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벧전3:1) : 여성 신학자들에게 해주는 설교

stevision 2012. 11. 23. 16:43

 

>> 신학을 배우고 나서 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서 설교한 설교와 그냥 제가 작성해 놓은 설교들 중 몇 편을 모아 설교집 파일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포함한 몇몇 글들은, 2003년 7월 [내게 다가온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제목의 설교집을 한글(hwp)파일로 작성한 것을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렸다가 이곳에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내게 다가온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던 글들의 제목은 아래 덧글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2003년 7월 당시에 몇몇 분들께 이메일로 이 설교집을 발송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

 

(2006년 10월 24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파라페미니즘(Para-feminism)                                                           English

 

 

 성경말씀: 벧전3: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함이니
벧전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전에 감리교 교단신학을 수료하는 중에 지정된 과목 외에 덤으로 여성신학 강좌를 청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여성신학에서 아주 많은 새로운 점을 발견하고 남자로서 많이 반성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여성의 눈으로 보는 시도가 바로 여성신학입니다. 성경이 남성들의 기준에서 남성들에 의해 기록되어 여성들에게 매우 불리한 성경 구절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의 여성신학자들은 제가 보기에 여선지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교회에서, 가정에서 새로운 남녀관계를 정립하는 데 영감과 지혜를 주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성목사안수 문제도 그들에 의해 제기되어 쟁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신학자들은 아직도 교단 안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어서 그들의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어서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그들의 주장이 옳은 면이 다분히 있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주장에 대해 100% 찬성 할 수만은 없어 반론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저의 글이 건전한 비판이 되어 여성신학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제목을 파라페미니즘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페미니즘이 여성적 시각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남성의 입장에서 본 기존의 페미니즘은 너무 여성 중심적 시각에 치우쳐 있어서 남자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여성신학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는 여성적 시각에서 본 여성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적 시각에서 본 여성신학입니다. 여성적 시각에서 본 여성신학이 정통 여성신학이라면 후에 그러한 여성신학을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한 것이 바로 파라페미니즘이라는 말입니다. 두 여성신학이 정반합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야 비로소 교회에 유익한 신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일부 여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여신으로 부르려합니다. 하나님의 남성성은 남자들에 의해 고백되고 기록된 성경에 의해 제시된 것일 뿐이지 여성들의 입장에 부합하는 신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원래 남자, 여자의 구별이 없으신 분이니 여신으로 불러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여 교회나 가정에서 남자의 권위가 정당화되고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는 힘, 능력, 권능, 자비, 공의, 거리감이 있고, 어머니는 사랑, 친근함, 가까움이 있습니다. 자녀와 관련하여 아버지는 존재의 원인이고 어머니는 자녀 탄생의 원인 수용과 자녀의 몸을 구성하는 것의 제공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무한한 권능과 자비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아버지가 적격입니다. 성경이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하나님 이미지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자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에 그 다스림의 권세 차원에서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모르죠 나중에 전 세계 50% 이상의 나라에서 여자가 대통령이나 수상이 된다면 그 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정치적, 사회적으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면 필연적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유출된 것이라는 생각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한 원인 제공자이시지 이 세계를 이루시는 분이 전혀 아니십니다. 또 선교적 차원에서 볼 때 어머니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남신을 섬기는 자들이 기독교의 어머니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기독교가 자기네들의 종교보다 열등하거나 무력하다고 여기지는 않을까요? 또 세상에서 권세를 잡은 행악자들이 하나님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회개하여 기독교로 개종할까요? 성경에 하나님의 여성적 이미지가 몇 군데서 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수천 년 동안 하나님 아버지로 인식되어온 하나님을 갑자기 어머니로 부르면 많은 혼란이 있게 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대부분의 여성신학자들은 남자 중심의 권위적 제도를 무조건 다 가부장적 제도라 하여 이를 타파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이 주인이 되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가정의 본래 목적을 생각할 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 가정이 필요하고, 왜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만들어 놓으시고 아무도 함부로 그 울타리를 헐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이유는 정결하고 거룩한 자녀를 얻기 위함이셨습니다. 난잡한 자녀들이 태어나도 괜찮다면 굳이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는 튼튼한 울타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정결하고 거룩한 자녀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입니다. 왜냐하면 정결한 몸에서 나온 아이가 정결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어머니의 정결과 부정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는 오직 한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많은 여성분들께서 항변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 말씀이 남자들에 의해 쓰여졌다고 말하며 이 기준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이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야곱이 두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첩을 두고 열두 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그 가정은 정결한 가정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첩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은 잦은 전쟁 때문에 남자들이 많이 죽어서 평생 결혼도 못하고 죽을 여인들이 많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제가 첩제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여인이 정결한 남자로부터 임신하여 낳은 자녀가 가장 거룩한 자녀입니다. 그러나 혹시 일이 잘못되어 거룩치 못한 남자가 한 여인을 취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았다면, 그 남편은 거룩하지 못할지라도 그 아내와 자식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자들입니다.


