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14일 동아 시사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복음의 진리 English
말씀: 갈2:11-21
>>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이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님과 주인의 위치가 바뀐 상태를 말하지요. 사물의 경중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 정작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도 이 말에 해당됩니다. 여러분! 진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인간들이 자신들의 잣대로 진리를 규정하고 구원을 제한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겸손한 자에게 임합니다. 겸손한 자는 그 마음이 깨끗하여 백지(白紙)와 같습니다. 쉽게 지워지는 칠판과 같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써 준 것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안디옥 교회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입니다. 베드로(게바)가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유대교 풍습을 계속 지키며 예수님을 믿던 자들이 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얼른 그 자리를 뗬습니다. 또 베드로를 따라 다른 자들도 그 자리를 떴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대교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저런 더러운 인종들과 같은 자리를 갖는 것은 스스로를 더럽히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상에 꽉 찌든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도 계속 할례를 중시하고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금하며 독야청청 거룩함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유대교적 사상에 꽉 찌든 자들이 뭘 잘못 알고 하는 행동입니다. 이들은 정말 종이 주인행세를 하려는 추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들 자체를 거부하시거나 미워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상숭배하고 간음을 저지르고 도둑질을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벌을 내리신 적은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턱대고 이방인이라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시거나 거부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거룩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받고도 간음과 우상숭배와 살인과 도적질에 빠진 유대인들과 율법을 받지 못하고 그런 짓에 빠진 이방인들의 차이는 행위를 볼 때 오십보백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나서도 특출 나게 세계를 지배한 적이 없지요?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짓눌려 온갖 조공 다 바치며 살았습니다. 이 정도 되면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좀 겸손해져야 보기가 좋을 텐데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이 조공을 바쳤던 이방인들을 증오하고 기피합니다. 한참 잘못된 거지요.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갈라지게 되었습니까? 노아 가족을 제외한 온 인류가 홍수로 멸망당하고 노아는 셈, 함, 야벳 세 아들을 남깁니다. 둘째 아들 함이 잘못하여 그 자손이 셈 자손과 야벳 자손의 종의 종이 됩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9:26-28)” 함의 자손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 등을 자손으로 두게 됩니다(창10:15).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창12:1-3) 드디어 유대인의 시조(始祖)가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셈의 자손 중에는 앗수르(앗시리아)나 아람(시리아)도 있습니다(창10:22,23). 이들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했던 족속들이고 결코 이스라엘에게 꿀린 적이 없던 족속입니다. 또 따지고 보면 아브라함은 바로 아람 족속에 속했던 자입니다(창11:26-32, 신26: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창12:5-7).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큰 민족이 되었고 모세의 지도하에 가나안땅을 정복하여 함의 자손들을 진멸하거나 몰아내거나 종으로 삼았습니다(출13:5). 이렇게 해서 함이 받은 저주는 성취되었고, 야벳의 자손이 창대케 되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된다는 노아의 예언도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야벳의 자손을 포함한 온 인류에게 복을 내리심으로 성취되게 됩니다.
셈의 하나님이라는 노아의 선언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그 명맥이 유지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유대인들이 “우리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것이 얼마나 속 좁은 짓인지 알 수 있습니다. 셈족은 아브라함말고도 수없이 많은 자들이 있고, 아브라함은 이삭말고도 여러 자식들이 있었고, 이삭은 야곱말고도 에서라는 장자가 있었습니다. 또 서기 원년 경의 유대교의 중심인 유대인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의 자손들 중에 유다지파, 베냐민 지파, 레위지파 이들의 일부분 밖에 안되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셈의 하나님이라 한 것을 생각할 때 이는 오직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야웨 하나님 신앙을 그들이 존속시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여 식사도 같이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잘못돼도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그런 명령이 없음에도 일부 유대인 선생들이 그렇게 멋대로 전통을 세워놓고 하나님 말씀인양 가르쳤던 것이지요. 성경에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절차를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서도 이방인도 하나님을 믿어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주목해야 합니다. 노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성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셈의 하나님이라 선언하시고, 셈 족속에게 복을 내리시고 야벳 족속에게 셈 족속이 받은 큰 복을 나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께 죄를 지은 함의 자손을 제외한 온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이들의 자손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기만 하면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철의 장막은 즉시 철폐되는 것입니다. 또한 함의 자손 중 대부분이 셈의 자손인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전멸 당했으므로 이미 그들의 존재는 없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대신 함의 자손들이 살았던 죄악이 가득했던 가나안 땅에는 하나님께 복을 약속 받은 셈의 자손의 일부(아브라함의 자손)가 들어서서 사실상 하나님께 저주받을 족속은 더 이상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저주받기로 선언된 이방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지요. 또 함의 자손은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었지 결코 이방인으로 낙인찍힌 적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막은 하나님의 계획상 편의상 잠정적으로 쳐진 것이었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부 셈족(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당신 자신을 인간들에게 확실히 계시하시고, 그들을 통해 인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류는 종교적으로 세 번의 죗값을 치른 셈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통해 한 번, 함의 자손인 가나안 사람들의 진멸을 통해 한 번, 그리고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통해 한 번입니다. 