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눅23:39-43) : 조건 없는 사랑

stevision 2012. 11. 25. 13:51

 

(2007년 4월 4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조건 없는 사랑                                                 English
말씀: 눅23:39-43

  

 

>>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사람의 가치를 그 자의 인격에서 찾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한 정도나 물질적 가치에서 찾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바로 여기에 속하는 자입니다. 왜 예수께서 처음부터 가룟 유다를 쫓아버리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선한 목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악한 자임을 알고 계셨으나 유다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스승으로 인정하며 다가오니 예수께서는 전혀 개선의 가망성이 없는 자의 가망성을 고려하여 선한 선생님 자격으로 유다를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예수께서 유다를 쫓아내셨다면 많은 자들이 예수님께서 과연 자비로우신 구세주이신지 의심했을 것이고, 마귀는 이를 노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잘 가르쳐 바른 사람으로 만들어야 좋은 선생이요 구세주가 아닌가?’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다른 자들의 신뢰를 얻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의 희생이 뻔했지만 유다를 맞이하여 사도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유다가 구체적으로 배신을 하기도 전에 예수께서 먼저 그를 쫓아내셨다면 마귀가 ‘당신은 선한 목자요 인류의 구세주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역공을 펼쳤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택함을 받은 다른 자들의 선한 목자가 되시기 위해 마귀의 도구 유다에게 시종일관 선한 목자가 되어주셨던 것이고, 그에게 배신당해 십자가까지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믿었던 자에게 배신을 당해 괴로움을 겪고 계신 주님의 종이 계십니까? 여러분께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정말 좋은 목자이십니다. 먼저 타인에게 배신을 당할지언정 자기가 먼저 그 자를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선한 목자의 태도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서 왕이 되시면 예수님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좌의정이나 우의정 정도로 삼아달라는 말이지요. 요즘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출세하고 높아지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누구나 다 이 땅에서 성공하며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원하여 십자가를 질 자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요즘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기나 합니까? 요즘처럼 신앙생활 하기 좋은 때가 어디 있었습니까? 네로 같은 폭군도 없고 기근이 심하여 굶어죽을 염려도 없습니다. 요즘 살기가 너무 좋아져서 ‘주여, 이 잔을 제가 들어야 합니까?’라고 기도드릴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 출세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기도 시간의 많은 부분을 거기에 쏟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해 순교한 우리의 조상들을 생각할 때 지금 우리에게 임한 풍요가 거저 얻은 풍요는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복이지요. 또한 우리나라가 세계 각국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복음화를 감당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성직에 들어서는 자들도 교회 개척하여 크게 부흥시켜 떵떵거리며 살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런 소망도 귀한 것이지요. 주여, 주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민국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서만 감사와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아주시옵소서! 아멘.

