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창32:27-28) : 인생성공을 원하는 자들을 위한 설교

stevision 2012. 11. 23. 16:32

 

(2006년 10월 19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하나님과 사람을 이긴 자                                                                    English

 

 

 

 

성경말씀: 창32: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세상에는 강한 것이라고 해서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거센 태풍이 휘몰아치면 평소에 강함을 자랑하던 굵고 큰 나무는 넘어져 쓰러지거나 그 가지가 부러집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라도 꺾어버릴 수 있는 약한 갈대는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절대로 뽑히거나 부러지지 않습니다. 현대에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둘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주인 노릇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면 야곱은 처음에는 그리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쌍둥이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언뜻 듣기로 어떤 나라에서는 쌍둥이 중 나중에 태어난 자가 형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같은 날에 태어난 쌍둥이라도 먼저 태어난 자가 형이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에 쌍둥이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동생이 절대로 자기 쌍둥이형한테 ‘형’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동생이 형한테 하는 말이 훨씬 부드러워졌고, 그 둘 사이에 군기가 꽉 잡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겠지요.


야곱도 커가며 형과 동생의 장벽에 부닥치게 됩니다. 아버지 이삭은 마음 착한 야곱은 거들떠보시지도 않고 좀 야성적이면서 가끔가다 부모님 말씀에 불순종도 하는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야곱은 점점 성격도 바뀝니다. 계집애 같이 집에 틀어박혀 어머니 리브가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야곱은 나중에 많은 사람을 제치고 크게 성공할 것 같은 인물이 못될 것 같아 보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태어날 때 불리한 조건을 가졌으나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크게 성공하는 비결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주는 교훈대로 살면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자도 야곱처럼 많은 사람을 제치고 인생에 있어서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욕심이 많은 자였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 뱃속에서 누가 형이 될 것인가 다툴 정도였습니다. 이 둘이 하도 발로 차대니까 그 어머니 리브가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어찌 이다지도 제 배가 아픕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 국민이 네 뱃속에 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 야곱은 얼마나 형이 되고 싶었는지 나올 때 형 에서의 발을 잡고 나왔습니다. 첫 게임에서는 야곱이 에서에게 져서 야곱은 동생이 됩니다. 나중에 팥죽 사건으로 야곱은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나중에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도 빼앗습니다. 이를 분히 여긴 에서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야곱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외삼촌댁에 피합니다.


