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11. 인터넷에 공개)
제목: 하나님의 복을 담는 그릇 – 시59편 – English
>> 2 악을 지어내는 자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시고, 피 흘리기 좋아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3 그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강한 자들이 나를 치려고 모여듭니다. 그러나 주님, 나에게 허물이 있는 것도 아니요, 나에게 큰 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6 그들은 저녁만 되면 돌아와서, 개처럼 찾아 대면서, 성 안을 이리저리 쏘다닙니다. 17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기리는 노래를 새로 지어 찬양하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할 요새,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분.”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담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복 중에 땅에 관한 복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던 그를 불러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나안 땅을 영원히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방법을 통해 이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과 그의 열 두 아들들이 애굽에서 살도록 인도하셨고, 거기서 수백 년 동안 살며 한 민족으로 불어나게 하신 다음에 출애굽 사건을 통해 애굽을 빠져나오게 하시고, 그 다음에 가나안을 정복하여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한 사람이 차지하기에는 너무 큰 땅이고, 아브라함 개인은 너무나 작은 그릇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릇을 크게 만드신 다음에, 즉 그의 자손이 수백만이 되게 하신 다음에 그 큰 그릇에 복을 담아 주셨던 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의 성취 사이에는 반드시 ‘그릇을 크게 하는 과정’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배반한 사울을 버리시고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다윗의 그릇을 크게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십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 땅을 차지할 자손이 많아져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은 바로 ‘백성의 마음’입니다. 왕이 되려는 자는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백성의 지지를 받는 자가 왕이 됩니다.
유다 베들레헴 촌구석의 목동 다윗이 어떻게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지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의 군대 장군이 되어 백전백승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는?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인들에게 전설적인 인물이 됩니다. 출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혜와 용기를 폭포수처럼 부어주시니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그저 입 쩍 벌리고 감탄만 할 뿐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은 주위의 이방민족들의 위협에 항상 벌벌 떨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왕의 자격은 ‘백전백승’의 군사령관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군사들과 백성들의 마음은 차기 왕으로 사울의 아들 요나단보다는 다윗을 선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 정도 단계로 다윗이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다윗의 전공이 혁혁하고 그의 직속 부하들과 일부 백성들이 그를 흠모할지라도, 당시의 정치역학을 고려하면 아직도 산 넘어 산입니다. 사실 사울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가 왕이 된 후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대항하여 국가다운 진용을 갖추었고, 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나라의 기틀을 잡아 안전하게 살게 해준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다윗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는 것도 사울왕의 능력이 아닌가요? 또한 다윗이 속한 지파는 유다지파였고, 그 세력이 좀 커서 그런지 다른 열 한 지파의 견제를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사울왕이 이스라엘 중에 가장 힘없는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스라엘 전 지파는 가장 약한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 왕이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말은 이스라엘 안에서 유력한 지파인 유다지파 출신이 왕이 되는 것은 다른 지파들 입장에서 보면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실 이스라엘에서 제일 큰 세력을 지닌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 지파 우두머리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지라도 속으로는 이스라엘 전체의 지도자가 될 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다지파의 견제세력이 분명 있었다는 말이지요.
혹자는 사울이 죽기만 하면 저절로, 자동으로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자는 사울 개인이 아니라, 사울 집안과 군대 지도자들과 사울 주위의 정치세력입니다. 물 위에 드러난 사울 하나가 제거되더라도 그 주위의 정치세력 중에 한 사람이 추대되어 왕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동굴에 숨었을 때 사울이 잠시 일보러 동굴에 들어왔고, 그 때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겠으나, 죽이지 않았는데, 이는 정말로 현명한 판단입니다. 동굴 안에서 사울을 죽였다면 사울이 비명을 질렀을 것이고, 그랬다면 다윗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동굴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비명도 못 질렀다면, 다른 군인이 사울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횃불을 들고 동굴로 들어왔을 것이고, 죽은 사울을 보고 즉각 비상이 걸려 다윗이 발각되어 동굴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왕위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나,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차지했겠지요. 다윗이 그 때 사울을 죽이고도 용케 동굴에서 빠져나왔더라도 그가 곧바로 왕이 될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사울이 죽었더라도 그를 둘러싼 정치세력과 이스라엘 정규군이 그들의 상전 사울을 죽인 다윗을 절대로 왕으로 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다윗이 왕위를 물려받기에는 그의 그릇이 아직도 너무 작았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의 정치역학상,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시에 왕정(王政)이었기에 유다지파 출신의 다윗이 사울의 부하로 있는 동안에는 절대 왕위를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의 부하로 전쟁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운 다윗에게 그 그릇의 용량이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하나님께서는 악령을 사울에게 보내셔서 다윗의 원수가 되게 하십니다. 