오늘 성경말씀에 보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던 한 강도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빈정거리며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 자의 믿음은 ‘내가 이 땅에서 반드시 승리하지 못하면 이는 다 예수님 탓이다’라고 주장하는 자의 믿음입니다. 파산한 내 사업장을 다시 회복시켜주시지 않으면 예수님은 나쁜 분이오 라고 주장하는 자들, 이 번 승진 시험에 합격하게 안 해주시면 예수님은 나쁜 분이오 라고 주장하는 자들, 내 아들 명문대에 불합격했으니 예수님은 무책임하고도 나쁜 분이오 라고 항의하는 자들, 이런 교통사고 당하도록 방치하신 예수님은 정말 무책임하고 나쁜 분이오 라고 항의하는 자들이 다 이 강도의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자신의 실수와 죄와 불행을 예수님께 뒤집어씌우며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자들의 불평에 예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네 믿음의 수준이 그것 밖에 안되니?’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혹시 세상일에 실패하셨다면 자신의 과오가 없는지 먼저 반성하시고,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을 힘입어 다시 일어설 궁리를 하십시오. 십자가형을 받는 강도가 예수께 한 무례한 말이 귀에 거슬리지요?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게 올바른 믿음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다른 행악자는 참으로 올바른 말을 합니다. 이 자는 먼저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복받을 믿음입니다. 자신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께 용서와 긍휼을 받을 자격을 얻습니다. 죄 진 게 뻔한 데도 곧 죽어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면 이 자는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못 받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라는 신호를 주십니다. 죄를 담아 둔 채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교제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님께 ‘제가 지은 죄를 생각나게 해 주시어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를 드려 마음에 떠오르는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즉시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고 우리는 자유함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죄가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하나님, 제가 모르고 지은 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은 죄를 씻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깨끗한 그릇이 됩니다. 죄를 용서받지 않은 채 하나님의 복을 달라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한 이 행악자는 예수께서 죄가 없으신 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예수님)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저는 이 자의 이러한 고백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무죄한 것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입으로 이미 선언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법적으로, 혹은 학식과 인품이 출중하고 건전한 삶을 누린 자들의 판단에 의해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로부터 죄가 없다는 판단을 받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돈 많은 자가 아무리 세상 법정에서 죄가 없다고 판결을 받고 사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고 살고 있더라도 그 자의 동네에 같이 살고 있는 살인 강도짓을 저지른 자에게 그 자는 ‘의로운 인간’이라 평가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사는 자들이 죄짓고 싶어서 죄를 지었겠습니까? 누구는 의로운 사람이 되기 싫어서 도둑질과 강도짓을 한답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그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게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해 지옥으로 직행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행악자의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예수께서 정말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정확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는 극악한 죄인으로부터도 의로우신 분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물론 양심이 흐려진 다른 행악자는 그런 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예수의 말씀은 “(바른 믿음을 고백한) ‘네(너희가 아님)’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였습니다. 천국은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쿠폰 모아 덤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고백한 이 행악자는 생을 마감하며 참으로 가치 있는 말을 합니다. 이 행악자가 정말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의 부활을 믿고, 그분의 영원한 왕적 통치를 믿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자가 자신의 부활을 정말 믿고 있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활과 최후 심판을 믿었다면 나쁜 짓을 해서 십자가형을 당했겠습니까? 그러나 이 강도는 예수님의 선한 인품을 알고 있었으며, 그분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러 이곳 저곳 돌아다니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신정국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아마 이 강도의 이해 수준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건설을 위해 일하시다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받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자는 참으로 선한 의인 예수께서 허무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을 보며 예수님을 위로하며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 강도는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이 강도는 이제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있었으므로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미래의 복을 약속받을 처지도 못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선한 분임을 알고 있었던 이 강도는 평소의 예수님의 주장에 걸맞게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하며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제가 볼 때 이 말은 죽음 후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얻어내려는 의도보다는 선하신 예수님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저자처럼 사심없이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고 사랑하십니까? 혹시 천국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에 예수님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겠다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목적이 죽음 후의 부활과 영원한 천국은 아니었습니까? 죽은 후에 천국에서 누릴 복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예수님보다도 복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조건적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주는 자들은 조그만 시험이 닥쳐도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인정하고, 그분의 십자가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내린 평가입니다. 세상적 복을 마음에 그리며, 천국을 마음에 그리며 어떻게 예수님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바로 직전인데도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다른 강도는 “끝까지 헛소리 해대는군!”이라고 말했을 것 같고, 예수님으로부터 낙원약속을 받은 그 강도는 흔쾌히 믿어주는 말을 해줬을 것 같습니다. 그 자의 본심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자는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해줬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마 속으로는 ‘예수님, 그 말씀에 확신은 안가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제가 죽은 다음에 정말 낙원에 가 산다면 참 좋겠지요. 이 세상은 정말 살기 힘들었습니다’라고 했겠지요.

여러분, 왜 그 강도가 죽기 바로 직전에 구원받은 줄 아십니까?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 고통을 당하는 순간에 세상은 다 그분을 버렸지만 그 강도만큼은 그분을 ‘선한 사람’으로 인정해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은 그분의 부활 그 이후였습니다. 그분의 부활과 함께 그분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영생도 사람들에게 사실적인 믿음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거지요.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믿음이 뭔지 아십니까? ‘예수께서 참 좋은 분이시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귀한 믿음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천국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지금 우리는 저 강도처럼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허용하시는 모든 십자가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는 자는 그나마 순수한 사랑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예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되다 하셨는데, 이는 순수한 사랑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복이 안 보여도 예수께서 선한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강도의 진짜 믿음이 뭔지 다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입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입으로 하는 신앙고백은 마음의 의지가 담겨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믿음이라 인정받게 됩니다. 입으로 하는 고백은 다른 자들도 다 듣거든요. 그래서 다른 강도로부터 “야, 이 정신나간 인간아, 저 자의 말을 정말 믿냐?”라는 말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말은 책임이 따르는 것이고 책임이 따르는 말을 하나님께서 진짜 믿음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강도가 “예수께서 왕으로 등극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한 말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 날이 바로 ‘오늘’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시는 때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공중권세를 잡고 세상에서 왕노릇 하던 마귀가 영원히 결박당했습니다. 이제 죄와 사망의 권세는 다 물러나고 예수의 의와 생명의 권세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강도에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낙원은 조건없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강도는 낙원을 달라고 조른 적이 없었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인정해준 그 강도에게 낙원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조그마한 믿음을 가져도 예수께서는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선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낙원은 그분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낙원은 귀하신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삶도 예수께서 함께 거하셔야 낙원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선하신 분으로 고백하여 죄를 용서받고 낙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