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눅19:1-10) : 예수님을 영접함

stevision 2012. 11. 28. 09:42

 

(2007년 9월 12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예수님을 영접함                                           English
말씀: 눅19:1-10

  

 

>>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승복을 입은 머리 빡빡 깎은 뚱뚱한 비구니가 웃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또 제일 싫어하는 게 여자처럼 화장하고 여자 모양을 갖춘 호모가 굵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역겹고 기분 나쁜 게 바로 그런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제가 지도하던 어떤 초등학교 학생이 교회에 안나오길래 집에 전화를 했더니 그 집 부모가 불교에 푹 빠져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제가 아주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로 아이 좀 교회에 내보내달라고 설득을 하니 그 집 사람이 저를 아주 재수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저를 기피하며 전화를 빨리 끊으려 하더군요. 제가 불교인들에게 느끼는 그런 혐오감을 불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제게 느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마 불교인들은 머리 빡빡 깎은 비구니의 모습이 한없이 은혜롭게 느끼지겠지요.

이래봬도 제가 저희 집안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집안에서 제가 제일 먼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언젠가 아버님 제삿날이 다가올 때 제가 가족들에게 선언했습니다. “나 아버지 제사 때 절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제 큰형님이 “이 XX 팍 때려 죽여버릴 거다!”라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막둥이 하나쯤은 집안에서 포기해도 큰일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셨던지 제 어머니께서 큰형님에게 “그냥 냅둬라. 저것 그냥 제멋대로 살게”라고 하셔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적인 분위기가 못되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저를 홍 ㅇ ㅍ 교회 여선생님께서 전도하셨습니다. (홍 선생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홍 선생님의 환한 미소가 너무 좋아 제가 홍 선생님께서 전하시는 예수님을 그냥 무조건 믿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제 옆동네 중학교 친구는 집안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그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그 집 라디오에서는 복음 방송이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제가 신앙이 그렇게 다져지지도 않을 때였습니다. 그 날도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그 집의 라디오에서 “주 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가사의 찬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찬송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포근하며 평안했던지 아십니까? 그런데 얼마 전 뉴스에 보니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던 테레사 수녀가 겉모습과는 다르게 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어둠 가운데 종교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녀의 고뇌에 찬 표정의 사진이 그녀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내 안에 있는 겨자씨와도 같은 살아있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고! 반대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직자의 거창한 성직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여러분, 예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영생의 장본인이시고 영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을 마음으로 좋아하는 자는 바른 길을 가고, 진리를 깨닫고, 생명의 능력을 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고, 온갖 귀한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싫어하는 자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무시하는 자에게 영생이라는 귀한 선물을 줄 수 있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마음으로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마음으로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가 가장 예수님을 좋아했습니까?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어른입니다. 어른이 아이들처럼 나무에 올라가 유명한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은 상당히 체면이 깎이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정작 예수님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이 얼마나 민망한 일입니까? 다 큰 어른이 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면 아마 쥐구멍이라도 찾아 몸을 숨기고 싶겠지요.

