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23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기독교와 불교
성경말씀: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인생이 무엇인지 몰라 80년을 인생에 대해 연구하다 생을 마친 유식한 철학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집 옆에는 철이 들면서 단지 인간의 삶이 동물의 삶과는 다른 가치를 가졌음을 깨닫고 열심히 일하고, 돈도 벌어, 장가도 가고, 자식도 여럿 남겨 삶을 즐기는 가운데 희로애락을 다 맛보고 죽은 자가 있다고 합시다. 과연 누가 더 값진 삶을 살았는지 여러분께서는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 자기 앞에 있는 하나의 물체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연구하다가 시간을 낭비하고, 또 자기 자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헛것은 아닌지 연구하다 생을 마치는 자들이 있다면 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불교는 열반의 세계(구원)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부처의 제자(중,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중으로 살지 못한 사람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윤회) 중이 되어야 열반에 들어갑니다. 결혼도 안하고 고기도 못 먹고 몇 십 년 간 살아야 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처야 구원을 받는다? 이 얼마나 가혹한 구원관입니까?
불교의 구원(해탈)은 한 마디로 말해서 육과 영의 영원한 죽음입니다. 해탈은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희로애락과 모든 인연과 모든 인과법칙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감각과 정신이 완전히 기능을 정지해야 이런 상태가 되는데 이것이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필자는 영원한 죽음의 교리를 불교에서 보았습니다. 불교인들이 말하는 범아일여의 종교체험도 현실과 동떨어진 환각에 불과합니다. 나와 온 세계가 사랑과 미움의 모든 감정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체험을 불교인들은 해탈의 경험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황홀한 종교 체험을 마치고 나면 뭐가 바뀌어져 있습니까? 현실은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자신을 자신으로 인식하며 의지를 일으켜 행위하는 자아 자체를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부인합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실제가 아니고 환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허무맹랑한 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아까지 부정하는 불교에서 무슨 의미 있는 삶의 가치를 연역해 낼 수 있겠습니까? 좀 심하게 말해서 온 세상이 괴롭고 피곤하니 영원히 죽자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이것을 불교는 미사여구로 그럴듯하게 철학화하고 윤리화하고, 여러 종교 의식으로 덧씌워 놓았지만 정통 불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삶과 인간의 육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봅니다. 불교는 인간의 삶 자체를 저주(고난, 고통)로 보고 여기서 탈피하는 것이 구원(해탈)이라 합니다. 처음부터 기독교와 불교는 역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가치는 진과 선과 미와 애의 근원이시고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연역됩니다. 불교는 공(空)과 무(無)를 최종적인 가치로 봅니다. 기독교 교리는 하나님을 만난 자들로부터 유래합니다. 불교 교리는 인간의 세상에 대한 관찰(세상 돌아가는 것을 석가모니가 깨달아 불교가 나옴)로부터 유래합니다. 고로 기독교는 위로부터의 종교이고 불교는 아래로부터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겉으로 나타나는 종교 의식을 중요시하지 않고 세상의 신격화 내지 우상화를 금하고 하나님 자체를 형상화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무(無)가 최종적인 가치라 주장하면서도 현란한 종교의식과 우상을 장려합니다. 그 이유는 불교교리의 핵심인 무(無)만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처음 접하는 자들은 처음에는 기독교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으나 기독교에 심취할수록(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고 삶을 기쁘게 누리고 창조자에게 감사를 드리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의미와 모든 진선미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며 흡족해하며 삽니다. 그러나 불교에 입문한 자들은 처음에는 많은 종교 의식과 우상들 때문에 눈에 차고 마음이 안정될지라도 불교에 심취할수록(무(無)에 가까울수록) 그 마음이 공허(空虛)해지며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집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인생 철학입니다. 서양 철학 가운데에서도 불교교리와 비슷하게 윤회 사상과 육체를 벗어난 영혼의 해방을 주장하는 학파가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이미 서양 철학에 들어있는 불교의 핵심 교리를 이전에 알고 있었고 이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따라서 서양인들이 한국 불교를 배우려고 우리 땅에 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이전에 기독교가 서양 철학사에 나오는 불교의 핵심 교리를 거부한 것도 모른 채 기독교가 불교에서 뭔가 신기한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불교 주위를 맴도는 기독교인도 그것에서 크게 뭔가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서양에서 윤회와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탈피를 주장하는 유사종교격인 철학이 대중들의 지지를 계속 받을 수 없었던 것은 기독교의 출현으로 그 허황한 교리가 쓸데없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반면 동양에서는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 철학을 좇는 불교 교단이 생겨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샤머니즘이 불교 교리에 합세하여 원래 불교로부터 다른 방향으로 빗나가서 하나의 종교가 되어 지금까지 존속해 온 것입니다. 