이 세 번의 형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소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는지 한 번 벌을 내리시면 아예 싹 쓸어버리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그렇고 가나안인들의 진멸 때도 그랬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대리 책임을 물으셔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철저히 고난을 받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 말씀에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강조하며 베드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와 가나안인 진멸을 통해 인간의 죄에 대해 지엄한 심판을 내렸음에도 여전히 죄가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의 독생자를 통해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쓸어버리실 수단을 마련하셨습니다. 이제는 죄의 형벌로 인간을 쓸어버리시지 않으시고 유일한 의인(義人)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모든 죄를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유대교에서 죄를 용서받으려면 제사장을 중재인 삼아 죄에 해당하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제사장이나 여러 종교 규례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옛 헌법으로 현재의 헌법을 준수하고 사는 자들을 죄 있다 없다 말못합니다. 이제 유대인들조차도 새 헌법(새 복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러므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간격은 해소되었습니다. 이제 ‘셈과 야벳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성부 하나님’이라는 호칭만 유효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자유인)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예수 안에서 하나니라(갈3:2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들의 빛이 되셨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0-32).” 구세주 예수께서 유대인이시므로 이스라엘에게 큰 영광이고,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빛이시고 진리의 빛이십니다. 이제는 유대인의 특권이 사라졌습니다. 유대인의 특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고 하나님을 독점적으로 섬겼다는 것인데, 이제 그 율법이 유효기한이 다 지났고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고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과거 유대인의 표지(標識)였던 할례 따위로 이방인들 앞에서 뻐기는 행위는 휴대폰 시대에 (연기를 피우는) 봉화를 갖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이방인이 더럽다고 식사도 함께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잠시 집나갔던 친동생을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비정한 짓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때까지 유대인이 갖고 있던 특권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뿐이었고, 그 나머지 세상적 복은 이방인들이 다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셨으니 유대인들이 내세울 게 별로 없지요. 특권? 무슨 특권? 형제와 같은 자리에서 식사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자신의 좁은 속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짓이지요. 새 복음은 육체적 이방인을 진짜 유대인으로 선언하기도 하고 육체적 유대인을 진짜 이방인으로 선언하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인 새 유대인의 기준은 자신의 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출신성분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셋째, 그러므로 유대교의 율법의 형식적 요소는 제거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은 신약의 예표입니다. 신약에서 인간의 의와 구원 문제 해결책이 확연히 드러났으니 구약의 모든 말씀은 신약의 빛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할례나 제사와 같은 형식적 요소는 중요한 것이 못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인종적 요소도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이제 유대교의 형식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새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는 행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교의 형식에 갇혀 계실 수 없으시고, 헌 부대로 새 술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형식은 새 복음의 진리를 담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자들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유대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보다는 그분의 지엄한 심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유대교의 헌 부대를 다시는 사용하지 말라고 그렇게 아예 찢어버리신 것입니다.
넷째, 새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핵심입니다. 아무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호의와 은혜를 즐겨 베푸시지 심판과 저주를 즐겨 발하시겠습니까? 정작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가까이 섬기면서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 봤습니다. 자기네들 같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게 아니지요.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들의 피비린내 나는 제물에 만족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먼저 인간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인간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지엄한 재판관이 되시기보다는 인자하신 아버지가 되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의 핵심입니다. 여기에 맞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매사에 우리는 주인행세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도 우리들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십니다. 건축헌금 좀 많이 했다고 너무 주인행세 하지 마십시오. 그 교회 오래 다녔다고 주인행세 하지 마십시오. 꾀꼬리 목소리 가졌다고 성가대 주인 행세하지 마십시오. 박사학위 땄다고 주인행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받은 것이 많을수록 타인보다 먼저 더욱 겸손해져서 오직 하나님만 높임을 받으시고, 그분의 뜻만 이뤄지게 하십시오. 교회 처음 나오는 자들이나 다른 교회에서 이적해온 자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여러분이 잘 돌봐줘야 할 친형제들이니 각별히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십시오. 특히 높은 직책에 있는 평신도 분들은 담임 목사님의 뜻을 꺾음으로써 교회의 터주대감 노릇하지 마시고 교회의 모든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초석이 됨으로써 실질적 주인 노릇을 하십시오. 복음적으로 은혜롭게 주인노릇 하는 거야 누가 말립니까? 베드로가 이상한 방향으로 교회 주인노릇 하려 하자 성령의 사람 바울이 이를 엄히 꾸짖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책망받지 않고 칭찬받는 주인이 되십시오. 성령의 사람, 겸손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새 복음의 진리를 바로 깨달아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순종하여 교회의 기둥 같은 자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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