그 후 20년이 지나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떠나옵니다. 이 때도 정상적으로 인사를 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외삼촌 몰래 자기 몫의 양들을 가지고 도망쳐 나옵니다. 지금까지의 야곱은 자기 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꾀로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출세하려 했고, 자기 꾀로 남을 속여 복을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남을 속이기 좋아하고, 남을 믿기 싫어하고, 자기에게 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잔꾀 많은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형과 만나기 전에 자기 종들을 미리 보내 형 에서에게 선물을 줍니다. 그 종들이 야곱에게 돌아와서 말합니다.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주인님을 만나러 오십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318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섯’ 왕들의 군사를 무찔렀음을 볼 때 에서는 이미 상당한 권세를 가진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없는 사이에 에서는 그 지역의 큰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야곱에게는 인생의 최대 위기가 닥쳐옵니다. 가족이 몰살되느냐 아니면 살아 남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내일이면 형 에서를 만날 텐데, 아버지와 형을 농락하고 축복을 가로챈 자기의 처지는 매우 불확실했습니다. 특히 형이 400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온다는 말을 듣고 과연 자기가 속여 빼앗은 그 하나님의 복이 실제인지 거짓인지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때 형이 배고파 할 때 팥죽을 공짜로 주는 건데 하고 후회도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온 가족과 가축을 먼저 앞서 가게 하고 자기는 홀로 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 한 것 같습니다. 이 때 어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다짜고짜 야곱은 그 자와 씨름을 합니다. 이 낯선 사람은 새벽까지 야곱을 이기지 못하자 그의 환도뼈를 쳤고, 야곱의 환도뼈는 삐게 되었습니다. 그가 야곱에게 말합니다. “게임 그만 하자. 날 샜다! 날 좀 놓아 줘라. 나 이제 가야겠다. 재미도 없고.” 그러나 야곱은 말합니다. “나를 축복해 주지 않으시면 절대로 이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야곱의 땀 냄새가 좀 심했던지, 아니면 야곱이 고집이 너무 셌던지 이 사람은 더 이상 못 버티고 야곱을 축복해 줍니다. 그런데 축복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나중에 야곱은 그 씨름장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브니는 얼굴이고 엘은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인간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얼굴만 본 것이 아니라 그분과 씨름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창조이래 그 누가 하나님과 샅바를 잡고 씨름했습니까? 야곱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씨름 전적은 0승 1패입니다. 약간 좀 초라한 전적이죠.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정식으로 인간과 씨름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끈질긴 야곱을 생각하시면 다시 인간과 씨름할 맘이 안 생기셨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승하셨을 때 그분의 맘에 드는 마땅한 상품이 없다는 것일 겁니다. 하여튼 더 황송한 것은 야곱이 그 씨름에서 이겼고, 그 상으로 하나님의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축복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라.” 야곱은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와서 얻은 이름입니다. 즉 맨날 2류 인생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은 또한 간교하고 거짓말을 잘함으로 얻은 이름입니다. 즉 2류 인생으로 살면서 남을 속이며 등쳐먹으며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은 야곱이 이런 이류 인생에서 벗어나 일류 인생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모두 일류 인생의 약속을 하나님께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이기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을 때 좀 실망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치셔서 다리를 절게 만들었습니다. 절름발이를 만들어 놓으시고 “네가 사람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야곱에게 튼튼했던 다리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옛날에 형에게 쫓겨 도망갈 때 야곱을 구한 것이 바로 튼튼한 두 다리였습니다. 이제 내일도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면 즉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야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최후의 생존수단을 치셔서 망가뜨려 놓으셨습니다. 야곱을 치셔서 그의 다리를 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이제부터 네 힘이나 네 꾀를 버리고 온전히 너의 하나님 나만 믿고 살아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 내일 야곱이 살고 죽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맘을 부드럽게 하시면 야곱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야곱은 꼼짝없이 거기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 야곱을 죽게 하려고 그 상태로 야곱을 만드셨을까요? 