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15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축복 받은 자와 저주 받은 자 English
말씀: 창9:20-27
>> 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사람은 누구나 다 남에게 존경받고 싶고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 가운데 계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라. 네 신을 벗어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어느 경계를 정하시고 그 경계를 넘어 오는 자들을 다 죽이라 명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본 자들이 살아남지 못할 거라 하셨습니다. 이렇듯 어느 대상에로의 접근과 그 대상을 직접 보는 것은 그 대상이 마땅히 누려야 할 위엄과 존엄을 해치는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한참이 지난 다음의 일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자식들을 보게 되었고, 노아는 농부가 되어 포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어떻게 술 빚는 법을 알았는지 노아는 포도로 술을 만들어 거나하게 취하길 좋아했습니다. 그 날도 그가 술에 취해 옷을 벗고 자고 있었는데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 하체를 보고 형 셈과 동생 야벳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참 주책도 없으시지. 술을 드시고 옷을 다 벗고 주무시네.” 이에 셈과 야벳은 옷을 가지고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를 덮어드렸습니다. 보기에도 좀 민망하고 추우실 것 같아 덮어드린 것이지요.
그런데 함의 아들은 구스(에디오피아)와 미스라임(이집트)과 붓과 가나안 넷이 있었습니다(창10:6). 노아는 술이 깨었고 그간의 일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노아는 둘째 아들 함의 막내 가나안에게 저주를 발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 그런데 가나안의 자손들은 15절에서 20절 사이에 나오는데, 대충 보면, 시돈, 헷,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알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이라 칭해지는 족속들이 있습니다. 또 가나안 자손이 있던 땅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아 스보임을 지나 라시까지였습니다. 그러면 이 가나안의 자손들은 어떻게 저주를 받았습니까?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는 하늘의 저주를 받아 하늘에서 불이 내려 완전히 멸망당해 폐허가 되었습니다. 또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이스라엘인들에게 정복당해 멸절됩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정복민의 노예가 되었겠지요. 이들의 삶을 대충 살펴보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동성애를 즐겼던 자들이었고, 이스라엘인들에게 쫓겨났던 가나안 토박이들은 짐승과 교접하고 근친상간을 즐겨했던 자들이었고, 자식들을 우상들에게 불살라 바쳤던 자들입니다. 이들의 조상 가나안이 할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더니 그들의 삶이 부패할 대로 부패했고, 결국은 일부는 멸절당하고 일부는 노예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함의 다른 자식들은 가나안처럼 저주를 받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미스라임(이집트, 애굽)은 강대국을 이루었고, 이는 구스(에디오피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로써 할아버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은 가나안과 그렇지 않은 다른 형제들 사이가 극명히 구분되고 있습니다. 노아의 저주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노아는 둘째 아들 함의 자손에게 저주를 발했나요? 함이 우연히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그냥 자신만 알고 아버지께도 말하지 않고 형제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면 죄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의 하체를 숨어서 보고 “나 너 벌거벗은 것 봤다”라고 말하면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타인이 나의 벌거벗은 모습을 일부러 보는 것은 나 자신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이 되고, 우연히라도 내 하체를 보고 나에게 그것을 봤다고 상대방이 말하면 내 자신이 불쾌감과 굴욕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타인에게 “나 누구의 하체를 봤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 됩니다. 함이 죄인이 된 것은 그가 아버지의 하체를 봤다고 형제들에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자들이 노아의 자식 함이 아버지 하체를 보았다고 생각할 때 이로써 자식 함에 대한 노아의 권위도 손상되었고, 다른 자들에 대한 노아의 권위도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식 함이 아버지 노아의 명예와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시켜놓고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노아가 자신의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함의 자식 중 하나인 가나안에게 형벌을 선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타인의 권위와 존엄을 훼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권위를 고의로 훼손하면 함처럼 저주를 받게 됩니다. 요즘 인터넷 시대라서 음란물이 많이 떠돌아다닙니다. 남의 나체사진 보기 좋아하다가 함이 받은 저주를 받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정신나간 여자가 돈을 벌기 위해 자기 나체사진을 찍어 팔았더라도 우리가 그 여자의 나체사진을 보며 즐기는 것은 그 여자의 부모님에게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주는 것이므로 죄가 아니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셈과 야벳은 아버지 노아로부터 축복을 선언받았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6-27절).” 셈의 족보는 아브라함, 이스라엘 족속, 예수님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셈의 자손으로 등장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고, 만민이 그를 통해 복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야벳도 창대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셈과 야벳의 자손들에게 이런 과분한 복을 내리셨을까요? 남의 죄를 덮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자들이 노아 나체사건을 통해 죄를 덮어주는 자가 셈과 야벳처럼 복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심각한 착각입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존엄을 지켜드렸기 때문에 그렇게 큰 복을 받은 것이지 남의 죄를 가려주어 그런 복을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노아가 술 먹고 옷 벗은 채 잔 것이 뭐가 죄가 됩니까? 노아의 나체 자체가 뭐가 죄가 됩니까? 이 노아의 포도주 사건에서 죄는 덮어진 것이 아니라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에서 유일한 죄는 바로 함의 행동이었고, 그의 행위는 철저히 모든 자들이 다 알게 되었고, 철저히 응징되었습니다! 여러분, 아간의 죄가 덮어졌습니까? 남들은 다 모를 때 하나님께서 제비뽑게 하시어 그를 지목하셨고 그의 죄가 이스라엘에게 다 알려졌고, 그는 철저히 응징되었습니다. 남의 죄를 덮어줘서 어쩌자는 겁니까? 