼 일이 생겼습니다. 그의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 욥을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욥 네가 죄를 졌거나 너의 자식들이 죄를 지어서 지금 재앙을 만난 것이니 하나님께 회개기도하고 용서받으라고 합니다. 욥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지금까지 정직하게 살아오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산 것을 욥 자신이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짓지도 않은 죄를 고백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짓으로 회개기도? 사실 욥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동방의 의인입니다. 욥은 회개할 일이 별로 없는 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큰 재앙을 만날 만큼 큰 죄를 욥은 절대로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친구들이 돌아가며 욥 네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며 뒤에서 몰래 죄졌지?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며 음란한 마음을 품고 다녔지? 이런 식으로 말하며 억지로 욥을 회개기도 시키려 하니 욥이 하나님께 약간의 반항끼로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직접 나타나셔서 제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제가 죄 지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이자들에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여러분, 남을 이유없이 정죄하고, 죄인취급하고 억지로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을 때 교만하고 거만하고 순종 못한다고 하며 모욕을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마귀의 눈을 갖고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며 인정하시는 자를 죄인으로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형제를 정죄하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하셨거늘.


제가 아는 어떤 교회에 장로님과 권사님이 다퉜습니다. 이 권사님께서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전혀 없는데 담임 목회자와 장로님이 자기를 정죄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권사님께서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다른 교회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떠나온 교회에서 명예회복을 시켜주고 나서야 다시 그 교회에 나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권사님과 대화를 나눴는데 교회를 떠난지 몇 년이 된 그 때에도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교회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남을 정죄하는 것이 그 영혼을 죽이는 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이유없이 죄인취급 당하는 자는 그 교회에 도저히 발붙일 수 없게 됩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이 사단의 최후 수단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단의 최후수단의 도구가 되지 않으려면 눈수술부터 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형제를 선한 사람이라 인정해주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구역질나는 자기 의와 독선으로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와있는 명시적인 죄가 아닌 이상 자기가 정해놓은 윤리나 도덕의 기준으로 교회에서 타인을 정죄하면 안됩니다. 사람마다 윤리나 도덕의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 가운데 그 누가 고의로 타인을 무시하고 해를 끼치려 윤리나 도덕을 범하겠습니까? 따라서 자기 눈에 거슬려도 상대방이 성경에 명시된 죄를 범하지 않은 이상 그를 나쁜 사람으로 봐서도 안됩니다. 그를 자기보다 더 선한 자로 봐야 합니다. 이게 정상적인 기독교인의 태도입니다. 어떤 자는 형제의 표정이나 목소리 심지어 웃는 소리까지 트집잡으며 정죄하려 합니다. 저는 도저히 그런 사고방식이 이해가 안 갑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성경이 경고를 했거늘. 마귀는 이세벨의 마음에 들어가 의인 나봇을 하나님과 왕을 저주한 자로 정죄하여(죄가 있다고 하여) 그를 돌에 맞아 죽게 만듭니다. 마귀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십자가에 죽게 합니다. 우리가 왜 타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을 가지고 왈가왈부합니까? 옆집 아저씨가 당신에게 당신이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을 가지고 맨 날 귀가 닳도록 훈수를 두려한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타인의 신앙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사람들은 왜 기도를 짧게 한다고 타인을 죄인취급하며, 은사 못 받았다고 성령도 못 받은 자로 취급하며 얕보고 무시하며 모욕하고, 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그렇게 미지근하냐고 죄인 취급합니까? 그냥 놔두세요.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시고 기뻐하시니 당신이나 잘 하세요.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선언하는 것은 불법의 극치요 마귀의 최후 수단입니다. 마귀의 도구가 되지 맙시다. 겸손한 자는 이런 마귀의 도구가 되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자기의 신앙 자체를 의심받는 것은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욥은 여기서 약간 넘어졌습니다. 죄없는 남을 정죄하는 것이 욥같은 위대한 인물조차도 넘어지게 만듭니다. 사실 살다보면 타인의 눈이 가장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무인도에서 혼자 살며 나 혼자 고통당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욥이 친구들이 괴롭혀도 꾹 참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으면 더 좋지 않았는가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는 타인의 눈과 평가 때문에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타인에게 재앙이 임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위로와 힘을 줘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욥이 끝까지 자기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내세워 그의 친구들의 말을 인정하지 않자 세 친구들이 욥을 억지로 회개하게 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임하셔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가 있으나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강한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는 욥이 알지 못하는 많은 비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죄를 지어서 재앙이 임했다고 주장하는 욥의 세 친구를 책망하셨습니다. 