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13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예수님의 평화 English
말씀: 마10:34-39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세상에는 진짜 평화가 있고 거짓 평화가 있습니다. 거짓 평화는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이웃 나라가 전쟁준비를 거의 다 마치고 전쟁을 일으킬 날짜까지 잡아놨는데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래서 온 나라가 평화 가운데 있다면 이는 거짓평화일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과 위기에도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습니다. 수술하면 반드시 나을 병이 있다고 합시다. 수술을 받기 전과 받는 동안은 고통이 따르고 위기감이 감쌉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데 필요 불가결한 가짜 고통과 위기입니다.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께서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평화를 깨뜨리는 검을 주러 왔다!’ 아니, 이게 무슨 말씀? 한술 더 뜨십니다. 자식과 부모간, 고부간에 서로 원수가 되게 하시겠답니다. 아이고 무서워라. 그런데 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러한 집안전쟁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과정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만을 주장하며 집안에 분쟁이 일어나도 좋다는 이기적인 예수님...? 예수께서는 신자들이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님께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죽음의 과정과 죽음은 평화의 정 반대가 아닙니까?
물론 위의 말씀은 진짜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가짜 위기와 고통이겠지요. 예수께서 칼을 주신 것은 사람을 죽이라고 주신 게 아니라, 사람들과 맺어진 그릇된 관계들을 단칼에 잘라버려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더 자유로워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자식의 종교까지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우상 종교에 빠진 부모가 참종교인 기독교를 믿고 있는 자식들에게 신앙을 버리라고 명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런 악한 줄은 끊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절하라는 말이 아니라 부모님께 매를 맞더라도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부모는 이 때 배신감을 느껴 자식을 원수로 생각하겠지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같은 여자끼리지만 아주 서슬 퍼런 경우도 있습니다. 자식이야 (원래 말을 안 들어먹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남의 집에 시집왔으면 그 집안 법을 따라야 할 것 아냐? 물론 이 말은 시어머니의 호통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며느리의 손에 더 서슬 퍼런 칼을 주셨습니다. ‘네가 살려면 과감히 그 줄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저렇게 비우호적인 원수같은 분위기도 위기상황이지만 인간적 사랑으로 가득 찬 경우가 사실상 더 큰 위기일 수 있습니다. 거짓 평화가 사실은 더 무서운 것이지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가 그렇게 인자하게 대하시면서 ‘아가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집안이다. 너 대학 나와서 교양 많은 것 다 안다. 그러니 우리 집안 분위기가 그러하니 교회는 일년에 두어 번 아무도 모르게 다녀오거라. 그러나 네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절대 우리 집안에서 표나게 하면 안 된다. 아이구, 우리 며느리는 참 예쁘기도 해요.’ 이에 예수께서는 가장 서슬 퍼런 칼을 주십니다. ‘어서 싹 잘라 버려라!’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방해하는 폭력적인 줄이나 사랑 가득한 줄을 다 잘라버리라고 예수께서 검을 주셨습니다. 목숨을 걸고 잘라라. 그 줄을 계속 붙이고 있다면 저들이 지옥 갈 때 너도 덩달아 끌려가게 된다.
