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창18:1-15) : 하나님의 심방

stevision 2012. 11. 29. 11:25

 

(2007. 12. 1. 동아 시사 발언대)

 

제목: 하나님의 심방                                  English
말씀: 창18:1-15

  

 

>>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 <<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특히 하나님의 종(목사님)을 당신의 형상으로 사용하시어 당신의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꿈에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인자한 모습과 음성으로 여러분에게 유익한 말씀을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의 모습을 잠시 사용하셔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꿈에 목사님께서 여러분의 집에 방문하셨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집에 심방하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집은 그 집에 사는 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꿈에 어느 사람의 집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면 하나님의 불심판이 그 집에 임할 것을 상징합니다. 꿈에 어느 사람의 집이 다 쓰러진 폐허가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폐허가 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불이 꼭 불심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위기상황도 불이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깨어 기도하고 행실을 삼가 조심하여야 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런 경우도 있겠지요. 꿈에 대학 교수님들이 여러분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대접받았다면 학자의 영이 여러분에게 임했음을 상징하고, 여러분이 심오한 진리를 깨달을 것이라는 징조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여러분의 꿈에 신학대학 교수님들 여럿이 여러분의 집에 오셔서 진수성찬을 대접받으셨다면 여러분이 신학자의 영을 받아 심오한 신학적 통찰을 얻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의 종이 성도의 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고 복을 빌어주는 것을 보통 심방이라고 하지요. 성경을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친히 심방을 하신 곳이 있는데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이 전해주는 아브라함의 집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집에 심방 오셔서 진수성찬을 대접받으셨습니다. 그러니 뭔가 핵폭탄급의 복이 아브라함의 집에 임할 거라는 느낌이 안 옵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아브라함의 집에 심방 오셔서 아브라함이 제공하는 푸짐한 밥상을 맛있게 다 드셨으니, 마땅히(?) 핵폭탄급의 선물보따리를 풀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이 대접하는 진수성찬은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정성스레 준비한 진수성찬이 오갑니다. 음식점에 가서 돈주고 사먹는 밥상과 타인의 집에 방문하거나 초대되어 가서 그 집에서 정성껏 준비해 내놓는 밥상은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릅니다. 남의 집에서 먹는 식사는 집주인과 방문자 사이에 사랑과 존경이 없으면 절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 함께 근무했던 여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남편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인품도 훌륭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여전도사님께서 자기 집에 식사 초대를 하시는 거였습니다. 가보니 쇠족을 잘 과서 진한 국물을 만들어 대접하시더군요. 그 정성에 제가 감탄했습니다. 얼마나 흡족하고 평안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 집에서 식사를 했나 모릅니다. “하나님, 그 집안에 아브라함의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멘!”

여러분,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아브라함처럼 남을 존경하며 후히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방문하시는 집, 성령께서 계셔서 함께 거하시며 지키시고 복을 내려주시는 집은 겉모양이 으리으리한 집이 아닙니다. 그 집 사람의 마음이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으로 가득 찬 집으로 하나님께서 자주 심방가십니다. 여러분 같으면 천하의 교만하고도 인색한 자의 집에 방문하고 싶으십니까? 저 같으면 어브코스노입니다. 누가 제 주머니에다 천만 원 현찰을 집어넣어 줘도 그런 집에 가서 라면 한 그릇도 먹기 싫습니다. 마음이 순하고 겸손하며 남을 사랑하고 남을 존경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남을 섬기려 하는 자가 집에 초대하면 기쁜 맘으로 방문하게 되지요. 성령께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가득한 자의 심령에 임하시어 그 자를 성전 삼아 계십니다. 반대로 더럽고 교만하고 인색한 자의 마음에는 성령께서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 곳은 악령의 처소가 되겠지요. 여러분, 남을 위하며 사랑하며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아브라함의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그 옛날 나그네는 정말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던 소돔을 보십시오. 그곳 사람들은 나그네를 공격하여 더러운 재미를 보려 했습니다. 나그네는 토착민들의 공격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자였기에 나그네를 영접하여 대접한다는 것은 당시에 인간애의 전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세 사람들을 보고 지나는 나그네라고 생각하여 후히 대접해주려 합니다. 그가 나그네를 얼마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대접하고자 했나는 여러 곳에서 감지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여기서 ‘곧’과 ‘달려나가’가 아브라함의 자발적 행동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 일이나 남을 돕는 일에 있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그런 선한 일을 하시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며 기쁨을 느낄 때 더 신바람이 나서 하게 됩니다. 교회일 하고 남을 돕는 게 고문보다 더한 고통이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순종하는 맘으로 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진정 순종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그게 고통스런 일로 다가올까요? 어쨌든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발적 선행을 본받아야 합니다. 모든 복 받은 자들의 믿음의 조상이 될 아브라함에게 그런 성품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하겠지요.

