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출20:5 그것들(우상)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니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아브라함은 자식 이삭을 보기 전에 슬픈 자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버지께서 조상 대대로 그랬던 것처럼 우상을 섬긴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슬픈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죄인일 때 그 누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75세에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의 고난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집을 나오면서 집과, 친구 등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절대적 약자가 되어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보호해줄 나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멀리 떠나 있어서 그를 죽이려 한 강도들은 매우 많았습니다. 항상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 살면 그 누가 자신을 행복한 자로 여기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올 때의 일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를 만납니다.
아브라함: 친구, 반갑구만. 나 새로운 세상을 찾아 고향을 떠난다네.
친구: 아니, 왜 그래? 지금 여기서도 살만 하쟎은가?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친구: 그러나 자네 나이가 지금 75세일세. 또한 자네는 지금 아들도 없쟎은가? 그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뤄지겠나?
아브라함: 나를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네. 난 하나님을 믿네.
친구: 그럼 언제 고향에 되돌아 올 건가?
아브라함: 내가 나중에 고향을 방문할 때는 무자식인 아브람이 아니라 많은 자식과 많은 부를 가진 왕이 되어 아브라함으로 올 것일세. 기대해 보게나.
아브라함이 집을 떠난 지 65 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 집을 떠나고 있습니다.
종: 주인님, 주인님께서 고향에 직접 가시든가 아니면 저와 함께 가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종인 제가 무슨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 주인님 아드님의 배필을 구합니까?
아브라함: 아니다. 고향 내 친구는 건강한 자라 아직도 살아 있을 것이어서 난 갈 수 없다.
늙어 죽을 나이가 가까웠는데도 소원이나 약속이 아직 안 이뤄졌다면 불행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성경 말씀을 너무 부정적으로 해석했습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가서 친구들을 만날 수 없는 자들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연약한 나그네여서 자기보다 강한 자가 자기 아내를 요구해도 찍소리 못하고 내 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불행이요, 고통입니까? 도대체 아브라함이 안전하고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고향을 왜 떠나왔던 것입니까?
예수님도 또한 슬픈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진실로 하나님이셨지만 보통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보통 신분의 변화가 있으면 사람은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혼란에 빠집니다. 장관했던 자가 갑자기 장관직을 사임하고 나서 마땅한 직업이 없을 때 밖에 나가 다니기가 힘들 정도 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래 창세전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한 위격(신적 인격체)이셨는데 2000년 전에 이스라엘인으로 그야말로 신분이 수직강하 하신 채 새로운 신분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사장도 아닌 평민으로 사신 것이 어찌나 힘드셨던지 제자들이 자기를 메시야라 말하는 것을 제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신학자들이 이 메시야 비밀을 놓고 이런 말 저런 말 많이 하는데, 갑작스런 신분 변화를 겪어본 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자신의 본래 신분을 숨기셨는지 즉각 이해를 합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이스라엘이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 어느 누군가가 죽어줘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한국의 일부 목회자들도 자신의 목회방침과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다고 가끔 죄도 안 지은 주의 종들을 내보냅니다. 그 주의 종이 자기 아들이라면 그렇게 대우할까요? 이는 가야바를 닮은 목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어부를 부르셔서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을 훈련시켜 사도들을 길러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리에게 은혜 자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유대인들이 그분을 갈릴리 시골뜨기로 알고 대하는데 자신의 본래 신분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들에게 말한들 먹혀들겠습니까? 처음에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외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분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퍼트리고 다니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셔서 조롱과 모욕을 당한 주된 이유도 바로 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명칭이 아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여기며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 때문에 맘대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시지도 못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더 큰 고통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교권을 잡고 있던 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직에 있었으므로, 자신을 굴복시키셔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한 사직한 목회자가 다른 교회 평신도들로부터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 못한다고 얻어맞는 것을 상상이나 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목회자는 얼마나 슬픈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도성에서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 신성모독죄로 매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슬픔은 그것으로 마지막이 아닙니다. 왜 아브라함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조상이 우상숭배자들이었고, 아담이래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바로 하나님께 채찍을 맞은 자에게 먼저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인을 대신하여 매맞은 자에게 아주 영예로운 호칭을 주십니다: 모든 자들의 복의 근원, 모든 자들의 구세주, 죄의 정복자. 아브라함은 모든 자들의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안의 작은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고, 만왕의 왕이시고, 사단의 왕국을 정복하시고, 죄인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고난의 종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것입니다만, 예수님 오시기 수백 년 전에 기록된 것을 고려한다면 당시에 다른 많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당한 한 의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직접 벌을 내리시면 하나님과 죄인은 영원히 원수지간이 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한 의로운 자를 택하셔서 그 죄인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게 하십니다. 혹독한 벌을 대신 받게 하신 것이지요. 이 의인은 영문도 모른 채 고난을 당하며,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거라 믿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말없이 고난을 감당한 것이지요. 이제 그 의인의 고난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의인이 너희들의 죄를 대신해서 벌을 받았으니 너희들은 형벌을 면해 주겠다. 그러나 너희들은 저 의인을 너희들의 주인으로 섬겨라. 저 의인은 너희들의 구세주다.”
여러분! 세상에 구세주만큼 영광스런 호칭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의로운 고난을 받아야만 합니다. 의로운 고난이란 자신의 죄값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죄값으로 받는 것을 말합니다. 가끔 교회에도 보면 하나님 앞에 흠없는 자들이 타인의 죄를 감당하며 병에 걸려 고생도 하고 사고도 당하고 그럽니다. 이런 의인들이 모든 고난을 달게 받으며 다른 죄인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 드릴 때 나사 빠진 교인들의 죄나 정신 나간 교회의 죄가 말끔히 사라집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의인들을 교회 내에서 작은 구세주로 인정해 주십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면 이런 의로운 고난을 감당한 자들이 큰 상을 받습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죄는 혼자 다 짓고 멀쩡하게 잘 사는 자는 자신의 죄값을 타인에게 지우고 살고 있음을 아시고 천국에서 상 받는 것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고통은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 법칙에 따라 받는 고통(죄와 무관한 단순한 병이나 사고), 다음으로 자신의 죄값으로 받는 벌,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받는 고난(하나님과 타인의 유익을 위해 받는 고난), 즉 욥과 같은 고난이나 타인의 죄를 감당하기 위한 의로운 고난.
혹시 태어나면서부터 무거운 병의 짐을 지고 나오신 분 계십니까? 입이나 마음으로 불평하지 마시고 가족과 이웃과 교회와 나라의 죄를 위해 매일 기도드리십시오. 자신의 죄와 무관한 고난은 다 의로운 고난입니다. 의로운 고난 중에 여러분께서 하나님께 기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께서 중보기도 한 자들에게 임할 형벌을 면제해 주십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차원높은 기독교인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분들이 되신 것입니다.
어느 한 무리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엄청난 고통임과 동시에 엄청난 명예입니다. 두 번째 믿는 자는 좀 덜 고생하고 첫 번째 사람의 믿음의 자손이 됩니다. 의로운 고난을 받는 자는 죄인들의 주인이 됩니다. 죄를 진 자들은 의로운 고난을 받는 자들의 종이 됩니다.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예수께서는 다른 것 보다 신앙의 명예를 더 사모하라 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고 의로운 고난 감당할 용기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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