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28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 English
말씀: 막4:35-41
>>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
여러분께서 차를 운전하여 가고 있는데 아들이 뒷자리에 타서 여러분이 운전을 잘 못하여 사고 나 죽을까봐 벌벌 떨고 있으면 여러분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불신의 대상이 되면 기분이 나쁘지요.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 앞에 맥을 못 추고 벌벌 떱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그 두려움의 대상을 신으로 섬깁니다. 태양이나 바다나 높은 산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때론 사람들은 그러한 자연들을 직접 섬기기보다는 그 자연들의 배후에 있어 그것을 조종한다고 생각되는 존재들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래서 바다에 있다는 용왕을 섬기는 자가 있었고 산에 있다는 산신령을 섬기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산이나 바다나 해가 인격을 지닌 신(神)들이 절대 아니고 용왕이나 산신령은 있지도 않을뿐더러 해와 달과 산과 바람과 강은 어떤 잡신(雜神)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런 자연들을 비롯한 두려움의 대상들을 마음에 품고 있는 이상 비이성적인 논리에 사로잡혀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죄악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도둑질이 죄라는 것을 뼛속 깊이 진리로 인식하는 자는 절대 도둑질을 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신이 아니라는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우상숭배의 죄에 빠집니다. 자칭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동성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면 죄이고, 불효를 저지르는 것은 죄이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행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저주받은 삶을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 그 동성애라는 것이 더러운 정신병이라는 게 진리인데도 그것을 극구 부인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버젓이 그 정신병자들의 모임들이 결성되고 있는데, 법을 제정해서라도 그 정신병자들이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를 개설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계에서 이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여러분, 진리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바로 진리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분의 삶이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고 예수께서 진리이시니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잠재의식에 자리잡고 있던 뿌리깊은 두려움을 송두리째 뽑아버리시고 그들에게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날 저녁의 사건을 통해 놀라운 진리를 제자들이 알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진리를 발견한 후 그들은 불합리한 공포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진리는 바로 자연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많은 무리를 가르치시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호수) 건너편 뭍으로 가시려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힘들게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께서 곤하시어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광풍이 불어닥치고 바다가 성난 파도를 일으켜 배가 침몰 직전에 있었습니다. 제자들 일부는 바가지로 열심히 물을 퍼내고 일부는 하나님을 향하여 통성기도를 했겠지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런 난리법석 가운데에서도 예수께서는 곤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 하나가 태연하게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아니, 선생님께서는 이 마당에 잠이나 주무시고 계시나?’ 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어서 깨십시오. 지금 우리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했겠지요. “선생님께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그분께서 다 들어주시니 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시지요. 어서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기도는 드리지 않으시면서 대뜸 바람과 바다를 향하여 명령하십니다. “바람아 잠잠하라. 바다야 고요하라!” 성경에 보니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네 이 버릇없는 것 감히 ... ”라는 말씀도 하셨겠지요. 그러자 그 즉시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여 잠잠해지고 고요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사실 깊은 바다 위에서 광풍을 만나 배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신 후 두려워 떨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바람과 바다가 미친 듯이 날뛰고 예수께서 주무시고 계실 때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께 도움을 청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잠에서 깨어나셨고 그분의 말씀 한 마디로 바람과 바다는 잠자듯이 조용해졌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 없는 자의 대표적 특징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런 얕은 믿음을 버리라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여러분에게 모든 두려움을 다 벗어 던지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예수님의 전지전능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명하여 복종케 하실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뿐입니다. “그(예수님)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그(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광풍이 기세 등등할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기는 했으나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혹시 어떤 일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이 마음을 떠나지 않을 때 “평안하라” 혹은 “두려워 말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그 음성을 실제로 몇 번 들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나서는 저는 그 일에 대한 두려움을 싹 떨쳐버리고 100% 하나님을 신뢰하고 평안을 제 것으로 삼았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
