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15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기독교인의 질병 English
말씀: 시38편
>> 1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2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 9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였나이다. .... 13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 16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 18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 22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
바룩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서기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바른 말 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는 등따습고 배부르게 사는 경우가 흔치 같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지요.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안팎으로 시련을 많이 당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영광을 누렸으면 그 진리 때문에 임하는 고난도 받아야 하겠지요. 예레미야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예언을 자주 해서 왕의 눈밖에 나 있었고, 그가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재야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를 보좌했던 바룩의 고충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대놓고 예레미야에게 말은 안했지만 하나님의 종의 서기로 산다는 것이 너무 괴로워 남몰래 속으로 많은 한숨과 눈물을 흘렸나봅니다.
바룩의 마음을 잘 아시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바룩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일찍 말하기를, 슬프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치 못하다 하도다. ...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내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겠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렘45:3-5).” 이게 무슨 말씀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려 하는 중에 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그런 와중에 바룩이 모진 세파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다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정직하게 섬겼는데 왜 이리 삶이 고단합니까”라고 기도드렸었나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룩아, 지금 너 하나 편의 봐주기 위해 내가 계획했던 것을 취소하란 말이냐?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내리는 동안에 너도 덩달아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참거라. 대신 네 목숨을 내가 끝까지 보호해주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겸손한 자입니까? 하나님께 특별대우 받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가 진정 겸손한 자입니다. 쓰나미가 몰려와 자식을 잃었더라도,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져 자식을 잃었더라도, 홍수가 나서 자식을 잃었더라도, 화재가 발생하여 자식을 잃었더라도, 전쟁이 나 여러 자식들이 죽었더라도, 역병이 발생하여 많은 자식들이 죽었더라도, 교통사고가 나서 자식들이 죽었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셔서 이런 불행을 당하게 하셨음이 분명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진정 겸손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밉지 않으셔도 언제나 생명을 취하시어 천국으로 데려가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900세까지 수명이 긴 자들이 있던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의인 에녹을 365세에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인의 평균수명이 같도록 섭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다같이 햇빛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 모두 다 같은 비율로 암에 걸리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자들이 당하는 불행을 똑같이 당하고도 범사에 감사드릴 때 우리의 믿음은 정품 믿음으로 확증되고 우리가 받을 천국의 상이 더 커집니다. 특별대우만 받고자 하는 자가 도대체 뭔 믿음이 있는 자란 말입니까? 특별대우는 천국에서나 받을 각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삶이 고단함을 느끼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의심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 바룩 뿐이겠습니까? 여러분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시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사정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무심하시지’라는 넋두리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알게 모르게 특별대우를 해주십니다. 그러함에도 어떤 때에는 특별대우를 해주실 수 없는 경우도 있으니 그러한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범죄하고 벌을 받아 중병이 든 가운데 하나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처럼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도 죄를 범하니 힘에 겨울정도의 준엄한 형벌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3절).” 그런데 저는 부모가 하나님께 범죄하니 자식들에게 큰 화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한 마을에 세 집이 한 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그들이 나가는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나 목사님을 쫓아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모두 다 그 사건을 잊을 즈음에 한 집의 장남은 변심한 애인을 찾아가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자살을 했고, 다른 집의 장남의 두 아들은 물에 빠져죽고, 다른 집의 아들은 정신병이 들어 농약 먹고 자살하더군요. 다윗도 봅시다. 그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인 다음에 네 명의 자식들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왜 부모가 죄를 범하고 자식들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사람들이 자식들이 잘 된다면 무슨 죄를 범해도 정상이 참작될 것이라 생각하고 범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해서 자식 뒷바라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얘야, 어림도 없다” 하십니다. 또 사람들은 자식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경우라면 대담하게 죄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식에게 불행이 닥치게 되는 경우에는 사람들은 죄짓기를 주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들의 범죄행각을 줄이시려 죄를 범한 자들의 자식들에게 화가 임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생각하고 경솔히 무책임하게 죄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또 사실 남의 가족을 해쳤으니 자기 가족도 화를 당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범죄자의 자식에게 화가 임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일면입니다. 또 범죄자가 죄를 범하며 벌어온 돈으로 자식들이 잘 먹고 잘 컸다면 그 자식들도 형벌을 감당하는 게 순리입니다. 