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요1:43-51) : 참 이스라엘 사람

stevision 2012. 11. 23. 16:54

 

(2006년 10월 27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참 이스라엘 사람                                                                    English

 

 

 성경말씀: 요1:43-51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보시고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을 만나 제자로 부름을 받은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 예수님을 소개하며 와서 한 번 보라고 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나다나엘에게 전도한 이유는 그분이 바로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약속된 메시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약과 구약 전체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예언된 메시야는 인류의 구세주이시고 인류를 사랑과 평화와 정의로 다스릴 분이시며 모든 악인을 물리치실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야는 이스라엘인이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은 일명 바돌로매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인으로서 바돌로매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최종적으로 메시야의 나타남을 예언한 예언의 시대가 끝난 지 400년 정도 되었고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과거 다윗 왕조 시대의 독립과 번영으로 이끌 메시야를 정말로 갈망했습니다. 400년 동안 주인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드디어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시간 스케일은 정말 큽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빠지기도 합니다. 눈도 거의 빠지다시피하고 목도 길이가 좀 늘어나기도 합니다. (주여! 이런 불경스런 말을 한 저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은 이뤄 주십니다. 그 때에는 머리카락 빠지거나 눈이 거의 빠지거나 목이 늘어질 때의 모든 고통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기쁨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 기쁨을 느껴 보셨습니까?


그런데 빌립이 메시야라고 주장한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보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목수 요셉의 아들 나사렛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사렛은 주목받은 적이 없습니다. 주목을 받았던 곳은 예루살렘과 그 안의 성전이었습니다. 나다나엘과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태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었던 거룩한 장소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그릇된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보호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안에 있으면 형벌을 면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성전을 짓밟도록 허용하시기까지 하면서 죄 범한 백성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제사장이 이방인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하도록 허용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의 거룩한 장소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를 제한하려는 주제넘은 생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가 꼭 예루살렘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적인 기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세나 사상에 의해 제한 받지 않으시는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배타적인 종교단체를 이루며 하나님의 복을 독점하고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베풀지 않는 자들의 손을 들어주시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의 풍요도 누리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의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는 이러한 하나님의 자유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메시야를 예루살렘 사람으로 자라나게 안 하신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자들의 불의에 동참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임하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나타나시면 사람들이 “네가 감히 인간이면서 하나님이라고해?” 하면서 모욕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이상자로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 일을 도저히 하실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으로 인정하더라도 문제가 생깁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명령을 어기면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임금의 얼굴을 직접 보고 명령을 받은 자가 그 명령을 어기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그분의 대리자인 주의 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혹시 불순종하더라도 살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꿈이나 생시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이신 줄 모르게 임하셔서 말씀하시고 후에 그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분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난 다음 성령을 받고 나서야 그분께서 정말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존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사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말씀하실만큼 그렇게 큰 일은 별로 없습니다. 아주 드물게 환상이 아닌 방법으로 정말 성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목동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실 때였습니다. 눅2:9,10 “주의 사자(an angel of God)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the angel of God)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여기서 주의 사자와 천사는 같은 한 천사입니다. 천사가 목동들에게 기쁜 소식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바로 ‘주의 영광이’라는 대목입니다. 이는 빛을 말하고 그 빛은 하나님의 본체를 감싸고 있는 빛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분의 천사를 데리고 목동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사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임하셨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때는 막(짙은 흑암이나 빛)을 사이에 두고 만나십니다. 또는 그분의 종들을 보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시기 위함이고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기가 예수라고 주장하는 많은 자들은 100% 가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줄 모르게 만나신 후 나중에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만나는 상황입니다. 진짜 하나님이나 진짜 예수님은 성함을 여쭤봐도 대답을 안 해주십니다. 대신 “왜 내 이름을 묻느냐”고 되물으십니다. 제 말이 맞나 틀리나 성경을 보십시오. 그러니 기도 중에 맨 정신으로 예수님을 만나려 떼를 너무 쓰시지 마십시오. 들으시는 예수님 입장 곤란해집니다. 도대체 만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온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은 이미 성경에 있으니 열심히 성경 보시고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 섬기면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믿음생활이니 거기서 만족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필요하시면 뜻하지 않게 만나주시니 예수님의 처분에 맡겨 주십시오. 억지로 예수님을 만나려다 사단의 노리개가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소원 때문에 나타나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어떤 인물을 보고 경솔하게 예수님을 만났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만난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만남 후의 어떤 위대한 변화가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와 예수님을 대면시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그분을 믿었습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하자 빌립이 한 번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십니다. 이에 나다나엘이 놀라며 어떻게 아셨냐고 합니다. (칭찬 안 해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짧은 만남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게 됩니다. 이 짧은 만남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알았을까요?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다나엘 자신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정직하고 간사하지 않은 이스라엘인으로 스스로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를 알아주시는 분이 바로 자기 앞에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알아주신 예수님께서 간사함이 없으신 참 이스라엘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사랑이 많으신 분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의 모든 허물을 덮어두시고 칭찬의 말만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없는 죄도 일부러 만들어 형제를 정죄하며 괴롭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죄도 없는 남을 정죄하기 좋아하면 좋은 사람 다 잃습니다. 예수님처럼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 남에게 사랑과 존경과 신뢰를 받습니다.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헐뜯으면 좋은 사람 다 놓치고 신뢰를 다 잃게 됩니다. 제가 만났던 어떤 목회자는 그렇게 본인 앞에서는 부드럽고 좋은 말을 하는데 본인이 없는 곳에서는 헐뜯기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분 정말 믿을 사람이 못되는구나. 나 없는 곳에서는 나도 헐뜯겠지?’ 그 누가 예수님만큼 간사함이 없는 진짜 이스라엘인이었을까요? 진짜 이스라엘인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나다나엘은 ‘(선한) 것’에서 ‘선생님(랍비)’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바꿔 부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그분의 위엄과 그분의 통찰력을 통해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 누가 실제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그분의 신성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문제는 세상 사람이나 믿음이 적은 기독교인이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만난 자는 다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빌립과 같은 자들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를 예수님 앞에 데려와야 그가 변화됩니다.


나다나엘이 구원을 받았을까요? 예수께서 그를 향하여 “네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향하여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 받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의 모든 허물을 덮어두시고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죄사함의 선언이고 구원받았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나다나엘처럼 예수께 나오면 참 이스라엘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여기서는 육적인 이스라엘인이 제외됩니다. 아무리 혈통적 이스라엘인이라 하더라도 간사하게 하나님을 믿으면 참 이스라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 부활 이후에 나다나엘은 아라비아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참 이스라엘인으로 여겨주시고 간사함이 없다고 여겨주신 주님과 그분의 복음을 위해 그는 인정해준 대로 끝까지 충실한 예수님의 사도와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들을 참 이스라엘인으로, 그리고 간사함이 없는 자로 여기시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아멘으로 화답하여 그분의 충성스런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