필자가 단편적으로나마 불교 교리를 알아본 결과 우리와 불교인들은 도저히 같은 멍에를 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과의 대화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불교의 심볼인 만(卍)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불교 교리에는 네 가지의 진리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들은 불변하는 실체를 부인합니다. 기독교인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수십억의 인간 개개인의 독자성과 삶에 대한 책임성을 말하지만 불교 철학에서는 이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입니다. 둘째. 그들은 현실을 허상으로 봅니다. 나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과 세계 역사 그 자체가 나에게 실제적인 의미를 주고 있어야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살 수 있습니다. 불교는 나와 세상을 헛것으로 보기 때문에 기독교가 말하는 자아에 대한 영원한 책임성이 전혀 낯선 것입니다. 셋째. 불교 철학은 객관을 도외시한 지독한 주관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라고 했답니다. 물론 말도 못하는 갓난아이가 그런 말을 했을 수가 없겠죠. 후대 불교인들이 불교의 핵심 교리를 깨달은 그를 높이려고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냈겠지요.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로지 자아밖에 존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객관주의가 0%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자아이든 범이라는 자아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불교인은 마음을 중시합니다. 그게 문제이지요. 진리는 객관과 주관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주관만을 주장하면 자폐증 환자입니다. 일부 정신병자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불교인이 자기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둘 다 주관주의의 절대화로 인한 오류입니다. 전자는 병 때문에 나온 오류이고 후자는 오만과 착각과 교만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흰옷을 입고 흰 수염을 휘날리며 바위 위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염력을 통해 세상을 움직이려는 도사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넷째. 불교는 순환적인 시간관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어 이생에서 공덕을 쌓지 못하면 천한 짐승으로 환생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에는 네 가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실체성과 인간 개인의 실체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진 ‘개인’이 받을 형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인격이 현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엄하신 하나님께서는 행악자들에게 사망의 벌을 내리시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 큰 사랑을 베푸십니다. 둘째. 십자가의 형벌은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단지 허상이 아니고 심각한 실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십자가는 자기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엄연한 객관적인 형벌을 말해줍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마술에 도통해도, 그리고 자신이 의인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자신이 죄가 없다고 아무리 확신해도,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심판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장도, 대법원장도, 재벌 총수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개인의 주관적인 죄와 하나님의 객관적인 형벌을 말해줍니다. 넷째. 십자가는 직선적인 역사관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서 십자가의 은총을 거부한 자는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맛보고, 이 땅에서 십자가의 은총을 받아들인 자는 영원한 복락을 누립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는 이 땅에서 오로지 한 번만 세워졌을 뿐입니다. 구약은 십자가 사건을 애타게 바라보며 기다렸고 신약은 그 십자가 사건을 세상 종말 때까지 증거할 것입니다. 불교의 교리는 이 네 가지 기독교 핵심 교리를 거부하게 만드는 왜곡된 전제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심볼이 꺾여진 십자가(만(卍))인 것입니다.
우연찮게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마의 화신인 히틀러가 세운 나찌당의 심볼이 불교의 심볼과 같이 꺾여진 십자가입니다. 이 둘은 각각 실천적 악마와 이론적 악마입니다. 둘 다 십자가가 표상하는 진리를 왜곡시켰습니다. 나찌당의 악행은 부패하고 악마적 신학(게르만(독일민족)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헤겔의 철학을 추종하는 신학)에 물들은 독일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받아 자행된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인 독일의 나찌당의 행위는 기독교인이 종처럼 온 힘을 다해 겸손히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십자가의 교훈을 짓밟은 것입니다. 불교는 하나님 대신에 인간 자신만을 보게 했고, 개인의 죄의 심각성과 그 형벌의 준엄함을 못 보게 했습니다. 또한 영원한 기쁨과 생의 충만이 넘치는 천국대신에 영원한 죽음이 구원인양 미화하여 사람들을 그곳으로 내몰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부인하게 만들고 십자가의 진리를 촌스럽게 여기는 기만적이고 철학적인 종교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마귀는 불교의 핵심 교리를 깨닫는 자가 부처(불교가 말하는 최상의 존재)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우연찮게 창세기에서 마귀의 화신인 뱀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깨달음을 얻어) 하나님(기독교가 말하는 최고의 존재)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이런 허황한 각성의 교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믿는 믿음을 가르칩니다.
