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막10:17-27): 선한 선생님 예수

stevision 2012. 11. 29. 19:02

 

(2007년 7월 4일, 동아 시사발언대)

 

제목: 선한 선생님 예수                             English
말씀: 막10:17-27

  

 

>>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한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 <<

부자(富者)와 거룩한 신앙인은 양립(兩立) 불가능한 것인가요? 어느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합니다. “선한 선생님.”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를 선하다 하지 마라.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느니라.” 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선한 선생이라 칭하는 것을 금하셨을까요? 그것은 ‘선하다’라는 것이 생각이나 말로만 성취되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생각이나 입으로 선한 인간이 되기는 쉬워도 행동으로 선한 인간이 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선한 행동이 완결된 다음에야 선한 인간이니 선한 선생이니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수능시험에서 전국 1등을 할 능력이 있는 고 3 학생에게 ‘너는 수능시험에서 전국 1등한 학생이다’라고 말할 수 없지요? 실제로 시험을 치러 1등이 되기도 전에 ‘너는 전국 1등 학생이라’라고 누가 말하면 꽤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는 정말 선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함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을 다 겪으시고 죽음까지 겪고 난 다음에나 완성될 선함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여’라든가 ‘랍비여(선생님이여)’라는 소리 실컷 듣고 나서 십자가를 피해 산으로 도망쳐 버리신다면 그분께서는 절대 선한 선생이 아니시지요. ‘나를 선한 선생이라 부르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십니까? 십자가 고난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다 이해 못합니다. 마귀와 적대 세력들 앞에서 고독하게 의로운 전쟁을 하시고 계신 예수, 그들의 모든 악랄한 방해를 무릅쓰고 의롭고도 선한 선생이 되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선으로 악을 이겨 선한 선생이 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물론 성부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성자 예수님을 이미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선함은 이미 이룩되었습니다. 이제 성자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받들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선(善)을 완성해 가십니다. 그 완성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선함은 말로만, 생각으로만, 결연한 각오로만 이룩되는 게 아닙니다. 행동이 빠진 선함은 껍데기 선함입니다. ‘선하다’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하는 그 자에게 예수께서 선한 인간이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느냐?” 그 자는 “그런 것쯤은 어려서부터 지켰지요”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네가 가진 모든 재산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냐?” “....” 대꾸도 못하는 그 자에게 예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너 그렇게 재물 다 팔아 다 나눠주고 나서 나와 함께 다니며 평생 하늘나라 복음 전할 수 있냐?” “....” 그 자는 꼬리를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예수님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자는 소문난 부자(富者)였습니다.

여러분, 물론 살인을 하면 악한 자입니다. 그렇다고 살인을 하지 않은 자가 선한 자입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다 살인을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먹고 살 걱정이 전혀 없는 부자가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간음 안 한다고 선한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도둑질을 안 하는 것은 너무너무 당연한 것이지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선한 인간입니까? 물론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악한 인간이지요. 그러나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선한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효도는 보통인간이면 당연히 하는 것이고, 보통 인간을 어찌 선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십계명 지킨 것 가지고 자기가 선한 인간이라 자랑하고 다니면 안됩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명백한 죄인이고,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지킨 자는 보통 인간일 뿐 선한 자는 아닙니다. 또 선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선한 자가 아닙니다. 마음이야 누가 못먹습니까? 행동으로 검증되지 않은 자는 아직은 선하다라는 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선한 자가 되는 게 힘들기 때문에 오직 선한 자가 하늘에서 큰 상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보통 사람은 혹시 구원받더라도 아주 초라한 상을 받겠지요.

예수께서는 선한 인간이 되어 영생을 얻고자 하는 그 자에게 하나님의 기준에 선한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선한 사람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자입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부자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했을 때 비로소 그 자가 선한 자가 됩니다. 반대로 옆집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혼자 재물을 쌓아두고 십계명만 지키고 있는 자는 결코 선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자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 계명을 어긴 죄인입니다. 십계명 조항에 이것이 빠져 있어서 안 지켜도 되는 겁니까? 많은 부자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도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막10:23-25)”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을 고려할 때 시간은 곧 생명이고, 시간을 내어 복음사역에 나서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자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심은 그 자에게 정말로 선한 인간이 되는 비결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을 내어 예수님과 함께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입니다. 그러한 희생 덕분에 많은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이 선한 사람이라 생각되십니까?

재물은 인간을 포로로 만드는 힘이 아주 강합니다. 20억 가진 자가 1억 남기고 나머지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면 더 이상 부자 소리를 듣지 못해 엄청난 공허감에 사로잡힐 것이 분명합니다. 그 허전함을 견딜 수 없어 부자들이 자신들의 재물을 선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슬픈 겁니다. 선함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꽤 높거든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2절).” 이 자가 부자로 살며 경건한 종교생활도 하고 싶어 예수께 한 말씀 조언을 부탁드렸지만 재물에 미련을 두고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선한 인간은 못되고 보통 사람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물론 그가 혹시 천국에 갔다면 받을 상이 별로 없겠지요. 재물을 계속 쌓아만 두며 부자 소리 듣기 좋아하는 자는 재물의 함정에 빠진 자입니다. 돈이 생길 때마다 선한 곳에 쓰지 않고 쌓아두는 습성이 문제군요.