이제 야곱이 믿을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신실하심뿐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복을 약속 받았으나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자신의 꾀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꾀로 살다보니 남을 속이는 죄를 범하게 되며, 남에게 쫓겨다니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믿음으로 사시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살면 이전의 야곱처럼 남을 속이며 죄를 짓고, 남에게 쫓겨다니는 이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살면 이스라엘이 되어 일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믿음으로 사시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일류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절게 하시어 그의 자존심을 꺾으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에서는 강한 자였고, 야곱은 약한 자였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자신의 강함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약자인 야곱을 절게 만드신 것입니다. 에서가 400명을 괜히 그냥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야곱을 응징하려 자신의 군대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여 꾀지지한 모습으로 다리를 절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 형 에서가 생각합니다. ‘아니, 저 녀석 저 꼴이 뭐람! 나는 지가 나를 속이고 하나님의 복을 가로채 도망가서 뭔가 큰 인물이 되어 돌아오는 줄 알았는데. 야! 내가 저 불쌍한 놈을 지금 쳐죽인다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여러분 같으면 400명의 부하들이 보는 중에 다리를 절며 꾀지지한 모습으로 형이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동생을 죽일 수 있습니까?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 터프한 모습을 자랑했던 에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사람을 이겼다.” 야곱이 그 당시 이겨야 할 대상은 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했던 야곱을 억지로라도 겸손히 만드셔서 강한 에서의 마음을 분노에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에서가 동생 야곱을 부등켜안고 울며 말합니다. “내 동생 야곱아, 집 떠나면 고생인데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 특히 어머니께서 그러시는데 외삼촌 라반 그 양반 굉장히 짠 분이라던데, 외삼촌 집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 엉엉...” “형님, 지금 하신 말씀은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흑흑...” 물론 이 부분은 성경 본문을 약간 각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 분위기는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자기보다 약한 자를 이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자는 이길 대상이 아니라 돌볼 대상입니다. 하지만 자기보다 강한 자를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런데 이 복은 그 강자를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을 보이고 자기의 약점을 보임으로써 강자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강자는 자기 힘을 과시하려 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도전하는 자를 무참히 짓밟아버립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런 강자의 마음을 돌이켜 사랑의 마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그 당시에 골리앗처럼 강한 다리와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에서 앞에 나타났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그 날 이후 야곱은 마라톤 선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겸손히 만드셔서 에서의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 이제 에서는 야곱의 원수가 아니라 야곱을 돌보는 자가 됩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많은 가축을 가지고 왔는데, 당시의 사회는 무법천지여서 야곱은 자기 가족과 가축을 스스로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야곱에게는 4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든든한 형이 있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이 감히 야곱의 집안에 손찌검을 못했습니다. 야곱의 형 에서의 얼굴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좀 과격한 면이 있었거든요. 실제로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동생 디나를 강간한 세겜 집안 사람들을 다 죽였을 때 그 지역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에게 해코지를 못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지방에 두려움이 임하게 하셔서 그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방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신 수단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족을 죽이려는 자들의 눈에 성난 에서의 얼굴이 아롱아롱 떠오르게 하셨을 것입니다. 터프한 에서가 야곱을 사랑하고 돌보고 있는데 감히 누가 야곱에게 해를 끼쳤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은 원수가 변하여 나를 돕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야곱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겨 이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이 복을 받으셔야 세상의 강자가 나에게 원수가 되지 않고 나를 돕는 자가 됩니다.


