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시4편) : 환난 중의 기쁨과 평화

stevision 2012. 11. 24. 09:47

(2007년 1월 27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환난 중의 기쁨과 평화
말씀: 시편4편

 

 

 

>>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

다윗의 시입니다. 그의 대적자들이 다윗을 집요하게 괴롭혀 다윗이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대적자들은 다윗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합니다. 곤란한 중에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너무 그 곤란이 심하여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입니다. 2절에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시는 말씀도 되고 다윗이 대적자들에게 하는 말도 됩니다. 진리의 대적자들은 하나님이나 다윗에게 다 적대적이거든요. 행동하는 방식도 같습니다. 거짓으로 상대방을 모함하지요. 대적자들은 다윗의 영광을 훼손시키려 했습니다. 그 구체적 방법은 거짓말(궤휼)을 지어 퍼트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그래? 다윗이 원래 그런 자였어?’ 하며 수군거립니다. 얼굴이 뜨끈뜨끈하여 밖에도 못 돌아다니게 된 다윗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 다윗이 뭔가 특출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섬긴 자였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마라’고 권고합니다. 이는 다윗이 죄를 지어도 사람들이 눈감아줄 자리에 있었는데도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물론 다윗이 죄를 지은 것이 있기는 하나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뿐입니다. 우리야 살해 사건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 외에 다윗은 죄를 범한 게 별로 없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으면 교만에 빠져 살 수도 있겠지만, 다윗은 죄를 지으며 살지 않았음에도 교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는? 다윗은 입이 닳도록 항상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이 다 듣는 앞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자는 진정 겸손한 자입니다. 그런 자는 많이 배웠어도 겸손하고 많이 가졌어도 겸손한 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인색한 자는 못 배웠어도 교만한 자이고 지지리 가난해도 교만한 자입니다. 다윗은 죄를 짓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였습니다. 물론 이런 다윗을 시기하며 눈꼴사납다는 듯 쳐다보는 자들도 있었겠지요. 선한 사람을 악한 인간 취급하는 자들이 겸손한 다윗을 교만한 자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한 때도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유 없이 타인을 악한 자라느니 교만하다느니 험담하고 돌아다니는 자들의 더럽고도 쓸데없는 말들을 다 기억하셨다가 최후 심판 때 하나 하나 다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다윗은 경건을 좋아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했지요.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요. 다윗은 입만 뻥끗하면 ‘선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눈으로는 눈물을 쏟아냈지만 입으로는 언제나 ‘좋은 하나님’이라 말했고 절대 하나님께 험악한 언사를 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경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직자를 존중했던 자였습니다. 이것도 참된 경건에 속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제사장들을 칼로 죽인 극악무도한 패륜을 저질렀지만, 다윗은 그러한 사울이 자신을 추격해 올 때 그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사울이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왕이므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라 말합니다. 아마도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사울을 죽이지 마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명령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에게 함부로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경건은 주의 선지자가 그의 죄를 책망할 때에도 드러납니다. 이는 우리가 다 아는 얘기입니다. 다윗의 경건은 그의 마지막 유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위를 물려받은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왕상2:3).” 죽는 마당에 자식에게 저런 유언을 했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다윗의 말을 믿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 출세한 이후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신앙의 경건을 생명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위인입니다.

다윗은 의로운 자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자였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의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을 요구합니다. 또한 의는 불의를 척결함을 요구합니다. 다윗의 선행은 먼저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임을 가르친 것과, 이스라엘에 건전한 하나님 종교가 뿌리박게 한 것에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선을 행하는 자는 의로운 자입니다. 물론 그러한 선은 절대선이신 하나님의 선에 대한 인간적 응답이지요. 비록 볼품 없는 선이지만 그래도 이것이 빠지면 안됩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도 배은망덕 한 적이 없습니다. 조그마한 호의도 잊지 않고 다 갚으려는 모습을 우리는 다윗에게서 봅니다. 그가 요나단의 아들에게 베푼 은혜가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재산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부랑자 신세로 다윗에게 온 자들을 다윗은 내쫓지 않고 받아들여서 그들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다윗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 많아서 다윗이 쉽사리 전(全)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선을 행하고 불쌍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진짜 의로운 자입니다. 이는 마음의 믿음만 갖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평화시에 불의한 살인을 저지른 자에게 다윗 자신에게 이로운 행동을 했더라도 형벌을 가했습니다. 이게 바로 다윗의 의입니다. 이게 바로 진짜 의로운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자의 죄를 덮어주려 하지만 다윗은 자기를 위해 불의한 칼을 든 자들에게도 준엄한 심판을 내렸습니다. 이 정도로 다윗이 의로운 행동을 했다면 그의 삶 전체가 의로운 삶이었다고 인정해 줘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건하고도 의로운 다윗이 대적자들에게 진정 하고싶은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사람들아, 내 걱정말고 당신들이나 똑바로 살아!’입니다. ‘이 사람들아, 죄를 안 지었어도 내가 당신들보다 더 안 지었고, 경건을 따지더라도 내가 자네들에게 꿀리는 것이 전혀 없고, 의로운 삶이야 너희들이 내 삶을 보면 몰라? 내가 불의하게 산 것이 있다면 어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봐! 그러니 쓸데없이 나에 대한 헛소문을 내서 내 명예에 똥칠하지 말거라. 너희들은 내가 고꾸라져 영원히 넘어지기를 바라지? 그래야 속이 시원하지? 꿈들 깨거라, 이 불의한 거짓말쟁이들아!’