선하신 선생님 예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희생’을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21절).” 사람들은 희생 없이 선한 자가 되려 애를 씁니다.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께서 선하신 하나님이 되시려 당신의 독생자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삼아 성부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셨습니다. 희생이 없는 죄용서는 악을 눈감아주는 것밖에 되지 않고, 이는 결코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심으로 선하시고, 인간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심으로 또 한 번 더 선하십니다. 희생이 있는 곳에 선함이 있고, 선함이 있는 곳에 영광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희생의 삶을 권하십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허락하시려 그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좇으려 하는 자(성직자)는 세상적 부유함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 세상직업 처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 되려는 자들이 간혹 있습니다. 물론 신학대학 교수직은 하나님의 종의 직분도 됩니다. 그러나 간혹 보면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교회 담임까지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옛날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세상에서 번 돈으로 생활하며 교회 담임까지 하면 성도들을 지도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세상 직업이 있고 숨겨둔 돈이 많은 자는 온전히 예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부족하게 됩니다. 물론 개척교회 시절에는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잠시 세상 직업(아르바이트 수준)도 가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엿한 교회에서 목사가 세상직업을 버리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수단으로서의 세상직업은 가능합니다. 또 목사가 자기 호주머니에 숨겨둔 돈이 있으면서 성도들에게 “여러분,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삽시다”라고 설교할 수 있습니까? 그럴 때 마귀가 “네 호주머니나 먼저 털어 가난한 자들을 도와라”라고 조롱할 것이 분명합니다. 목사가 교회 돈으로 자기 집 구입해 놓고 어떻게 성도들에게 헌금하여 가난한 이웃을 돕자는 말이 설교 중에 나옵니까? 극빈자 생활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하는 성도가 있는 교회에 자기 집과 두둑한 예금통장이 있는 목사가 담임하고 있다면 설교 말씀에 권위가 서겠습니까? 부자이면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이 약간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은퇴후의 안정된 삶을 위해 과도하게 교회 재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적당히 은혜롭게. 성도들의 존경심이 달아나지 않도록. 그들이 시험에 빠지지 않게. 그런데 예수께서는 ‘네 재물을 우리에게 바쳐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며 후원금이 절실했을 건데 예수께서는 그 부자의 자유로운 판단을 존중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자기 교회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목회자의 탐욕으로 비쳐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또 인간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중에 큰 부자가 있다면 예수께서 얼마나 부담이 되셨겠습니까? 부자 세리는 사람들에게 천한 자 취급받고 있어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그가 부자였지만 그의 주님이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의 부자는 고매한 인품의 부자였습니다. 아마 학식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지 않은 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면 진리와 영생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는 예수님과 경쟁관계에 있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야 그렇게 생각 안하시겠지만 그 부자와 다른 제자들이 볼 때 그럴 수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께서 “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것은 “네가 나를 따르려거든 먼저 사람들 앞에 내 말에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라”는 뜻입니다. 100억을 가지고 있고 노벨상도 탄 하버드 대학 교수가 무인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하나님의 종을 영적 지도자로 섬기고 따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당시에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촌동네 갈릴리 출신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사람들이 볼 때 그랬다는 말이지요. 분명 그 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번뜩 ‘저 양반이 좀 훌륭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존심 팍 상하게 저 양반의 말에 종처럼 복종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끝내 거부한 이유는 돈이 아까워서가 49%였고 자존심 상하게 복종하기 싫어서가 51%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찾고 있던 영생은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함에 있었습니다. 영생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시여’라고 부르는 데 있지 않고 ‘주여’라고 부르며 순종하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했을 경우에만 순종이 가능한 권면을 그에게 하셨습니다. 그 자가 영생을 구했기에 예수께서는 그 말씀을 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서도 학식있고 돈 많고 똑똑하고 쟁쟁한 자식들을 둔 자가 초라한 모습의 하나님의 종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갖고 순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겸손하십시오! 예수께서 그토록 학식이 뛰어나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던 바울을 생전에 만나시지 않으시고 부활 후에 만나셔서 그를 사도로 삼으신 것은 사실은 사도 바울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생전의 예수께서는 갈릴리 촌구석 어부들이나 평범한 이스라엘인들에게나 ‘주여’라는 소리를 들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 똑똑한 바울이 그 때 예수님을 만났다면 아마 예수님을 배척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을 부르심은 다 적당한 때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울이 만났을 때 즉시 그는 ‘주여, 뉘시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찾아왔던 그 부자는 그런 대로 선한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꿇어 겸손하게 영생에 대해 여쭸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했던 당시 많은 자들을 생각할 때 이 자는 꽤 괜찮은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는 그 자존심과 재물욕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괜찮은 자가 재물 때문에 넘어지는 모습을 보시며 예수께서는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10:25)” 말씀하셨습니다. 약대와 바늘귀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사람의 자존심과 욕심이 커질수록 덩치가 큰 약대가 됩니다. 그러나 자존심과 욕심을 버릴수록 나는 점점 작아지고 바늘귀는 점점 커져 드디어 내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 여러분의 마음을 예수께 드리면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참된 지혜를 주시어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또한 성령을 여러분에게 부어주시어 여러분의 마음을 겸손과 순종의 마음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선한 선생이셔서 사람들에게 영생의 길을 바로 가르치셨고, 그분 스스로 말로만이 아닌 십자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에게 선한 주님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닮은 제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