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시33편) : 하나님의 백성의 복

stevision 2012. 11. 27. 11:45

 

(2007년 8월 11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하나님의 백성의 복                                           English
말씀: 시33편

  

 

>> 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 5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찌어다. ...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11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 18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에서 살게 하시는도다.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 <<

오늘 성경 말씀대로라면 저는 정직한(?) 사람 축에 드는가봅니다. 1절에서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저는 나름대로 하루에 세 곡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기타를 배운 게 저에게 참으로 큰 복이었습니다. 다윗이 현악기로 하나님 찬양을 드리며 기뻐했듯이 저도 기타를 치며 하나님을 찬양드리고 그분을 기뻐합니다. 매일 빠뜨리지 않고 찬양을 드릴라면 때로는 의무감에서 찬송을 부를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찬송이 아니던가요? 역설적으로 자기 기분이 좋아 유행가 대신 찬양을 드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기 기분이 좀 그래서 약간 억지로 찬양을 드려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믿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 받으십니다.

제가 매일 찬양을 드리기로 결심한 것은 뭔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 몸에 있는 모든 원자 하나 하나까지 다 아시고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원자 하나 하나를 다 기억하시거나 현재 생각지 않으시면 제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그렇게 다 아시고 항상 기억하시고 계시는데 저는 양심상 하루에 세 곡의 찬양을 불러 그 때만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하루에 세 곡씩 찬양을 드립니다. 제가 매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소나 돼지는 입 구조와 지능 정도가 도저히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인간들의 식량이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생명체들을 먹는 존재입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은 인간의 입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들을 인간에게 식량으로 주시며 대표로 인간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말을 할 수 있는 입과 지능을 인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소나 돼지는 먹이를 맛있게 먹고 자기 수명을 채우고 삽니다. 그것들은 마땅히 먹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나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그것들은 자신의 삶을 마감하며 인간에게 자기 몸을 먹이로 바치고 죽습니다. ‘인간들아, 당신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주기만 한다면, 우리가 죽을 때 당하는 고통을 이유로 당신들을 절대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그것들을 먹고 나서 그것들 대신 그것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드리는 것이지요. 인간이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대표로 감사드려야 할 의무가 있음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제가 깨닫고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억지로라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울러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입과 지능이 없고 원숭이에게 그 능력이 주어졌다면 인간이 원숭이의 밥이 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죽을 존재라면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다른 존재의 먹이가 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매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또 다른 이유는 그 분께서 얼마나 귀하고 높으신 분이신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높고 귀하신 분께서 제가 드리는 찬양을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 자체가 제게 무한한 영광이요 감격스런 일이 아닙니까? 내 찬양을 받으시겠다는 것은 내 존재를 인정해주시며 개인적으로 나를 알아주시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이나 대통령이 나를 개인적으로 알아준다면 그것도 보통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데 신(神)께서 나를 개인적으로 알아주시는 게 깨달아진다면 전율에 휩싸일 것입니다. 제가 매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신(人身)제사(祭祀)를 금하셨습니다. 인간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금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분께서는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 삼아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동물의 피를 먹지 말라 명하시면서도 자기 독생자의 피는 마시라 하십니다. 물론 이는 그분의 십자가 피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말씀이지요. 그분께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명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께서는 우리 살아있는 인간이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옛날에 로마 황제는 자신을 우상화하여 황제상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황제상에게 불경스런 짓을 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당신의 형상이라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도 그러셨지요. 하찮은 사람에게 한 일을 바로 당신 자신께 한 것으로 여기시겠다고. 죄인인 인간들을 이렇게 과분하게 사랑하시고 높여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가 그분께 감사드리고 찬양 드리지 않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큰 배은망덕이요 죄가 아닐까요? 오늘 시편 33편 기자는 “정직한 자”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우리의 온갖 핑계가 영광스러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사랑 많으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가리지 못합니다.