어차피 예수님의 일정상 여러 집을 들르실 겨를이 없으실 때 누구의 집에 가셔야 옳습니까? 당연히 여러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의 집에 들어가셔서 축복해주셔야겠지요. 여러분,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가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또한 절대로 예수님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을 믿으십시오. 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여러분께서 모르는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절대 그분의 인격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100% 당신의 인격을 믿어주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7절을 보면 항상 예수님에 대해 삐딱한 시각을 갖고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갔도다 하더라.” 이런 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자기는 삭개오처럼 죄인이 아니고, 또 죄인과 어울리는 예수께서 그렇고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겠지요. 개중에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과연 예수께서 자기보다 뛰어난 종교지도자인지 알아보려 구경왔다가 그분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그러면 그렇지’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보다 선한 사람이 나타나면 괜히 불안에 떠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께서는 타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선함을 재확인하려는 자들에게 관심이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께 참된 종교가 뭔지 한 수 가르치려 무던히도 애를 쓸게 분명합니다. 바쁘신 예수께서 무엇 하러 그렇게 피곤하게 구는 자의 집에 가시겠습니까? 그저 삭개오처럼 겸손하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곳에 가셔서 위엄있는 모습으로 그의 죄를 용서하시며 복을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여러분,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도 예수님을 피곤하게 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여러분의 머리가 되실 때 그분께서 평안해 하시며, 여러분께서 예수님의 머리가 되려 할 때 예수께서 굉장히 피곤해 하십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며 존경하는 자가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영접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거늘(6절).”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 여러분의 가정 안에, 여러분의 교회 안에 들어오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람이 마귀를 인격적으로 영접하면 마귀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 예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 선한 일을 하게 됩니다. 삭개오가 귀하시고 선하신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대접해드리며 기분이 좋아서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사기쳐 뺏은)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8절).” 여러분, 이 순간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반대로 그 때까지도 예수님의 인격을 의심하고 있었던 위선적 종교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속이 뜨끔했을까요?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하니 위선적 종교인들보다 100 배나 더 쓸모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은 이렇게 저렇게 벌어 놓은 돈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놓았습니다. 삭개오는 혹시 재물 문제로 자기에게 원한이 있는 자가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다짐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삭개오를 변화시킨 그 변혁의 힘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귀하시고 선하신 예수께서 다른 종교인들과는 달리 자기를 죄인으로 낙인찍지 않으시고 자기 집을 방문하시어 식사를 하심으로 자기를 인간취급 해 주신 게 너무 감사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인간이 인간취급 받을 때 살맛이 나는 겁니다. 누군가 나를 인정해 줄 때 나는 자긍심을 갖게 되고 용기를 내어 살게 됩니다. 특히 귀하시고 선하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인정해 주실 때 자기도 귀하고 선하게 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주님이 되어주셨습니다. 이제 삭개오처럼 여러분도 그분의 선하심을 본받아 자기 힘이 닿는 대로 선한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형제의 선한 인간됨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아내가 떡볶기를 만들어 접시에 담아 여러분에게 주며 젓가락을 놓지 않았더라도 그냥 좋게 생각하며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가락으로 드시거나 그냥 스스로 젓가락을 가져다 드십시오. 떡볶기라도 갖다 바치는 게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남이 여러분을 섬기는 기준을 여러분이 정하면 세상 참 피곤해집니다. 여러분도 피곤하고 당사자도 피곤하고. 억지로 언성 높이며 섬김을 받으려다 인간관계 다 파탄나버립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로부터 억지로 섬김을 받으려다 집안이 망하는 꼴을 당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초대하여 대접했는데 관례대로 예수님의 발씻을 물을 드리거나 머리에 감람유를 부어드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집 관례가 그런가보다’하시고 문제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 취급받던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니 시몬이 이를 보고 예수를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는 시몬의 행위와 그 여인의 행위를 비교하시며 시몬이 그 여인을 나쁘게 생각하거나 예수님을 이상한 선지자로 여기는 것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 그 여인의 일만 없었다면 예수께서 시몬이 대접해 드린 것에 고맙게 여기시고 관례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격이 원래 미성숙한 자에게 더 많은 것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버릇없는 손자를 보면서도 무한히 기뻐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예수께서 인격이 약간 모자란 자를 보시며 사랑하여 주시고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인격은 남이 보기에도 참으로 좋고,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바른 인격을 형성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특히 나이값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가 되니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죄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듯, 좀 버릇없는 사람도 철이 들어 예의를 갖춘 자가 되면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습니다. 무식한 게 죄가 아니듯, 고의성이 없는 버릇없음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좀 예의에 무식해도 넓은 아량으로 사랑스런 눈으로 보면 그 자도 선하고 아름다운 자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삭개오처럼 예수께서 임하여 계시는 자는 삶이 변하고 인격이 변합니다. 요컨대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됩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예수께서는 삭개오의 대접을 받으시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 싹 닦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절).” 오직 변화된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권사, 장로, 목사라도 삭개오처럼 변화되지 못하면 구원에서 멀어진 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예배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임할 때마다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기를 기뻐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를, 예배의 장소에 모시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했듯이 우리도 예배 때 선포되는 말씀에 우리의 삶을 맞춰야 합니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설교라도 그 차원에서만 듣지 말고 그 설교 말씀 중에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뭔가 꼭 새겨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러할 때 우리도 삭개오가 받은 복을 받습니다. 신령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은 자가 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갑절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사랑과 헌신을 기뻐 받으시고 여러분에게 한량없는 복을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