예수께서 검을 주신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뼈를 깎는 자기 부인이 있어야 참다운 기독교인이 됩니다. 이는 십자가의 길에 비유됩니다. 게으름이라는 혹을 싹 잘라 버립시다. 교만이라는 혹도 잘라 버립시다. 더러운 성질도 미련 없이 잘라 버립시다. 진짜로 기독교인들 중에 더러운 성질을 가진 분들이 좀 계신데, 이것 정말 타인에게 많은 불쾌감 줍니다. 더러운 성질 중에는 남을 의심하고, 남 없는 데서 헐뜯고, 꼬치꼬치 따지고, 은근히 보복하고, 업신여기고, 등등입니다. 이런 자신 안의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스스로 발견하기가 쉽지 않고, 스스로 인정하기도 쉽지 않으나 성령의 검에 의해 우리의 부족한 점들이 드러나고 쪼개지고, 잘라지게 됩니다. 이런 내적인 원수들에게 묶여 있던 줄을 잘라 낼 때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겠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 자신의 평화가 완전해지고 성숙해지고 그 성숙한 평화가 타인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이로 인한 내적인 평화가 있어야 그 평화가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평화가 됩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누구 앞에 서면 잔잔한 평화가 느껴지고, 어떤 사람 앞에 서면 괜히 불안해집니다. 차이는 강같이 평화를 내보내는 인품과 신앙이 있는가 하면 남의 평화를 잡아먹고 살아야 하는 인품과 신앙이 있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은 먼저 예수께서 주신 검으로 폭력의 줄과 사랑의 줄을 다 잘라버리고 종교적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자신 안의 마귀의 도구들을 다 잘라내어 깨끗하게 한 다음 성령님을 마음에 모셔 참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전한 영생을 확보하고 난 다음에 죽어가는 가족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독교의 진리의 줄로 붙잡아 매서 사망의 깊은 수렁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14:27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니,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네요. 그러면 그렇지요. 검이니, 가족끼리 원수니, 죽음이니 하는 이상한 말들은 예수님의 본심이 아니었네요. 예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가짜 평화라고 하십니다. 이 가짜 평화는 영원한 지옥에 가기 전에 잠깐 세상에서 누리는 평화이지요. 확실히 지옥에 던져질 것이 분명한 마귀들이 가짜 평화를 세상에 펼쳐놓아 기만전술을 펼쳐 미련하게 걸려든 사람들과 함께 지옥에 가려 하는군요. “네 맘껏 살아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거라. 예수 믿으려면 죽기 얼마 전에 믿는 게 가장 이익이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네 기독교를 포기해라. 그것 포기하고 돌부처 믿어도 결국은 극락에 가니 뭐 그게 그것 아니겠냐. 사람들 눈총 받으며 전도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런 평화가 최고이다.” 이런 평화가 바로 가짜 평화입니다. 평화의 왕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적인 평화는 주실 수 없다 하십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어떤 평화입니까?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적 평화의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버지를 여읜 장남으로서 하셔야 할 일이 있으셨으나 예수께서는 인생의 가장 황금시기인 30세 초반에 온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러 나서셨습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진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폭력의 줄을 끊으셨습니다.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당하셨고 끝내 그들의 폭력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그런 세상적 위협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줄도 끊으셨습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내적인 줄도 끊으셨습니다. 마귀가 달콤한 말로 예수께 속삭여 그분의 인성(人性)에 있는 허영심을 부추겼으나 이 줄 또한 과감히 끊으셨습니다. 예수의 평화는 이런 세 가지 줄을 다 끊고 나서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신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스런 지위(인류의 구세주)를 받고 나신 다음에 얻으신 평화입니다. 이 영광과 평화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면 나중에 저렇게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승리자가 갖는 평화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평화를 누립니다. 반대로 패한 자는 언제 목숨이 달아나나 안절부절못합니다. 예수께서는 최후 승리자이십니다. 천국문과 지옥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가 예수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최후 심판권이 예수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는 절대적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의 왕 예수께서 최후 심판석에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판결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스런 예수를 생각하면 우리는 잠시 이 세상이 주는 환란과 고통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화의 약속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날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가장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 순간에 제자들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불안에 휩싸여 있는 그 순간에 예수께서는 여러분에게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도 참되고도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십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평화의 왕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평화로우십니까? 그 평화가 진짜 평화인지 성경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불안하십니까? 평화의 왕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이미 참 평화를 누리고 계시다고요?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지셨군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여, 그렇다면 거짓평화에 안주하고 있는 많은 자들에게 참평화를 전해주십시오. 그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시오. 그들도 예수께서 주신 평화의 길을 가게 하세요.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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