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마11:12) :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stevision 2012. 11. 23. 16:58

 

(2006년 10월 31일 동아 사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English

 

 

 

성경말씀: 마:11:12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요즘은 다른 도시에 있는 교회로 나가는 성도님들이 꽤 있습니다. 경기도에서 개척 교회를 담임하셨던 목사님께서 그곳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에 있는 같은 교단의 큰 교회 담임 목사님을 접견하고 부탁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희 교회가 있는 곳에 사시는 분들 중에서 이 곳까지 오는 성도님들 중 몇을 좀 주십시오. 그러면 교회부흥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큰 교회 목사님께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나중에 그 개척교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저의 귀에 아직도 생생합니다. “내가 그때 참 순진한 부탁을 했다.”


교회는 예수님 앞에 정결하고 순진한 신부입니다. 남자들 중에 그 누가 잔꾀 많고 마음이 굽어 있는 부인을 좋아하겠습니까?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한국교회가 순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 말씀은 우리 한국교회 목사님들의 목회 좌우명입니다. 이 말씀은 많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복음 전파에 열정적으로 임하게 한 공로가 큰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일부 목회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순진성을 파괴하고도 그것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곧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교회야 굶어 죽든 말든 자기 교회만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부흥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특별히 허락하신 복이라 믿게 만든 성경구절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은 대체적으로 있는 것을 나누어주고 사랑을 베풀라 합니다. 이런 성경이 스스로 본문 말씀 때문에 모순에 빠질까요? 그럴까요? 성경 말씀 중에 예외사항이 있어서 교회 부흥 문제에 있어서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성경이 허락한 것일까요? 과연 그럴까요? 하지만 성경 말씀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난 후 옥에 있던 세례 요한이 다시 한 번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약속된 메시야이신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음을 들어 자신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여인에게서 난 자중에 가장 뛰어난 자이고, 큰 선지자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런 대화 중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즉, 세례 요한의 때부터 하늘나라의 문이 모든 자들에게 열려졌고, 믿음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 나쁜 해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자도 많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부흥은 천국의 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한정 교회를 확장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이는 성경에 나와있으므로 정당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보이기 위해 죄송하지만 영어 성경에 나온 말씀을 소개해드립니다.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men of violence take it by force.” 이를 번역하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이 폭력에 시달렸다. 마침내 폭력배들이 천국을 강탈한다.” 제가 보기에 영어성경보다 독일어 성경이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잘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있는 실력 없는 실력 다 동원한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Als der Täufer Johannes auftrat, hat Gott angefangen, seine Herrschaft aufzurichten; aber bis heute stellen sich ihr Feinde in den Weg und hindern andere mit Gewalt daran, sich dieser Herrschaft zu unterstellen.”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통치권을 행사하시기(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원수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통치에 굴복하는 것을 폭력으로 막았다.”


제가 볼 때에 전체적 문맥에 맞게 번역된 것은 독일어 성경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세상에 보내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게 하시자, 즉 하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고, 자신의 통치권을 회복하려 하시자 하나님의 원수들이 자신들의 입지에 위협을 느껴 본격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종교 권력을 지닌 대제사장과 정치 권력을 지닌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은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가는 것을 극구 폭력에 가까운 권력을 통해 막았던 것입니다. 헤롯왕은 하나님의 선지자 요한을 옥에 가두어 사람들과의 접촉을 아예 단절시키고 급기야 그의 목을 베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듯이 얼마나 대제사장과 그의 부하들이 사람들이 요한과 예수님께 맘이 가는 것을 근심걱정 했습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신정국가인 이스라엘)가 폭력배(원수)들이 강탈해왔고 계속 그런 상태라는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사실은 사리사욕을 위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교회의 순수함을 파괴하면서까지 교권을 장악하려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고 예수께서 친히 규정하신 폭력배라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도 교회 개혁을 외치며 바른 소리를 하면 이를 싫어하는 자들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권위라는 방패를 내세워 요한과 같은 자를 침묵시키고 급기야 바른 소리하는 요한과 같은 자들을 교회에서 사라지게 하고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영에 지배되지 않고 사리사욕에 눈이 어둔 자들이 잠시 교회(천국)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폭력배들이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이 중요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이라는 것도 일단 이기주의의 종이 되면 구성원들이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도 그 불의를 여러 사람이 한 일인 양 착각하여 자신들의 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죄는 개인이 짓든 단체로 짓든 다 심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단체로 죄를 짓다가 단체로 하루아침에 멸망당한 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폭력배에 의해 불법 점거된 성전과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딴 살림을 차리셨습니다. 서기 70년 이스라엘과 그 안의 성전, 그리고 제사장 제도, 이스라엘의 교권과 정치 권력의 핵심인 산헤드린은 로마의 침략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대신 세계를 무대로 한 기독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요즘의 교회는 교회 확장이 목표입니까, 선교가 목표입니까? 경기도 어느 도시가 새로운 택지를 개발 할 즈음에 그곳에 좀 큰 교회 셋이 있었는데 다들 3,000 평되는 교회 부지를 새로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으며, 다들 그 도시 전체 인구의 1/10을 교인으로 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물론 새로 전도하여 그 수를 채우시겠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습니까? 사실상 그것은 세 교회가 그 도시 모든 기독교인들을 다 차지하겠다는 기도인데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는 가운데 그 도시의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께서 해도 해도 안되니 절망하여 낙심 가운데 자살하셨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믿음이 없구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인데 기도도 안 했구만.” 사실 누가 지금 개척교회 담임자들보다 더 절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개척교회 때 고생했다면 개척교회 목사님의 처지를 생각하여 자기 교인 몇 좀 떼어주면 더 좋지 않을까요? 어떤 장로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오늘날의 교역자들께 하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사랑을 외치는 목사님들이 더 양보할 줄 모르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불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항상 국민들의 의식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교회가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돈을 써서 교회 선거를 하면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닙니까? 전국의 기독교인들이 교회 세습을 싫어하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고 밀어붙이고 있으니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작은 교회 세습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국적으로 책임있고 지목을 받는 교회에서 좀 더 좋은 모범을 보였으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