아브라함은 나그네 앞에 철저히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고...” 우리 눈에 확 들어오는 말들이 ‘몸을 땅에 굽혀’와 ‘주께’와 ‘종을’입니다. 집안에 수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사는 아브라함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뻐기고 과시해도 크게 흠이 되지 않을 자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자기 집 종도 자기에게 하지 않을 겸손한 자세로 나그네들을 받들어 섬기려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속으로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후한 대접을 할 작정을 하면서도 말로는 약소한 대접을 하겠다고 겸손한 말을 합니다.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5절).” 남에게 대접을 해도 뻐기며 과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참 부담되지요. 그러나 말이라도 저렇게 겸손하게 하면 왠지 그 사람의 인격이 더 고상해 보입니다. 여러분의 겸손한 말과 태도가 여러분 자신을 높입니다. 여러분의 겸손함이 여러분의 봉사가 하늘에 상달되게 하며 여러분이 행한 선행이 사람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열매로 맺혀지게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들이 자기 집에 방문하여 식사를 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라 합니다. 이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쉬운 말로 대통령이 누추한 여러분의 집에 와서 식사를 한다면 여러분이 대통령에게 은혜를 끼친 겁니까, 아니면 대통령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끼친 겁니까? 여러분이 회사 말단 사원이라 합시다. 여러분 회사의 사장이 여러분 집에 와서 식사를 했다면? 물론 사장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끼친 거지요. 이를 고려한다면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자기보다 훨씬 높은 자들로 인정하고 영접하려 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태도가 진정 겸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적으로 생각해도 아브라함의 말이 맞습니다. 사장이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주어 은혜를 베풀 듯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나그네들은 아브라함에게 선행을 할 기회를 주어 은혜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전자와 후자를 같은 차원의 은혜로 여기는 자가 영적 통찰력을 지닌 신앙인입니다. 중고등 학생들이 진학 할 때 사회 봉사 실적도 입시에 반영됩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이 땅의 삶을 평가받을 때 우리의 선행이 우리가 받을 상급에 반영될 게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또 가난한 자들이 여러분에게 큰 은혜를 입으면 여러분을 위해 복을 빌어주지 않습니까? 그 가난한 자들이 여러분을 위해 빌어주는 복이 더 큰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을 돌볼 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자들이라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그런 생각으로 사는 자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가정은 화목했습니다. 종들은 아브라함의 명령에 절대복종하여 신속히 행했고, 아내 사라는 행여 자신이 잘못 행하여 남편 아브라함의 명예를 손상시키지는 않을까 하여 그의 말에 순종했고 잘 해냈습니다. 그가 조리한 음식을 나그네들이 잘 먹었습니다. 여러분, 가정이 주 안에서 화목해야 성령께서 그 가정에 임하여 계십니다. 남편은 아내를 진정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진정 존경하고 순종을 잘 하는 집안에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복을 내려주십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사랑해야 그 집안에 하늘의 복이 임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맨날 티격태격 싸움질하는 집에 초대되어 가서 식사하고 싶으십니까? 저 같으면 어브코스노입니다. (Of course, no!) 가화만사성이 신앙생활에도 중요합니다. 집안 사람들이 다 인색하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집안에는 가시방석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습니다. 사람도 하나님께서도 그런 집안에 단 1분도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뻐 웃음이 집밖으로 진동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집안이 얼마나 좋은 곳이길래 그런지 궁금하셔서 방문하실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직도 아들이 없음에도 아브라함의 집안은 평안과 기쁨과 사랑과 존경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집안 한 번 구경하시고 싶으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그 집 문밖에 서 계셨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아내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던 아브라함이 마누라 자랑(?)하려고 즉시 그 나그네들을 집안에 초대합니다.

아브라함 못지 않게 복을 많이 받은 자가 바로 욥입니다. 욥도 아브라함처럼 나그네 대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였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욥31:32).” 히브리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1-2).” 물론 아브라함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께서도 소자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심방하셔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0절).” 그런데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1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방하셔서 복을 주시겠다는데 그까짓 경수가 끊어진 게 뭔 문제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안에 심방하시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모든 문제가 단숨에 해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집에서 진수성찬을 드시고 롯이 살고 있는 소돔에 가십니다. 그곳에 더러운 죄인들이 많아 멸망시키려고 가신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마음에 ‘내가 아브라함의 집에서 그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까지 죽이면 좀 그렇지? 그래,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롯의 가족만큼은 살려주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창19:29).” 여러분, 여러분께서 하나님께 사랑받고 복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그 복과 사랑이 이웃에게로 흘러 넘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성령께서 친히 심방하시어 여러분의 문제를 살피시고 해결해주십니다. 성령님의 위로와 돌보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길 기도드립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