제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매일 세 곡씩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니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반응이 오더군요. 때로는 내가 알고 있는 찬송가 가사가 든 곡으로, 때로는 내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정말 처음 듣는 가사와 가락으로 하나님께서 제게 꿈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꿈속에 들었던 가사 내용은 정확한 기도응답이었고,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저와 관련된 예언이었습니다. 때로는 여럿이 부르는 찬양이던데, 그렇다면 내가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던 가운데 내가 처음 대하는 가사와 곡으로 내가 전혀 모르는 자들이 부르는 찬양곡이 됩니다. 이게 단순한 제 자신의 심리작용입니까? 이것은 100%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횡설수설합니까?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으니 그렇게 무식하고 악한 소리를 하는 거지요. 아브라함이 얼떨결에 자기 집을 지나던 자들을 정중히 모셨다가 알고 봤더니 그분께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하는 가운데 스치듯이 임하시며 분명한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실 때도 때로는 완전한 문장이기도 하지만 단어 한두 개만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직접 듣는 것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스치듯 말씀이 임하기도 합니다. 완전한 문장이 아니라 단어 한두 개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더라도 우리는 그걸 문제삼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완전한 문장의 말씀을 들을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어 한두 개로 대답하셔도 되실 위치에 계십니다. 단어 한두 개라도 어디입니까? 감사해야죠.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것은 때로는 하나님께서 제가 처음 듣는 내용의 완전한 문장의 영어나 독일어로 제게 말씀을 주십니다. 제가 독일어는 독해력(신학자 바르트의 글을 천천히 읽는 수준)만 조금 있을 뿐이고, 말하는 거나 듣는 것은 훈련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단어 세 개 들어간 완전한 독일어 문장으로 제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물론 그것은 제가 처음 대하는 문장이었고 그 내용은 정확하게 제게 필요했던 말씀이었습니다. 단순한 제 자신의 심리작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제게 영어나 독일어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절).” 이 말씀은 세상 여러 나라들 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골라 삼으셨음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복이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너(이스라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택하신 백성)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소유)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7:6).” 부처나 알라 잡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나라는 얼마나 불행한 나라입니까? 공산주의 사상으로 정신무장한 국가는 얼마나 불행한 나라입니까?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백성은 왜 복됩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다른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고 그분의 뜻만 영영히 서기 때문입니다(10, 11절). 다른 나라가 여호와의 백성을 치려 하면 하나님께서 막아주십니다. 다른 나라들의 군대와 말(馬)과 무기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의 뜻이 서지 않고(16,17절)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 절대적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도움과 방패이시고(20절) 사망에서 건지시고 기근에서도 구해주십니다(19절). 하나님과 천사, 하나님과 마귀의 차이기 무한하듯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과 그렇지 않은 백성이 받은 복의 차이도 무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5절).”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18절).”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22절).”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께서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십니다(5절).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예쁘다고 무조건 오냐오냐하시며 그들을 아무렇게나 막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다른 나라들의 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의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징계를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절대 아주 버리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징계 후에 위로하시고 인자하게 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눈동자같이 지켜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를 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택했다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분께서 우리를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택하여 그분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해도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징계 후에 용서하시고 자비와 선하심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실수가 있더라도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엡1:4-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십니다. 기뻐하시고 맘을 편히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실 의무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법적인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보다 큰 복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하게 대하시니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인자하시다면 우리는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인자하심을 앞세우시고 무시무시한 힘과 위엄은 감추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을 앞세우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자녀로서의 친근함은 경외하는 마음을 뒤따라가면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의인’들이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그분께 찬송을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1절). 여러분, 죄의 마음이 가득 한 채, 더러운 죄로 손이 더럽혀진 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면 안됩니다. 먼저 죄를 회개하여 씻고 나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서 그분께 찬양을 드리십시오. 세상에 쓸데없는 게 많으나 그 중에서도 위선적인 종교행위와 불의한 자의 기도와 찬양이 무익하면서도 해로운 것입니다. 불의한 자는 회개의 기도와 죄용서의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다 씻기고, 우리의 삶이 참되고 의로울 때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우리 자신도 가치있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우리의 존재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가운데 찬양을 드릴 때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찬양을 받으시고 여러분에게 풍성한 복을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도 우리의 하나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하심과 한량없는 은혜가 위로부터 내리어 여러분을 감싸길 원하나이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