대형 교회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자기 설교 백만 믿고 교회를 자꾸 크게 하면 다른 분들께서 고생하니 문제입니다. 개척교회에 다니시던 성도님들이 수틀리면 큰 교회로 보따리를 싸서 가니 문제입니다. 10여 년 간 개척교회 아닌 개척교회를 하시는 목사님께서 자기 교인이 다른 데로 가버리니 설움에 복받쳐 피눈물을 흘리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대학에 합격한 자기 아들이 무능한 아버지라고 하여 맘고생을 하는 개척교회 목사님도 계십니다. 왜 한 교역자가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워놓고 재벌총수처럼 행세하고 있습니까?. 큰 교회 만들고 돈이 모이자 신도시가 생기는 곳마다 큰 돈을 들여 교회를 세우니 역시 큰 교회를 선호하는 성도님들 때문에 그 교회도 잘 됩니다. 이렇게 자기가 세운 교회마다 자기가 다 관할하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나라 재벌이 해체된 지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안타깝게도 일부 교회 목회자의 의식은 여전합니다. 주일 날 대예배 한 두 번이면 됐지 왜 4-5부까지 해서 한국 교회의 영성을 흐려놓습니까? 주일날 거룩하게 한 날을 교회가 보내야지 왜 4-5부까지 영업행위를 합니까? 주일 대예배를 4부 정도 드리면 교회가 완전히 북새통입니다. 그 혼잡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기계적 설교, 손님으로 앉아 있는 교인들, 극장의 연극과 같은 예배 순서들, 연극을 감상하는 교인들이 그런 예배의 모습들입니다. 4부 예배 때 교역자는 지칠대로 지쳐 있고 설교는 억지로 하는 연설이며, 교인들은 여러 번 재탕한 설교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들께 새로 지은 밥을 대접하는 듯한 설레는 맘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이나 원고에 있는 것을 기계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죽은 설교입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죽은 설교입니다. 도대체 그 욕심은 어느 정도까지 채워져야 만족하는 것입니까? 욕심이 예배를 죽은 예배로 만들며, 설교를 죽은 설교로 만들고 있습니다. 왜 심령이 가난하라고 설교하는 분들이 이다지도 명예와 대우를 탐합니까?