다윗은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해줍니다. ‘이보시게 친구들, 이런 어려운 때일수록 죄를 범하지 맙시다. 우리가 이런 중에도 경건하게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이니, 결단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귀한 자들로 사용해 주실 것이오. 의로운 제사로 하나님께 경배드립시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읍시다. 의와 불의를 정확하게 가려서 판단하실 하나님을 믿읍시다. 불평대신 찬양을 드립시다. 불평대신 감사를 드립시다. 큰 소리내어 통곡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 드립시다. 조금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숨기셨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시고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오.’

하나님께서는 환난 중에 다윗에게 기도하려는 마음과 평안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의 환란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숨통을 트이게(너그럽게) 하셔서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도우십니다. 이거야말로 문제 해결의 서광입니다. 기도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작정하시고 계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시간과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간절히 기도할 마음이 있는 것은 더 큰 은혜이지요.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대개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그릇된 것을 놓고 기도 드리면 성령께서 즉시 감동을 주십니다. ‘그게 아니다. 너는 지금 잘못 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뜻에 합한 기도는 뜨거운 마음과 감격스런 마음 가운데 술술 나오게 됩니다. 남이 잘 되도록 매일 기도 드려보세요. 교회가 잘 되도록 매일 기도 드려보세요. 이 땅의 더러운 문화가 썩 물러나도록 기도를 드려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 시간이 뜨거운 감격에 휩싸여 평화와 기쁨이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100%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리시라니까요. 집안 문제와 같은 잡다한 것들은 이차적인 기도항목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새포도주가 풍성히 있을 때보다 더한 기쁨을 다윗에게 주십니다. 술(?)이 무엇입니까? 좋은 일 생겨 기분 좋아 마시고 힘든 일 있으면 그것을 잠시 잊으려 마시는 것 아닙니까? 많은 자들이 술기운에 의지하여 잠시 기쁨에 젖고 슬픔을 잊으려 하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차원 낮은 기쁨과 위안보다 더 나은 기쁨이 있습니다. 고등학생이 술 퍼마시고 담배 피우며 차원 낮은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평소에 선생님에게 모범생이라는 인상을 주어 선생님으로부터 ‘**야, 내 심부름 좀 해 주겠니?’라고 특별 부탁을 받으며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게 건강상으로 보나 장래 전망으로 보나 더 큰 기쁨이 아닙니까? 성도의 제일 큰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경건한 자로 인정받아 선택받은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면, ‘오냐, 뭐가 필요하냐. 말만해라. 즉시 이뤄주마’라는 응답을 듣는 자가 포도주가 주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맛보며 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름 받아 그분께서 맡겨주신 일을 하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마음에 담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셔서 특별히 이 사명을 맡기셨어. 오메 좋고도 기쁜 것!’ 다윗이 이러한 기쁨을 맛보며 살았습니다. 무명의 목동이었던 그가 특별히 하나님께 선택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감격에 젖어 살았습니다. 다윗의 샘솟는 기쁨은 그의 양심과 그의 행동이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런 자의 기도는 힘이 있고 확신에 차 있고 아직 응답되지 않았어도 이상하게 매일 기도할 때마다 샘솟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기도하고픈 마음이 서광이라면 기도 중의 기쁨은 밝은 해가 활짝 웃고 있어서 어둠이 완전히 물러난 경우가 되겠네요. 아름다움도 건강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암에 걸린 미인은 겉모습은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스스로에게 자신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이 건강해야 자신의 아름다움도 자신에게 현실로 다가옵니다. 식물도 건강이 넘쳐야 아름다운 꽃과 진한 향기를 냅니다. 혹자는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를 갖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더 힘이 넘치는 기쁨을 맛봅니다. 매일 하루종일 간음이나 강도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자가 있다고 합시다. 이 자가 저녁에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용서받는다고 합시다. 이런 자가 혹시 있다면, 이 자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는 받은 것인지 항상 의심하며 살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죄송한 것도 한두 번이지...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세상은 다윗에게 불안을 주려하지만 다윗은 그 불안을 접수하지 않고 걷어 차 버렸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몸과 정신에 백해무익한 세상이 주려하는 근심을 받아들입니까? 어리석은 짓이지요. 눈에 띄는 불안은 담배보다 더 해로운 것이니 절대 우리 안으로 들이지 맙시다. 때로는 위험을 앞두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차원 높은 덕에 속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덕을 쌓아 위협 앞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지전능하시고 우리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맘에 반만 차 있으면 두려움이 나머지 반을 채웁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우리 안에 꽉 차 있으면 세상이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역전된 것이지요. 마귀가 칼을 들고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꽉 채우고 잔잔한 미소를 지을 때 우리는 마귀에게 공포의 대상 그 자체입니다. 악인이 꾀를 내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준비했다가도 우리의 평화로운 미소를 보며 되레 자기가 공포에 휩싸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우리의 원수에게는 불안이고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의 기도 중에 마음에 평화가 넘쳐나면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의 증표입니다. 여러분, 기도 중에 평화로우십니까? 축하드립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공이나 출세도 은혜이고, 얻어도 은혜이고, 잃어도 은혜이고, 병이 나아 살아도 은혜이고, 일찍 천국에 가도(?) 은혜입니다.

여러분, 평소에 경건하게 사시고 의를 행하며 사십시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같은 믿음을 가졌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의를 행하는 자에게 더 큰 복을 주십니다. 자신의 위한 기도보다는 교회와 타인을 위한 기도에 더 힘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도 반드시 들어 주시고, 여러분께서 타인을 위해 드린 그 기도 내용 중에 타인의 이름 대신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반드시 그 내용대로 여러분에게 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기도 시간 전체의 9/10는 타인을 위해 하시고, 1/10은 자신을 위해 하십시오. 자비하시고, 긍휼이 넘치시고, 신실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이 의로운 삶이 되게 하시며 여러분께서 드리는 모든 기도를 때에 꼭 맞게 응답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