특히 지금도 계속 그 더러운 죄를 짓고 있는 자의 죄를 덮어줘서 어쩌자는 겁니까? 아간 한 사람이 죄를 범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떠나셨고, 그리하여 그들은 작은 아이성 하나를 정복하지 못하고 패하게 됩니다. 죄와 하나님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죄가 발각되어 제거될 때 하나님의 도움과 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죄는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부패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은 죄는 다 밝혀내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면 그 자는 이미 죄인이 아니므로 그런 자의 과거 허물은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지요.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사랑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죄인이 죄를 회개하여 용서를 구하면 사랑으로 용서해주고 그 죄가 없었던 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절대로 버젓이 살아 움직이는 죄를 검은 천으로 덮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냥 죽게 놔두는 미움입니다. 사랑은 절대 죄의 보호막이 아닙니다. 제가 이 시대의 대한민국의 기독교에게 정말로 해주고 싶은 말은 제발 교회 안의 죄를 그냥 놔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부패하게 만들고 기독교를 허물어버리게 만듭니다.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개하지 않은 죄를 묻어 두는 경우는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분들의 존엄을 잘 지켜드리는 자가 효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효자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는 바로 ‘셈의 하나님’입니다. 셈은 노아의 장남입니다. 분명 셈은 장남으로서 동생 야벳에게 “우리가 아버님 하체를 보는 것은 옳지 않으니 뒷걸음쳐 가야 한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효심도 깊고 동생도 잘 지도하는 셈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셈의 동생들은 셈을 통하여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셈을 통하여 예배를 받으시고 그에게 많은 복을 주십니다. 셈의 형제들은 셈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이차적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27절).” 셈의 동생 야벳은 셈의 터전, 셈의 집에서 셈 덕분에 하나님의 복을 함께 누립니다. 셈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하늘의 능력과 땅의 능력을 소유하여 많은 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복을 나눠주는 자가 됩니다. 셈은 복의 근원 아브라함의 조상입니다.
여러분, 셈과 같은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부모님을 마음으로 공경하십시오. 누가 부모님을 공경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부모님도 공경합니다. 타인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은 그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셈은 타인의 명예를 존중해주는 자입니다. 그는 힘들게 뒷걸음질치며 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드렸습니다. 이렇게 평소에 행동에 신중을 기하여 타인의 명예를 지켜주고 그를 존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자의 명예를 지켜주십니다. 셈은 형제들 중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타인의 명예를 실추시킨 함은 꼬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 특히나 남 얘기하기 좋아합니다. 건전한 이야기 같으면 누가 뭐랍니까? 아줌마들 모였다하면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아줌마 흉보기를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맞아’부대가 있습니다. 누가 남을 흉보기 시작하면 ‘맞아요, 맞아요’하며 여럿이 맞장구치며 좋아합니다. 남의 약점이나 흉을 동네방네 광고하며 다니는 자는 나중에 혹시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받은 벌을 받지는 않을까 조심해야 합니다. 남이 없을 때 흉보는 것은 비열한 짓이고 남이 없을 때 칭찬하는 것은 고상한 행위입니다. 기독교인이 고상한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앗시리아)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시리아)입니다(창10:22). 그런데 아브라함의 조상이 아르박삿이었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함의 자손 미스라임(이집트, 애굽)에 430년 간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셈의 다른 자식들의 자손들은 물론 자기네들 자리에서 창대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정녕 셈의 자손들 중에서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자들은 함의 자손인 이집트에서 고된 종살이를 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이고 하나님의 복이 간단치 않은 복임을 말해줍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서글픈 나그네 생활을 하였고, 야곱의 자손들은 이집트에서 430년 간 종살이를 한 다음에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의 자손들이 있던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이스라엘 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 후에도 이스라엘은 남으로는 이집트, 북으로는 아람과 앗시리아 사이에 끼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결국은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망했고 남유다는 앗시리아의 뒤를 이어 나온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뒤에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비록 그런 고생은 있었지만 셈의 자손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세계 구원 역사의 중심에 있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대충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노아의 자손들 중에 유독 셈의 자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나그네와 노예 생활을 한 후에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이루고 인류 구원사의 중심에 서게 되고, 유독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은 저주받아 우상숭배와 극악한 성적 타락 가운데 살다가 멸절당하였고, 그 나머지 노아의 자손들은 큰 나라 작은 나라 이루며 보통 인간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식을 불살라 우상에게 바치는 광신적 우상숭배와 동성애, 수간(獸姦), 근친상간, 간음을 자행했던 자들이 바로 가나안인들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들은 저런 삶을 산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고, 때로는 노예처럼 고된 삶을 사는 과정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귀한 복을 영원히 누리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남을 존중히 여기시어 셈의 복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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