앞으로는 예수님께서 천국에 폭력을 행하는 원수들에게 하신 말씀을 자신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말씀으로 오용하는 분들이 한 분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사랑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좋은 땅은 착한 마음입니다. 타인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성령의 지도로 행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우리 마음을 황폐케 만들고 그 마음으로 열심을 내게 해서 타인까지 해치게 만듭니다. 성령은 나보다 남을 생각하게 하시고,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게 해주십니다. 무관심과 냉정함은 죽은 시체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영이 살아있고 양심이 살아 있는 분들께서 목회를 해야 성도들에게 복이 됩니다.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폭력배들이 지상의 천국은 강탈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천국에는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고 교회 내에서 폭력배에게 시달리는 자들은 지상의 천국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감히 성전에서 맘대로 설교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폭력배들이 지상의 천국을 강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자는 나중에 예수님과 함께 지금부터 영원히 천국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립시다. 세례 요한도 지상 천국의 폭력배들 때문에 순교했고, 예수님께서도 그 폭력배들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에서 진정한 천국백성으로 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십자가에 달린 자들만이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끝으로 대형교회에 대해서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유럽의 그 웅장했던 교회들이 지금 어떤 모습입니까? 텅 빈 교회에 노인들 몇 분만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썰렁하고 은혜가 뚝 떨어지는 교회입니까? 몇 만 혹은 몇 십만의 교인들을 수용하는 큰 교회보다 그 교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교회 몇 백개가 더 아름답습니다. 한국인들은 유교 사상에 물들어 있어서 경전을 소중히 여기는 심성이 있어 성경을 아주 귀히 여기고 성경 말씀이라면 그냥 진리로 여깁니다. 위의 성경 말씀이 지금까지 개교회의 욕심을 부풀리는 데 사용되었다면 이제 그 말씀이 진짜로 의미하는 바를 알았으니, 우리는 개 교회의 헛된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며, 교회간의 사랑을 회복시키는 데 열심을 내야겠습니다.

(영적 통찰력이 있으신 어느 분께서는 전도하지 않는 자는 전도 잘 하는 자의 전도하는 방식과 그 결과에 대해 비판을 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열 가지 중에 잘한 것 여덟 가지는 싹 무시하고 잘 못한 것 두 가지를 붙들고 비판하려 지력을 소비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비판은 교회를 죽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긍정적인 것을 못보고 부정적인 것을 비판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근근히 사는 자들이 있다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는 정말로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100%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걱정되는 것은 사리사욕에 눈이 먼 자들이 이분의 말씀을 성경처럼 중시하여 지금까지의 그릇된 목회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문제는 몇몇 그것을 질시하는 자들의 단편적 의견이 아니라 한국의 목회자 95% 이상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제이고, 많은 의식 있는 평신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의 질적, 양적 성장에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초대형교회 문제이고, 수단 방법을 가지지 않는 교회 확장 문제입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 전체의 양적 질적 성장을 위해 일부 그릇된 목회자의 교세 확장주의 목회관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굳이 대안을 제시한다면 이미 의식 있는 몇몇 목회자들께서 교회가 좀 부흥했다 싶으면 성도를 나눠 교회를 새로 세우시는 것을 들겠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했다고 합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한 양심에 호소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당신이 말을 안 듣고 그 일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주위의 다른 주의 종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주위의 평신도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당신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당신은 귀신들린 자나 우상을 섬기는 자의 입을 통해 은연중에 당신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사고를 통해 당신을 벌하시며 그릇된 생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이 지경이 되면 겸손히 죄를 인정하고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취하시든가 당신을 악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사울은 악한 도구가 되어 하나님께서 다윗을 단련시키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인간이 악한 도구가 되다니, 이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한 일입니까? 선지자 발람은 짐승의 말을 듣고야 정신을 조금 차렸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욕심에 눈이 먼 주의 종을 짐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수모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릇된 목회철학의 문제는 이미 세상 사람들까지 비난하는 바입니다. 과유불급입니다. 교회 부흥 세미나 강사로 활동하시는 목회자들께서는 좀 더 건전한 목회철학을 가지고 세미나에 임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교회부흥 세미나 강사는 300명 정도의 교인으로 지역사회에 봉사도 잘하고 그 지역을 복음화 잘 시킨 목회자들입니다. 한국 교회 목회자님들과 성도님들은 이렇게 지역 사회에 뿌리를 잘 박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분들을 귀히 여기고 그분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죄 뿐만 아니라 성령을 거역하는 것도 죄입니다. 성령께서는 죄 짓는 자 자신의 양심과 타인의 양심을 통해 책망하십니다.


성도를 독식하는 것은 나라 전체의 복음화에 걸림돌이 됩니다. 교회에 해가 되게 하면서까지 성도를 끌어모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소유물로 여기는 행위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소유로 여기며 계속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하다가 10 가지 재앙을 만났습니다. 성도들도 문제입니다. 제발 교회 규모 따지지 마시고 가까운 교회에 나가세요. 그래야 제대로 전도하고 봉사하는 기독교인이 됩니다. 몇천 명 교인을 둔 담임 목사가 당신 얼굴이나 기억하고 있는 줄 아슈? 꿈깨슈! 당신은 목자 없는 양입니다. 자초한 것이지요. 당신의 집에 가까운 교회에 가시면 매일 당신 가족을 위해 새벽기도 때마다 기도해 주실 선한 목자가 계십니다. 제발 좀 지혜롭게 사슈!)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