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창4:5-8) : 온전한 신앙생활

stevision 2012. 11. 23. 17:03

 

(2006년 11월 2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온전한 신앙생활                                                                 English

 

 

성경말씀: 창4:5-8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흔히 말하기를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 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직접 흙으로 빚으셔서 만든 사람이라면 가인은 이 둘 사이에서 난 최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최초의 인간의 아들이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뭔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를 실패케 하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찾아내어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가인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말씀에 보니 가인과 아벨은 각자의 제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거절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을까요? 혹자는 아벨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양을 드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물론 히브리서를 볼 때 그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의로운 아벨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은 부모님들의 죄까지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음이 분명합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받았으니...”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셨을까요? 양이 아니고 곡식이라서 그렇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양이라고 해서 받으시고 곡식이라고 해서 안 받으시는 분이십니까? 곡식도 귀중한 제물로 쓰이는 것을 레위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정말 하나님께서 곡식을 가져오는 것을 싫어하셨다면 미리 가인과 아벨에게 양만 가져오라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유 없이 인간의 호의를 거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이유는 그가 죄를 품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사59:2 “오직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하심이니.” 그러면 가인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1. 가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평소에 매우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잘못을 지적 받으면 어떤 태도를 취하십니까? 아마 즉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자신의 행위를 고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더 공경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께서 평소에 겉으로만 예의상 공경하고 속으로는 경멸하는 자가 여러분을 나무라면 여러분은 보통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아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당신이나 잘 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내 멋대로 살게 그냥 놔둬요!’


여러분, 가인이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전혀 사랑하지 않은 증거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핀잔 받고 난 가인의 태도에서 우리는 가인이 하나님을 평소에 경외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감히 티끌과 같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고 대드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이런 심보를 가지고 제물을 드렸으니 양 천 마리나 황금 천 톤을 제물로 드렸어도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예배드려라 명하시니 의무적으로 억지로 속으로는 투덜대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사랑과 감사가 없는 가인을 보시고 그의 제물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줄 때도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면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왠지 좀 아까운 마음으로 주기 싫은 마음으로 건네면 받는 사람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거지냐? 내가 언제 선물 달라고 졸랐냐? 내가 졸라맨이냐?’ 여러분 억지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참으로 불경스런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거지 취급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2. 가인은 형제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 자체는 죄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거나 심지어 해코지하는 것은 죄입니다. 가인은 평소에도 아우 아벨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이 평소에 그 아우를 사랑하지 않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은 증거는 나중에 그 아우를 돌로 쳐죽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가 평소에 아우를 사랑했다면 어찌 자기에게 아무런 죄도 안 지은 그를 나중에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끔 방송에 남편이 아내를 죽인 사건이 나옵니다. 결혼 후 20년이 지나 오늘 아침까지 잉꼬부부였다가 점심 때 갑자기 다투는 바람에 죽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움이 쌓이고 쌓여서 증오의 봇물이 꽉 차 터지며 살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이유를 똑똑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죄를 품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 죄는 바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그 아우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안 받으시는 이유는 그의 평소 행위를 의로운 것으로 인정해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가인의 하나님이라 칭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조폭이나 동성애자가 친구로서 선물을 주면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 없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혼란스런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어떤 자들은 예배시간에 설교자의 말씀을 듣고 크게 시험을 당하기도 합니다. 도시 교회에서는 자기를 치는 설교를 한다고 기분이 나빠서 교회를 옮기는 교인들도 간혹 있습니다. 이마에 기독교인이라는 표는 달고 다니나 가인처럼 거듭나지 못한 채 이 교회 저 교회로 방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의 마음이 아마도 가인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겸손히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야 정상적인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가인처럼 자기를 치는 설교를 한다고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고 담임 목사님과 영적인 목자와 양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 말씀이 나의 양심을 찔러 마음이 아프면 그 말씀이 살아 움직여 나를 치료하는 과정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관절을 쪼개고 골수를 쪼개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뼈를 쪼개는 듯한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관절을 쪼갠다 함은 나의 신앙의 기본 형식을 고치는 과정을 말합니다. 골수를 쪼갠다는 말은 나의 신앙의 내용을 바꾸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잘못된 나의 신앙의 기본 형식과 내용이 바뀌는 동안에는 수술을 받는 것처럼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바로 그 말씀이 나의 양심을 흔들 때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나의 죄 된 마음을 회개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려고 할 때,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우리의 예물도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도 들으시고, 우리에게 복도 내려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볼 때 예배가 우리의 신앙 상태를 알려주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의롭게 보시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찌르면, 나의 지금까지의 삶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인의 삶의 실패는 바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온전한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먼저 자기 자신이 정결한 제물이 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자신의 죄를 무마하기 위해, 혹은 체면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제물을 드리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큰 부자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과 금은은 다 하나님 것입니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제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서 나의 죄를 눈감아달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라든가, 나의 죄를 회개하는 상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을 멸시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죄를 지면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이 속죄제는 번제로 드립니다. 번제는 동물을 죽여 각을 떠서 다 불살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예배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온전한 번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육적인 자아가 죽고, 나의 혈기와 아집과 이기심이 온전히 성령의 불로 태워져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에 왜 예배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를 통하여 나의 죄가 사함받고, 내가 영적, 육적으로 고침을 받아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인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가인과 같이 예배를 실패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합니까? 가인은 안색이 변했습니다. 즉 육체적 불균형에 시달리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인은 또한 분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즉 정신적 불균형에 시달리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예배를 전혀 안 드리는 세상 사람들과 기독교인이면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자들은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애굽의 악질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온전한 예배를 항상 드리면 그러한 병으로부터 해방됩니다.