평강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때 임합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인간들의 마음을 좀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자연도 예수님의 뜻 안에서 움직임을 믿고 벼락, 홍수, 가뭄, 태풍, 지진과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살면 안 됩니다. 교통사고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면 안됩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악한 영들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면 안됩니다. 이 바다의 광풍 사건 바로 다음에 예수께서는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서 살던 자에게 가셔서 그를 악한 영들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막5:1-20). 귀신들이 떼거리로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어서 그 귀신들 이름이 ‘군대’였습니다. 이 귀신들이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꼼짝 못하고 그 자에게서 나왔습니다. 자연의 힘과 악한 영들의 힘은 우리 인간들의 대항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발견한 진리는 예수께서 자연의 힘도 악한 영들의 힘도 다 누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해서는 안될 자연이나 잡귀신들을 두려워해서 우상숭배에 빠지거나 참 평화를 모른 채 불안과 죄악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인간은 다른 것들은 두려워하면 안되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란 거룩하고 경건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모든 영들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로 무(無)에서 천지라는 유(有)가 나왔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바다가 갈라져 길이 나고, 천사가 파송되어 사람을 돕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땅이 갈라져 죄인들을 산 채로 집어삼키고, 악한 영이 악인을 덮쳐 괴롭힙니다. 문제는 자연이나 영들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이나 영들을 두려워하여 섬기는 자들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제 차차 그러한 참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저희가 심히 두려워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4:41).” 이제 제자들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자연에게 명령을 발하여 굴복시키시는 자신들의 선생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로마 황제가 제아무리 자신을 신격화하여 황제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를 신처럼 경배하라 한다고 창과 칼의 위협 때문에 그 명령에 복종하는 자들이 황제에 대한 경외감을 가질까요? 아마 속으로는 많이 비웃으며 황제상에다 절을 할 겁니다. 솔깃한 궤변이나 창칼의 위협으로 신이 아닌 자가 신처럼 대접받고 싶어할 때 ‘인간의 절대부패’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 권세를 제자들에게 직접 보이심으로 저절로 제자들의 마음에 경외감이 생기게 하셨습니다. 황제도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역사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오직 그분 홀로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일과 그분의 부활까지 목격한 어느 제자는 그분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 못지 않게 인간인 타인을 신격화하는 것도 인간의 절대부패의 범주에 속하지만, 도마가 예수님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위대한 진리의 발견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모든 최후 심판권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경외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내가... 사망과 음부(지옥)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8).” 예수께서 악인들과 악령들을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실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또 자연 자체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질 존재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그러므로 사람과 자연과 잡귀신들을 두려워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고 예수님을 경외하는 자는 진정 지혜로운 자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평화는 오직 이 예수님만을 경외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큰 권세를 가지신 분을 우리가 경외해야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경외할 때 그분의 평화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만을 제자로 여기시고 그의 삶을 책임져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평화는 광풍이 몰아치고 성난 파도가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편히 주무실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온 우주에 그분을 위협할 존재가 없기 때문에 그분께는 절대평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확고한 믿음(신뢰)을 가질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어 모든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께서 당신께 있는 평화를 제자들에게 주시겠다 하십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무한히 능가하는 평화가 바로 예수님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경외하고 그분에 대한 100%의 신뢰를 가질 때 세상에 대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예수의 평화가 내 평화가 됩니다.
바람과 물결을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신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에 이는 풍랑을 향하여도 고요하고 잠잠하라 명하십니다. 바람이 순종하고 바다가 순종하여 그것들 자체도 평화로워졌습니다. 여러분의 심령도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평안해집니다. 불안은 불순종입니다. 믿음에 비례하여 평화가 커집니다. 평안을 주시겠다는 그분의 말씀은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겠다는 약속과도 같습니다. 보통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아무 걱정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할 때 자식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다 채워주겠다는 약속도 함께 한 것이지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셨지요? 여러분 오늘의 풍랑과 내일의 염려, 그런 무거운 짐 다 주께 맡깁시다. 무엇보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얻은 우리의 영생을 보고 평화를 누립시다.
예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그분의 절대평화가 임하길 기원합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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