여자에게 순결이라는 것은 매우 큰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순결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모든 남자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본성은 다른 남자와 관계한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하기를 싫어합니다. 이 땅에서 흘린 모든 땀의 보상이 정결한 아내라고 남자들은 백이면 백 다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결혼 후에 아내가 처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자는 인생 전체를 헛되게 산 것이라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남자와 여자에게 책임과 의무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합니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순결이 남자들이 여자들을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여 여성의 순결을 가치없게 여기게 만드는 자는 먼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고, 남자들에게 범죄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성신학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사회 여권운동자들 중에 순결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아담이 이브를 보고 내 뼈와 내 살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피와 몸의 세포는 계속하여 새로운 것으로 바뀝니다. 아담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얻어낸 양식은 이브의 살과 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 그 자체입니다. 결혼 후 1년이 되기도 전에 한 여인의 몸의 피는 100% 새 피로 여러 번 바뀝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50년을 남편의 월급으로 살아온 여인의 살과 피와 뼈는 완전히 100% 남편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어찌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며 남편의 권위를 가볍게 볼 수 있습니까? 지금도 많은 남자들이 일터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남자의 평균 수명이 여자보다 한참 낮은 것을 여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여인이 고속도로로 멋진 승용차로 여행한다고 합시다. 그 고속도로는 누가 만들었으며, 그 차는 누구의 땀으로 만든 것입니까? 그리고 이 여자의 집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바로 남자들이 이것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온 천지를 보십시오. 지금도 여자들은 남자들의 피와 땀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죄송한 말이지만 사실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여인은 그녀의 남편이 가장 낮아졌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남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받은 여인은 그 남편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인 그 남편이 무참히 천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 가족을 위해 죽을 고생을 한 남자가 또다시 천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까? 헌신적인 남편을 공경하는 것은 공평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악한 세력들이 도처에 널려 있어서 선한 것이 악한 것에 오염되고 파괴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특히 선한 것이 약한 존재일 때 강하고 악한 것의 밥이 될 경우가 많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가정파괴의 주범은 간음이나 강간입니다. 성경은 유부남 유부녀가 간음하면 둘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점에서 성경은 공평합니다. 때로는 한 남자의 아내가 자기 뜻에 반하여 다른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성경은 강간한 남자만 죽이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일은 공백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는 혹시 그 남편이 그 일을 견딜 수 있으면 계속 데리고 살고, 견딜 수 없으면 그 여인 홀로 살도록 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이 남편이 아내를 위로하고 함께 살아야겠지요. 성경에 강간한 남자만 죽이라고 한 것은 분명 그 여인의 권익이 더 이상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강간당해 부정해진 아내를 더 이상 못 보겠다는 자를 어떻게 하나요? 이런 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는 것 보면 세상의 위협을 간과하여 부정해진 여인을 하나님께서도 어찌하지 못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경솔하게 밖으로 나돌아다니지 마라고 여러 번 경고한 남편의 말을 무시했다가 큰 일을 당한 경우 그 아내의 죄가 적지 않습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라면 부인들께서 자녀들 교육비를 번답시고 함부로 직장을 구해 가정의 평화를 깨는 일이 없어야 겠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죄 외에는 이혼의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간은 간음과 다르므로 자기 부인이 혹시 강간당해도 이혼은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집에서 가사만을 하게 하는 것은 여자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가정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신앙을 가진 여자라도 세상에서 일할 때 자기를 위협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 일생을 망칠 위험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일단 강제로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도, 자기를 사랑했던 남편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엎질러진 물을 누가 담을 수 있습니까? 