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요3:1-15) : 영생을 바라봄

stevision 2012. 11. 27. 11:50

 

(2007년 8월 15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영생을 바라봄                                         English
말씀: 요3:1-15

  

 

>>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우이독경(牛耳讀經)과 동문서답(東問西答)은 언어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잘 표현해주는 한자성어입니다. 정신 수준이 낮은 자에게 고상한 진리를 아무리 귀가 따갑게 말해줘도 도통 의미전달이 되지 않는 게 바로 우이독경일 것이고, 질문자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대답하는 게 바로 동문서답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질문자 스스로가 낮은 정신 상태에 있어서 답변자가 올바른 대답을 해줘도 질문자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문서답이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좋은 선생님 정도로 믿고 따르라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되신 선생 정도로 이해해서는 절대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인간이 되신 구세주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세상에 많은 헛수고들이 있으나 제일 심한 헛수고는 오늘 본문 말씀의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선생 정도로 알고 그분께 덕담이나 윤리강의 들으려 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많은 자들이 예수님을 단지 선한 선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그분께서 주시는 영생을 놓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보다 부모형제를 더 사랑하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윤리로 따지자면 제3자인 예수님을 자기 부모형제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엉터리 윤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자기 부모형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만 합니다. 마귀가 많은 자들에게 “예수는 선생이다”라는 생각을 주입시켜 더 고차원적으로 그들이 예수께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영생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는 이 ‘선생’이라는 거짓 껍데기를 벗기시려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고차원의 진리를 이해하려면 기본을 갖춰야 합니다. 영어 독해력이 없는 자가 대학 3,4학년의 원서를 갖고 공부할 수 없습니다. 수학을 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전공으로 배울 수 있습니까? 수학을 이해하지 못한 자는 결단코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과연 어느 분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으시고, 그분께서는 과연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께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라 선언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예수님)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예수께서는 또한 당신 자신께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여러분, 이 진리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영생을 얻어 하늘나라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이 진리를 알고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위의 진리를 보통 인간의 지혜로는, 즉 땅에 속한 보통 인간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하늘에 속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3절의 ‘거듭나다’라는 말씀은 ‘위로부터 나다’라는 말씀으로도 이해될 수 있고,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했고, 예수께서는 ‘위로부터 나다’라는 뜻을 중심으로 설명하셨고, 또한 ‘다시(새로) 태어나다’라는 뜻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우리 말 ‘성령으로 나다(태어나다)’라는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그 말씀이 우리가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는 뜻만을 말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이 성부 하나님께서 낳으심에 기원을 두고, 그분의 인성(人性, 인간의 영과 육)이 성모 마리아가 낳음에 기원을 둔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으로 태어나다’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새로 성령께서 우리를 낳으셨다’를 뜻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모 마리아의 ‘낳음’을 통해 인간의 육신을 입어 이 세상에 들어오셨듯이, 완전한 인간들인 우리가 성령님의 낳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로 새롭게 태어나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낳으심으로 우리에게 어떤 신성(神性)의 일부가 첨가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도 우리의 영과 육은 인간의 영과 육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면 우리의 존재에 신성이 첨가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8:13-17)” 유대교 사상에 꽉 찌들어 있던 니고데모는 성령께서 우리들을 새로 낳으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던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종이고 인간은 종의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맘을 갖고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종의 영을 가진 자가 어떻게 양자의 영을 가진 자의 신분과 삶과 사후의 영생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딴 나라 이야기일 뿐이지요. 선생 대 구세주 하나님, 종의 영 대 양자의 영, 종 대 자녀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단순히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낳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타인의 집에 단순히 방문하는 거와 그 집 사람을 양자로 삼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 15절).”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당신 자신과 관련된 결정적인 비밀을 하나 더 말씀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고, 그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 일은 니고데모가 방문한 당시에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가 알아야 할 중대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예수님에 관해 논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예수의 선한 삶보다 무한히 더 중요합니다. 선한 선생 예수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니고데모가 정말 알아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물론 니고데모가 예수께서 저렇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십자가를 생각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후에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과거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을 되새겼음이 분명합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39-40).”

“니고네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 유대교 교리에 머물렀던 니고데모로서는, 또한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그로서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난 후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나서 비로소 예수께서 구세주이신 것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22-36).” 여러분, 진리라는 게 세월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계시다는 것을 수천 년 간 속 시원히 알지 못했으면서도 믿고 인정하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거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우리가 천국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불신앙의 극치이고 이는 이단이 되어 영생을 영원히 상실하게 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예수의 이 말씀은 ‘지금은 이해되지 않아도 그냥 진리로 믿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이나 기독교 교리나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니고데모가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들을 보고, 그것이 분명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기적들이 예수님의 신성과 그분의 구세주되심을 증명해주는 것들임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지금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자기와 말씀하고 계신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꿈엔들 그것을 생각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를 위하여, 그리고 주위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 성령의 낳으심과 십자가와 영생과 자신의 신적 기원을 말씀해주십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지금 여러분께 해주시고 싶으신 말씀도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된 근거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에 있고,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우리가 구세주 예수님을 바로 알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생을 바라봅시다. 여러분, 영생을 놓치지 맙시다. 여러분의 영생은 바로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 p.s.
예수께서 구약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라는 말씀을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먹고 사는 것이 괴로워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자 하나님께서 뱀을 보내시어 사람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어가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니 하나님께서 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높이 세워놓으라 하셨고, 뱀에 물린 자들이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라 하셨고, 실제로 그것을 본 자들은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민21:4-9). 예수께서는 이 성경말씀을 통해 뱀이 높이 들렸던 것처럼 당신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세워지실 것이고, 누구든지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자들이 모세가 만들어 달아 놓은 뱀이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와 같이 해석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뱀이 마귀를 상징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합니다. 뱀은 죄와 악을 상징합니다.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와 악이 무엇인지 깨닫고 회개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높이 들린 뱀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자신들의 죄를 직시하고 인정하고 회개했음을 상징합니다. 죄가 있음에도 그 죄를 부인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간이나 아나니야나 삽비라가 모든 자들 앞에 죄인으로 공표되었을 때, 즉 뱀처럼 높이 들렸을 때 이스라엘과 교회의 치료가 있었습니다. 개인과 교회의 죄를 가리고 은폐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뱀이 들려 사람들이 다 본 다음에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어야 영생을 얻게 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치료받기 위해서는 먼저 뱀이 높이 달려 모든 기독교인들이 쳐다봐야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악한 삯꾼 목사가 거룩하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병든 한국 기독교는 치료될 수 없습니다. 범죄한 교황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뱀(적그리스도)으로 규정되어 높이 달려 천하의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졌을 때 병든 중세기독교가 치료받아 새로운 건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자가 치료받아 낫듯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가 용서받아 구원받습니다. <<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