야곱이 그 지역에 정착하여 살만 하니 그 형 에서는 그 지역을 동생 야곱에게 물려주고 다른 곳으로 갑니다. 여러분, 결과적으로 다리를 절며 나타난 야곱이 승자입니까, 400명을 데리고 왔던 에서가 승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복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네가 사람을 이기리라’ 말씀하신 대로 야곱이 에서를 최후에 이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는 작은 승리가 아니라 큰 승리입니다. 만약 야곱이 또 다시 꾀를 내어 형을 죽이고 그 지역을 차지했다면 야곱은 작은 승리를 얻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승리를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마음을 얻어 그의 도움으로 그곳에 정착하고 나중에 에서가 그 지역을 양보하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큰 승리를 얻기 위해 사람들 앞에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이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겨뤄 이겼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인간적으로 보아도 매우 얄미운 야곱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주시고 씨름에서도 져주시기까지 하면서 야곱에게 복을 주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에게 약속하십니다. 동생이 형보다 크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야곱이 둘째로 태어난 것이 바로 복인데 야곱은 그저 형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오랜 기간 야곱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더라도 약속을 받은 당사자가 그릇된 길로 가고 하나님을 거역하면 하나님께서는 촛대를 옮겨 다른 자에게 복을 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비록 인간적으로 부족한 야곱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심지어 하나님을 이기고 복을 쟁취한 이유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예배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는 자였습니다. 심지어 빈들에서 돌베개를 취하여 잠을 자고 깨자마자 단을 만들고 그 곳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야곱이었습니다. 사실 기름은 여행 중에 꼭 필요한 양식이 아니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가족은 한 집에 사는 자들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한 집에 살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예배를 중히 여기셔서 예배당에 기쁜 마음으로 오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식탁에서 아름다운 대화가 오고 갑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얼굴을 보고 자식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자리입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자녀들의 안색을 살피고 몸은 건강한지 세상살이는 어떤지 물어보시고 필요한 도움을 줍니다.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과 같이 식사하는 시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암에 걸려도 말기에 이르기까지도 모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하루에 몇 개씩 암세포가 생겼다가 파괴된다고 합니다. 몸이 약하면 그것을 파괴할 수 없어 병이 되는 거죠. 이런 것 저런 것 모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얼굴을 보였다고 합시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암세포를 보시고 그냥 있으실 수 없으십니다. ‘저런! 저 김집사는 위에 암이 생긴 줄도 모른 채 나를 예배하러 나왔구나. 오늘따라 찬양을 더 힘차게 부르네. 내가 너의 병을 보고만 있을 순 없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치료해 주십니다. 마치 식탁에 둘러앉은 한 자녀의 얼굴에 상처가 있는 것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그것을 치료하도록 돕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각자 각자의 문제를 보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예배에 참가하지 않으면 이런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증거입니다. 세상말로도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맘을 꽉 잡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고약한 짓을 하고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께 야곱처럼 고약한 짓을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얄미운 짓을 한 야곱을 벌주시고 그 촛대를 옮겨 다른 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었으나 야곱이 자기 자식처럼 행세하니 하나님께서 차마 벌을 못 주시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즐겨하는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는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많은 자들이 과거의 야곱처럼 강단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되어 그 복이 자신에게 임하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브니엘에서의 하나님과의 씨름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한 이스라엘로의 거듭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에서처럼 내가 기독교인이니까 당연히 저절로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라 착각하며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심는 대로 거두는 복입니다. 또 어떤 자들은 야곱처럼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여 주의 종으로부터 설교를 통하여 축복의 약속은 받으나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자기 꾀로 살다가 진짜 복을 받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야곱이 왜 잔꾀를 부립니까? 그것은 인간이 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부정한 방법을 쓰고, 아부하고, 뇌물을 줍니까? 인간이 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그런 짓을 합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 이삭이 자기에게 복을 준다고 착각해서 그를 속여 억지로 축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실제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은 복을 주는 자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종이고 도구일 뿐입니다. 자기 신앙과 믿음과 사회 생활이 건전하지 않은 자가 아무리 신령한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았다 하더라도 복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야곱이 좀 더 믿음이 있었더라면 인간적인 졸렬한 방법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만약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큰아들 에서에게 복을 선포하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입을 틀어막아 잠시 벙어리가 되게 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랬다면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큰 고생을 않고, 형과 원수가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에서가 야곱에게 그 지방을 양보한 것을 보면 그러한 양보가 더 쉽게 야곱에게 주어졌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장자가 아니면서도 장자의 복을 누린 자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요셉이 바로 그런 자였습니다. 그는 서열상 장자에서 멀어도 한참 먼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은 타인이 가로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축복의 약속을 받고도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경거망동하여 그 복이 타인에게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가라고 야곱에게 말씀하셨을 때 인사도 하지 않고 무례하게 도망쳐 나가라고 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쩨쩨한 분이십니까? 야곱은 또 자기 꾀를 내어 자기 것만 챙겨 도망쳐 나옵니다. 그 어느 누가 이런 야곱을 장하다 하겠습니까? 외삼촌 라반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야곱이 자초지종을 다 말하고 정중히 하직 인사를 고했다면 라반은 야곱에게 더 많은 재물을 줘서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라반이 나쁜 사람이라 빈손으로 돌려보낼 맘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엄중한 경고를 하셨겠지요. 결국 나중에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야곱을 해치지 말라고 경고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집에는 이스라엘과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여 축복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불신앙적인 것들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도움을 힘입어 삽니다. 이런 자들은 욕심 때문에, 다급한 마음에 졸렬한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비난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모범적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항상 기적을 체험하며 살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삽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과 같은 자입니다.


야곱만 씨름장을 가진 게 아닙니다. 각 교회마다 브니엘 씨름장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씨름장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진짜 브니엘 씨름장입니다. 새벽에 씨름대회가 열리거든요. 누구나 예배당에서 야곱과 같은 이류 인생에서 이스라엘과 같은 일류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가까운 교회에 나가셔서 새벽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여러분께서 기도를 계속하시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씨름장을 떠나실 수 없습니다. 마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교회 부흥과 여러분 각자의 삶의 성공은 교회 브니엘 씨름장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어떤 기도 제목에 대해 ‘그것은 기도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지 않는 이상 여러분의 그 소원은 유효한 것이고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그 때에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나사로의 몸이 죽어 썩어 냄새가 날 때 이전의 그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기도 응답은 죽음도 막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도 응답까지의 기간은 절망하여 죽음을 맛보는 것 같고 마음이 썩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 다음에 부활과 같은 승리와 기쁨의 기도 응답이 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전능하심이 다시금 세상에 널리 알려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세상에 알리는 자들입니다. 마7:7,8의 예수님의 이 약속을 믿고 열심히 하나님께 끝까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는 자가 하나님도 이기고 사람도 이기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이 진정한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