만에 하나 범죄자의 자식들 중에 정말로 의로운 자가 있어 아버지 때문에 화를 당한 자가 있다면, 이 일이 그 범죄자에게는 형벌이 되겠지만 그의 의로운 자녀는 형벌의 차원으로 화를 당한 게 아니라 단순한 사고일 뿐입니다. 그가 당한 고난은 의인이 악인들 때문에 당하는 고난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의인들이 악인들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까? 그러나 의인의 고난은 천국에서 보상이 있는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은 남의 집 사람들도 괴롭히고 자기 가족도 괴롭히는 자입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 어떤 죄도 범하면 안됩니다. 특히 나이 들어 자식같은 여성의 성을 돈으로 사 재미를 보는 자들은 남의 자식 망쳐놓은 죄가 크니 자기 자식들의 장래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벌은 당연히 범죄자 자신에게도 임합니다. 그 대표적 형벌이 바로 중병입니다. 병의 원인이 자신이나 부모의 죄가 아닌 경우 그러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한없는 위로가 마음에 가득 차겠지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의 경우 부모의 죄 때문에 병에 걸려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겠지요. 그러나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느껴지는 병, 즉 자신의 범죄 때문에 임하는 병의 경우 하나님의 위로 대신 그분의 진노와 분노가 느껴지겠지요.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소서. 주의 살(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1-3절).” 그런데 사실 우리의 범죄 때문에 임하는 병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강도질, 목사님 쫓아내기와 같은 짓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중병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 우리 기독교인의 죄는 경미한 것들이고 그러한 것들은 회개 기도로 간단히 용서받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임하는 크고 작은 병은 대부분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병에 걸리면 마귀가 우리에게 ‘내가 죄를 지어 하나님께서 노하시어 이 병에 걸렸지’라는 생각을 넣어줍니다. 그래서 더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다윗이 느끼는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다윗 자신의 생각이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외부로부터의 강압적인 위압감입니다.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병을 주셨다면 반드시 그 죄가 뭔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병을 통하여 죄를 회개케 하시려는 목적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죄가 뭔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4절).”
영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강하게 느껴지고, 성령께서 자신의 죄가 뭔지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시면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하고 자신의 과거 행위를 슬퍼해야 합니다.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18절).”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니이다(6절).” 그런데 세상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악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걸려 넘어지고서도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 모릅니다. 어둠속을 걷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범죄에 대한 형벌로 고통을 주시고 그 고통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하시어 성숙한 천국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악인들은 형벌을 당하며 멸망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형벌의 과정이 바로 고침받는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형벌을 통해 영적 암덩어리가 제거되어 건강한 영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자들은 징계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9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네게 응락하시리이다(15절).” 우리는 어떤 고난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이미 모든 고난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보고 소망을 잃지 않음으로 용서를 받고 건강이 회복되어 장수를 누렸습니다.
기독교인의 질병과 관련하여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경우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계시를 받고 능력을 받았으나 그 자신에게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병이 있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바울이 세 번 그 병이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으나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하기 위해 더 이상 그 병이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질병으로 인한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과 비슷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심으로 만민의 구주로 칭송받으셨듯이, 바울도 죄를 범한 성도들이 당해야 할 고난을 일부 자신이 대신 당함으로 성도들의 목자로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병고치는 능력을 행함으로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습니까? 그런 존경을 받으니 성도들의 죄를 자신이 조금이라도 감당하여 성도들에 대한 목자로서의 사랑을 보여줘도 과히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여 마귀 세력을 결박하고 병을 주는 마귀들을 쫓아내 많은 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울에게 사단이 병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에게 성도들의 참된 목자의 자격을 부여하시기 위해 그리하신 것이지요. 자신은 사단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성도들을 사단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사단에게 고난을 받고 있는 의인 바울을 통해 사단의 세력을 결박하실 수 있으시고, 이 때 사단은 ‘바울이 뭔데 우리를 몰아내는 일을 합니까’라고 항의할 수 없게 됩니다. 사단이 바울에게 병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큰 능력을 행한 바울이 사단이 주는 병을 갖고 있었다는 게 이해가 됩니다. 또한 자신의 병까지도 맘대로 고치게 되면 사람이 교만해질 수도 있으나, 자신의 병은 못고치면서 타인의 병을 고치게 되면 병고치는 능력이 자기 자신 안에 있지 않는 것이 저절로 증명이 되므로 자신은 겸손해지고 자신의 병고치는 능력은 예수님의 능력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 (억지로라도) 그렇게 겸손해진 자를 통해 예수께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바울의 병은 의로운 자의 고난에 속한 것입니다. 과거 구약시대 사울왕은 악한 귀신에 들려 정신이상자 노릇을 했으나 바울의 경우는 사단이 ‘육체의 가시’만 줄 뿐 그의 정신과 영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같이 의로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강한 성령의 임재가 있게 됩니다. 때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악한 영이 임하여 육체의 가시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경우와 같이 우리의 겸손과 완전한 영적 능력발휘를 위한 허용된 사단의 침입일 수도 있으니, 그런 경우 무서워 떨 게 아니라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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