경솔하게 행하여 몸을 더럽히는 행위는 고의가 아니더라도 남편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됩니다. 사실상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남자들이 아내들이 집에서 집안일을 잘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을 여성에 대한 차별로 치부하여 이를 가부장적 잔재로 단정하고 거부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단편적 시각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적에게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강점을 내세워 싸우는 단체나 국가가 경쟁력 있습니다. 아무리 여권이 신장되고 사회에 남녀평등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위험은 감소하지 않고 더 증가할 뿐입니다. 좀 더 경쟁력 있고 거룩한 가정은 남자가 밖에서 나가 힘써 일하고 부인은 집에서 집안일을 잘 하는 가정입니다. 특히 자녀를 섬세한 사랑과 주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달란트는 여자들이 받았습니다. 남자는 자기 젖을 절대로 먹일 수 없습니다. 모든 갓난아이들은 갓나온 따뜻한 어머니의 젖을 빨 권리가 있습니다.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한 것은 여자의 지적 능력이 남자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자의 근육을 여자의 근육보다 더 강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노동을 염두에 두신 것이지 권력과 우격다짐의 수단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더 세졌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한 집안에서 아내가 남편에 복종하지 않으면 여자가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여자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주장을 원시적 근육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할 여성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가정은 십중팔구 불행해지거나 파경에 이릅니다. 그 뒷감당을 누가 합니까? 세상에는 왕보다 똑똑한 자가 많으나 왕에게 복종합니다. 그래야 그 자들이 불행해지지 않고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여자들의 행복을 위해 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특히 외국 여신학자들의 주장을 한국적 토양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유교 윤리가 몸에 밴 한국 사람들에게 남편을 주인양반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복음이 있다면 전도가 되겠습니까? 성경에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하고 무능한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대신 인간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남자가 아내를 사랑해주고 아내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자기보다 덜 힘있는 여자를 아내로 선호하는 것이 남자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여인이 남편을 다스리고 지도하려한다면 남편은 본성상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보다 나이가 적고 자기가 지도할만한 여인을 아내로 고릅니다. 결혼은 거룩한 계약입니다. 성혼맹세에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공경한다고 합니다. 이런 맹세 하에 결혼한 여성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물론 서로 존중하고 존경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두 의견이 나왔을 때는 성혼맹세대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행이 싫어서 능력 있어 돈 많고 똑똑한 여자가 자기 남편을 다스리기 위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고 무능한 남자를 택해 결혼했다고 합시다. 세상 사람들이 이 부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남자는 자기의 젊음을 팔았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고, 여자는 돈으로 남자를 샀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능력 있고 똑똑한 남자가 무능한 가엾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합시다. 세상 사람들은 대뜸 이를 두고 신데렐라 결혼이라 칭송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과연 몇 %의 여인들이 자기보다 못난 남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진정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고 그를 부양하겠다는 마음을 먹습니까? 세상에 돈 없는 백수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자들이 몇이나 됩니까? 적어도 유사이래 남자는 당시에 경제적으로 무능한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들을 보호하고 먹여 살렸습니다. 때로는 가정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자존심도 버리며 일한 것이 남자입니다. 따라서 가정에서 완전 평등을 주장하기에는 아직 좀 이르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니, 오히려 사실상 의무와 권리상 평등한데 여성분들께서 의무를 과소평가하시고 권리를 과대평가해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약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대신 남자들이 약한 여자를 좋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들을 겸손하게 만드시고 그렇게 행하게 하셨습니다. 몸이 약한데 교만하면 자신에게 불행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여자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구조가 다 그렇습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겸손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남자들은 집에 있는 여자들보다 더 혹독하게 복종을 해야 합니다. 왜 이것을 여성들이 알지 못할까요? 아마도 사회에서 혹독한 복종을 안 해봐서 그럴 것입니다.