인분(人糞)과 다이아몬드가 함께 섞여 있다면 이는 혼돈 자체입니다. 불교는 좋고 나쁜 것이 다 인간이 생각해 낸 것일 뿐 원래 다 똑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해골에 고인 물도 예쁜 커피 잔에 담긴 물도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합니다. 단지 인간이 어떤 것은 깨끗하게 보고 어떤 것은 더럽게 볼 뿐이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정말로 그러합니까? 여전히 불교인들도 금을 사랑하고, 좋은 집을 마련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과 그 측근은 고귀한 장소에 머물며, 악당들은 천한 감옥에 있지 않습니까? 인간 사회는 철저하게 가치에 따라 나누어져 있습니다. 금과 똥이 구별이 없다면서 왜 불교인들은 불상에 똥을 칠해놓지 않고 금박을 붙여놓습니까? 또 왜 불교는 철저히 승려를 계급화하여 위계질서를 강조합니까? 모든 가치의 등급을 부정하는 것은 혼란(혼돈)을 초래합니다. 가끔 정신이 혼미해진 두꺼비가 불교를 믿는 가정집에 정기적으로 출몰하면 그 집 불자는 그 정신나간 두꺼비가 자기 조상인줄 알고 그것에 절합니다. 인간이 정신 나간 두꺼비에게 절하는 것이 바로 혼돈입니다. 가끔 어떤 어린아이가 옛날 죽은 유명한 고승과 비슷한 행동을 하면 불교인들은 그 어린아이가 죽은 그 고승이 환생한 줄 알고 그 아이에게 절하며 어른으로 섬깁니다. 진짜 어른들이 진짜 아이에게 절하는 것이 바로 혼돈입니다. 가정도, 회사도, 군대도, 나라도 바른 위계질서가 있어야 바로 섭니다.
성경은 맨 먼저 어떤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땅이 혼돈(混沌)하고 공허(空虛)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1:3),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1:4)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과 공허를 극복한 창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배제시키고 세상을 관찰해 보면 세상은 괴로움 투성이이고 혼돈 자체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능한 빨리 빠져나가 영원히 쉬는 것이 인간에게 유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인간에게 불교는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미와 진선미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세상은 아름답고(보시기 좋았더라(1:4)), 의미에 차 있고, 살 만한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진과 선과 애의 근원이시므로 기독교는 하나님을 최고로 가치 있는 분으로 보며, 하나님께 대적하는 존재들이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반대를 이루는 것들을 천하고 악한 것으로 봅니다. 천하고 악한 것과 귀하고 선한 것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혼돈을 막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에서는 모든 가치가 정립되며 혼란이 사라집니다. 그 때 사람은 진짜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보며, 진짜 천하고 악한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가치판단이 인간으로 하여금 바른 생각을 하게 하고 바른 길을 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인간 자신의 지혜의 끝과 결정체가 불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불교를 극복하면서,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를 배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불교의 최고 가치인 공허함을 극복하시고 세상의 혼돈함과 어두움(흑암)을 극복하십니다. 그 다음부터 그분께서는 장대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전개해 가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 불교의 종착점이 기독교의 시발점입니다. -
-우리가 불교가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지식을 가진 것입니다.
많은 자들이 이 지식을 접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창41:40-41) : 흑인들을 위한 설교 (0) | 2012.11.23 |
---|---|
설교(벧전3:1) : 여성 신학자들에게 해주는 설교 (0) | 2012.11.23 |
설교(마10:24, 25) : 불교 중들에게 해주는 설교 (0) | 2012.11.23 |
설교(요21:12) :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설교 (0) | 2012.11.23 |
설교(창32:27-28) : 인생성공을 원하는 자들을 위한 설교 (0) | 2012.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