다음으로 온전한 예배는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난 후의 우리의 생활이 온전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교회문을 나설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가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판가름납니다.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은 대로 사는 자는 진실한 예배를 드린 것이고, 가인처럼 하나님 뜻과는 전혀 상관없게 마음대로 자기 동생까지 죽이는 자는 가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혹시 예배 중에 말씀을 통하여 마음이 아팠더라도 예배를 마치고 난 후 세상에 돌아가서 그 말씀대로 감사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께서 드렸던 예배를 귀히 보시고 여러분의 공로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오늘의 예배를 감사히 드리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많은 헌금을 하셨더라도 교회 밖에 나가 엉뚱한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드렸던 예배와 예물을 기억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께서 예배당에 나오셨던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십니다. 성경은 많은 자들이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많은 자들이 예배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은 들었으나 실제로 그러한 삶은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의 예배를 전혀 기억하시지 않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니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바로 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우리 자신이 정결한 제물이 되는 예배이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입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나무라신 것은 제물의 종류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본 뜻을 오해하기 때문에 아직도 신령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형식에 얽매여 헛된 경건만 생각하고 헛된 예배를 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상식적이고 올바른 것에 많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신령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그만한 것을 요구하셔도 될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황송한 선언입니까? 북한에서 김일성의 형상인 동상에 불경스런 짓을 하면 잘못하면 죽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인 형제에게 나쁜 짓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자신의 형상으로까지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는 자기 독생자를 인간의 죄를 속하시기 위한 속죄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생물은 그 먹는 것으로 존귀함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소는 풀보다 귀합니다. 소가 풀을 먹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소를 먹기 때문에 소보다 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온 인류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동물의 피를 마시지 마라고 엄금하셨습니다. 그러는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 예수님의 피는 마시라고 우리에게 권하십니다. 이는 물론 우리의 죄를 씻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최고 존재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분을 온 정성을 다하여 높여드리고 경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가인과 같은 심보가 있습니다. 죄를 인정하기 싫어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좋아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언짢아지고 얼굴이 붉어지며, 더 이상 그런 말을 한 자와 상종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또 죄 없는 타인에게 괜히 화풀이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죄의 뿌리입니다. 이런 죄의 뿌리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심지어 아벨에게도 이런 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아벨에게도 가인처럼 죄 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을 제물로 가져왔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도 아벨에게 그의 죄를 추궁하셨다면 아마 아벨도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형 가인을 나무라셨습니다. 가인이 형으로서 아우보다 생각이 좀 모자랐고 또 형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인이 겸손히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면 동생 아벨보다 하나님께 더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역시 형 만한 아우 없다더니, 역시 형인 네가 더 낫다.” 그러나 가인은 죄 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큰 실수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여러분! 여러분께서 여러분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다면 여러분은 이전보다 하나님께 더 칭찬을 받을 것이고 더 큰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마음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이에 굴복하면 가인과 같이 인생을 실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언제나 아벨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아름다운 믿음을 보시고 여러분을 칭찬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칭찬만 들어서는 온전히 성숙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가끔 여러분을 책망도 하십니다. 이런 책망을 들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 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때 절대로 가인처럼 혈기를 부려서는 안됩니다. 잠언 말씀에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얻는 것보다 더 낫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강자들을 정복했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져서 패망한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죄 된 마음을 다스려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가 진정으로 성숙한 기독교인이 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