종교의식

여성 신학자들 중에 구약의 종교법 중에 여성에게 불리한 것들이 많다고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여성을 종교적으로 불결한 존재로 본다는 거지요. 구약에 월경중이거나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하게 취급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성들을 차별하셔서 남자들과 구별되게 다루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여인을 부정하게 보려는 의도로 그렇게 규정한 게 아니라 몸이 불편한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입니다. 이는 그러한 처지에 있는 여인들에게 종교적 의무를 면제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월경 중에 있는 여인들은 교회 예배에 참석 안 해도 되고, 이것이 종교적으로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여인은 한달 간 교회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몸조리해도 되고, 딸을 낳은 여인은 보너스 한 달을 더 하여 두달 간 교회에 나오지 않고 몸조리해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요즘처럼 생리용품이 발달하고 생리통 약이 좋은 시대에는 월경을 핑계로 예배를 참석 안 하면 안되겠죠. 왜 딸을 낳은 여인에게 한달을 보너스로 더 쉬게 하나님께서 하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딸을 낳아 시댁집안 사람들로부터 산모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을 하나님께서 참작하신 것 같습니다. 월경 중에 고통 당하는 여인과 아이를 낳은 여인에게 남자와 똑같은 종교 의무를 과하면 그들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결이라는 억지 핑계(?)로 여인들에게 호의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기간을 두신 것은 그 기간 동안 남자가 접근을 못하게 하여 여인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정하신 하나님의 속뜻은 약한 여인을 더욱 섬세히 보호함에 있었고, 남자들에게는 남자로서의 특권의식을 고취시키셔서 더욱더 종교의무에 충실케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성들은 다만 하나님의 속뜻을 속으로 감사히 여기고 남자들에게는 남자들이 부럽다고 말만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과하신 의무를 여성 몫까지 힘들게 다 합니다. 사실은 여성들이 편히 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불평하나 하지 않고 모든 일을 남자들이 다 합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남자들이 좀 불쌍하죠. 이참에 여성들은 남자들이 의외로 좀 단순하다는 것을 아시고 가끔 칭찬만 좀 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이 아니더라도 일 잘 한다고 하고,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빈말이라도 존경한다고 해 주십시오. 그러면 평생 편하게 사랑받고 사실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여성이 하나님께도 인정받습니다.

여성신학자들의 성경말씀 오해

여성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하다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지는 성경말씀을 찾아내어 하나님이 남자만 사랑하시고 여자를 천대했다고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합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아론과 미리암 이야기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고 미리암은 누나였는데, 아론과 미리암 둘 다 모세를 대항하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론은 그대로 놔두시고 미리암에게만 부끄러운 병이 들게 하셔서 창피를 주셨습니다. 이 일을 놓고 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여자인 미리암만 벌하셔서 여자들을 무시했다고 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 때 만약 아론 대신 미리암이 대제사장이었다면 하나님께서 미리암은 그대로 두시고 아론만 벌하셨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벌을 내리실 경우 그 후에 아론이 정상적으로 직무를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대제사장 직무를 감당해야 하는데, 그렇게 부끄러운 벌을 받으면 대제사장 권위가 추락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은 직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게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그렇게 힘들여 일을 하니 약간의 사소한 잘못은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하니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신 것이지요.