이는 다윗을 독립시키고, 하나님을 배반한 사울의 그릇을 깨뜨리는 작전을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평가를 ‘이스라엘을 지키는 왕’에서 ‘충신 다윗을 못살게 구는 미친 왕’으로 바뀌게 하십니다. 사울은 악령의 조종을 받아 가족과 신하들과 군인들 앞에서 온갖 치사한 짓을 다윗에게 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59편은 사울이 자기 딸 미갈에게 피한 자기 사위 다윗을 죽이라며 다윗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당시에 사울의 딸 미갈이 꾀를 부려 가까스로 다윗을 구출해 냈습니다. 사울이 광기를 부려 다윗을 죽이려 하나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사울의 딸 미갈을 통해 다윗을 지켜 보호하셨고, 그런 모든 과정을 이스라엘의 정치인들과 종교인들과 군인들이 보게 하심으로 그들에게 사울이 ‘부도덕한 미친 왕’이라는 인식이 들게 하십니다. 이는 사울의 그릇이 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사울이 악역을 감당하는 동안 더욱 다윗은 정치적 그릇이 커만 갑니다. 보통 대통령(왕)이 어떤 자를 자꾸 견제하면 견제할수록 그 견제 당하는 자가 자꾸 부각되어 저절로 큰 정치인이 됩니다. 따라서 사울의 모든 치사한 광기는 다윗의 그릇을 크게 만드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한 나라에 여당이 있으면 반드시 불만 세력인 야당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유능한 왕이었더라도 이스라엘 안에는 반드시 야당이 형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야당 지도자가 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있는 동안 특권세력(기득권 세력)과 소외된 세력이 있게 마련이고, 소외된 불만세력은 다 다윗의 지지자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 사울 가까이에서 기득권을 향유하던 자들도 요즘 불안감에 자꾸 휩싸입니다. ‘저 미친 사울이 언제 나에게 창을 던질지 누가 아나? 다윗처럼 충실한 신하도 저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 저 사울이 나라고 그냥 놔둘까? 어휴, 저 못믿을 인간!’
성경에 보니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 이곳 저곳 동굴로 피해 다닐 때 사울 정권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하나 둘 다윗에게 와서 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이 사울과 대립적인 정치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사울을 정점으로 한 빙산을 깨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세력을 강화하십니다. 사울과 그의 군대는 점점 세력을 잃습니다. 마침내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면전을 벌여 이스라엘이 대패하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사울과 그의 장남 요나단이 전사했고, 많은 이스라엘 군대는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 때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가 다윗을 자기 지파 왕으로 삼습니다. 이는 사울과 그의 정치세력이 막강할 때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이 죽고 이스라엘 군대가 거의 해체되었을 때 그게 가능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 사울의 왕위를 이은 그의 아들 이스보셋과 다윗의 전쟁에서 다윗에게 계속 승리를 안겨주셨고, 요압이 비신사적인 방법으로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죽여줌으로 결정적으로 사울 집안의 뼈가 꺾이게 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열한 지파가 다윗에게 와서 그를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삼습니다. 다윗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에 그리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복을 담는 다윗의 그릇이 완성되었습니다.
여러분, 악인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계십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당한 고난은 참으로 큽니다. 그러나 사울의 괴롭힘은 스스로의 복의 그릇을 깨는 과정이었고, 다윗의 고난은 자신의 복의 그릇을 더 크게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그릇을 깨시고 다윗의 그릇을 크게 만드시는데 사울의 자식들과 이웃 나라 블레셋까지 사용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다윗의 입장에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직장 상관에게 괴롭힘 당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직장 상사는 자신의 그릇을 깨고 있는 중이고 그 자에게 괴롭힘 당하는 여러분은 자신의 그릇을 확대시키는 중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의 복의 그릇을 깨면 안됩니다. 자신의 복을 깨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하나님 배반하다 제 자식 대에 나라를 상당 부분 잃은 자가 바로 (굉장히 흥미롭게도) 다윗의 아들 솔로몬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인들의 환심을 사려 하나님을 배반했다면, 솔로몬은 이웃나라의 환심을 사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려다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여러 나라와 국제결혼을 해서 결혼외교를 펼쳤습니다. 이 때 솔로몬에게 시집 온 이방 나라 공주들이 제 나라 우상을 이스라엘에 들여왔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배반하자 하나님께서 사울의 재임 중에 그의 그릇을 깨기 시작하셔서 마침내 그의 아들 때에 나라를 다른 자에게 빼앗기게 하셨듯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을 배반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재임 중에 그의 그릇을 깨기 시작하시어, 마침내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 거의 대부분을 잃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차별없이 심판하시고, 간사한 악인을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5절). 주께서 그들을 보시고 비웃으시리니(8절). 주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흔드시고, 그들을 낮추어 주십시오(11절).”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복을 더러운 그릇에 담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 나에게 허물이 있는 것도 아니요, 나에게 큰 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3절).” 또한 하나님께 합당한 그릇은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주님의 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재난을 당할 때에,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에, 아침마다 주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하렵니다(16절).”
우리가 다윗에게 일어난 일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다윗이 사울에게 극심한 핍박을 받을 때 그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분께 찬양을 드린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군요. 그러고 보니 큰 그릇들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매일 매일 찬양을 드리는 자들이군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리는 자가 세상을 차지합니다.
여러분의 복의 그릇이 날로 커지기를 기원합니다.
동토마햇빛교회 김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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