이로써 욥은 죄를 지어서 재앙을 받았다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내리신 재앙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 안 하셔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매일 제사드릴 때마다 뵙고 싶었던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비밀들이 많고, 자기가 당한 재앙도 그 비밀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피조물인 내가 감히 하나님께 왈가왈부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욥의 마지막 믿음이었습니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사건의 본질을 통찰하는 힘도 강합니다. 진리와 진리, 사랑과 사랑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거든요. 사람은 때로는 이유를 묻는 자에게 그 이유를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 이유를 강요하는 것도 형제를 괴롭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유를 묻지 않고 덮어주는 것은 사랑이 되겠지요. 이렇게 욥처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까닭없이 임하는 재앙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욥이 두 번째 임한 재앙에서 한 말을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10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시면서 하시는 말씀 요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와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신장 한 쪽을 떼어가버리면 이는 분명히 큰 재앙입니다. 어떤 잉꼬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남편은 아내를 평소에 정말로 헌신적으로 사랑해줬습니다. 이 아내는 언제나 그 사랑을 고맙게 여기고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에게 재앙이 임했습니다. 신장병에 걸린 것입니다. 병이 악화되어 신장 이식수술이 아니고는 완치가 불가능했습니다. 가족들이 다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아내를 비롯하여 몇 사람이 신장을 기증해도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여러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자기 신장을 떼어내는 재앙을 받아야 할까요? 누가 그 병자에게 신장을 떼어줬을까요? 남편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아내가 아닐까요? 아내가 다른 사람들이 기증하겠다는 것을 다 만류하고 자기가 자원하여 나서서 그 재앙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욥이 살던 당시에 하나님께서 욥 하나만 복을 주셨을까요? 분명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단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그들 모두는 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생각하십니다. ‘누군가 한 사람쯤은 큰 재앙을 받아 그 시험을 이겨내어 많은 자들에게 참된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하는데, 과연 누가 그 재앙을 달게 받을 수 있나?’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는 복을 많이 받아 행복하게 잘 살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자도 필요하고, 때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완성시키는 자도 필요합니다. 사단의 궤변을 타파하기 위해 어느 누군가가 하나님께 재앙을 받아야 한다면 누가 재앙을 받는 것이 합당합니까? 이제까지 하나님께 복과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욥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과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시고 높임과 존귀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십자가의 저주를 받을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누가 그 재앙을 받아야 할까요? 하나님께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예수님이 아닐까요?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자원하여 달게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가장 많이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아닐까요?


사실 하나님을 만나 밑진 장사했느니, 이익을 남겼느니 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합당하지 못한 말입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욥과 같은 재앙을 당했을 때, 욥과 같은 재앙이 눈앞에 닥쳤을 때,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 판단되었을 때, 여러분은 욥의 말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남달리 사랑을 받고 복을 받았은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남달리 손해도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혹시 교회 건축을 앞두고 있는 개척교회에 다니고 계십니까? 교회 건축을 위해 과도하게 건축헌금을 하다가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분명 인간적으로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아 누려왔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런 재앙도 하나님을 위해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은 자신의 믿음이 욥처럼 성숙한 상태에서 해야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고 섣불리 나서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고 장한 일이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욥이 나중에 이번 환란을 통해 잃었던 것 보다 두 배로 복을 더 받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빚지시고는 못사시는 분 같습니다. 그 고통과 눈물과 모욕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당한 욥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아무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것을 허용하시고 나중에 갑절로 갚아 주십니다. 어찌 갑절뿐이겠습니까? 욥이 죽은 후 지금까지 성경을 읽는 자마다 다 욥이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칭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돈으로 계산이 됩니까? 많은 자들에 칭찬 받는 것은 그저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자녀를 누가 칭찬합니까? 칭찬은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감수한 자만이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칭찬의 복까지 주시려고 짧은 기간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고난은 짧고 칭찬은 길다 - 이것이 바로 신앙의 법칙입니다. 욥과 같은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