여성신학자들이 또 문제를 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제물로 안 받으셨는데, 입다의 딸은 제물로 받아 결과적으로 여자는 죽여 제물로 받으시고 남자는 죽음을 면케 하셨다는 겁니다. 맞는 말이지만 이 두 사건은 동일한 차원의 사건이 아닙니다. 이삭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식을 바쳐라” 명하신 후 아브라함이 정말로 순종하려 하자 말리신 것입니다. 이와 달리 입다는 경솔하게 하나님께 먼저 “저를 영접하러 제 집에서 제일 먼저 나온 자를 죽여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망령된 약속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죄없는 다른 집안 사람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입다의 외동딸이 제일 먼저 집에서 나오게 하셨던 겁니다. 교만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종교심을 과시하려는 자에게 경고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딸이 죽도록 하신 것입니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또 여성신학자들이 사도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조용히 하고, 남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명한 것에 적잖이 서운해하고 있더군요. 교회가 남자들만 있어도 소란스러운데 여자들까지 나서서 자기 주장하면 보기가 좋지 않아서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또 당시 사회 통념상 바울이 말하는 여성상이 좋은 여성상이었을 경우 거기에 맞게 교회도 분위기를 조성해 놔야 처음 교회에 나온 자들이 거부감 없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옛날에 교회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했던 여성신학자들이 그와 같은 주장을 하면 이해가 됩니다만, 교회학교 교사하기 싫어서 농땡이 친 여성들이 바울의 주장이 섭하다고 하면 안되겠지요. 웃자고 한 얘기.) 오늘날의 여성들께서는 교회 교육자의 문이 활짝 열렸으니 아무 걱정 마시고 열심히 교회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사회가 능력 있는 여성을 우대하고 있으니 바울이 당시의 사회 분위기 때문에 했던 주장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게 못됩니다. 은혜로운 교회 분위기가 바울의 본뜻이었으니 여성들이 교회에서 일 할 수 없을까 너무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일부 여성신학자들이 성경의 본뜻을 오해하여 반기독교적 주장을 하는 데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을 여성의 해방, 더 나아가 자신들이 보기에 약자인 자들의 해방에 두려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여성을 해방한다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남편의 권위를 묵살하려 하고, 심지어는 창녀들의 인권 운운하기도 하며,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반기독교적인 주장입니다. 또 여성신학자들은 약자들의 인권운동을 전개한다며 불교 비구니들과 연대하기도 합니다. 어떤 여성신학자는 기존의 하나님이 남자를 편애했다며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를 떠나 새로 여신교(女神敎)를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면 안되지요. 이러한 사태는 여성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교만함도 있었고요. (물론 지금까지 수천 년 간 여성들이 남자들의 등쌀에 시달려 남자들의 권위적 행태가 무조건 싫었겠지요. 아마 지금쯤은 여성들의 유전자에 남성권위증오 인자가 형성 돼 있겠지요. 오, 불쌍하고도 딱한 여인들. 쯔쯔쯔, 애달프도다. 그러나,)

결 론

제가 보기에 하나님께서는 남자보다 여자를 더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여자를 남자보다 더 약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약하게 만드신 책임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성들이 약함으로 인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 하셨으며, 더 많은 혜택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성들이 스스로 교만해지는 것은 원치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공동체 파괴의 영성을 초래합니다. 공평한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더 큰 의무를 주셨기 때문에 그에 따른 영예도 허락하십니다. 일부 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여신으로 부를 게 아니라 여자들을 더 사랑해 주시는 성부 하나님으로 불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성신학은 가정에서 여성이 남편에게 주 안에서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여성 신도의 수가 더 많아서 교회에서 여성들이 그에 맞는 지도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도 욕심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남자 수가 적은 것은 현대 사회가 남자의 신앙 생활을 많이 제약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도시의 여성들은 과거 농촌의 아낙들보다 한가한 시간이 더 많지 않습니까? 여자로서의 특권과 행복을 더욱 발견해 내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여자로서의 의무를 발견해 내고 이를 실천하기에 힘쓰며, 남자의 괴로움을 발견해 내어 위로하기를 힘써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사랑과 조화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한국적 상황에 적합한 여성신학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남자들을 낙심케 하는 여성신학은 쓸데없는 궤변일 뿐입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