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 English
말씀: 롬9:14-24
>>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네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 ... <<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에 대해 알려다가는 항상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에 관한 문제가 그렇습니다. 물론 자신의 지혜를 의존하지 않는 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거짓이 아닌 진리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른 분이시니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삼위일체로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옳은 태도인가?
영생과 영벌 문제도 인간의 지혜와 상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사후의 보상문제에 대한 인간의 지혜에 의한 판단은 무엇입니까? 보통 인간들의 마음은 영원한 천국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영원한 지옥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은 자들은 무조건 구원을 받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얼마간 지옥 비슷한 곳에서 죗값을 치르고 영생에 동참할 것이라 혹자는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께서 죗값을 치른 자들의 존재 그 자체를 아예 없애셔서 더 이상 그 자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비기독교인들의 악행에 깊은 분노를 느끼며 그들을 규탄하는 저 자신도 제발 그런 식으로 사후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 안 하셨습니다. “거기(지옥)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느니라(막9:48).”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그러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짧은 생을 살며 죄를 지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지옥 불구덩이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닌가?’ 솔직히 저도 이 문제에 대해서 뾰족한 그러면서도 속시원한 답변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택하시는 과정은 더 이해하기 힘듭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를 일방적으로 미리 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에게는 예수님 믿는 마음도 주시고 죄를 회개하는 마음도 주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옛날의 바로와 같이 버림받기로 되어 있는 자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어 하나님과 구원받은 자들을 대적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아울러 바울은 사람들이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에게 강퍅한 마음을 주시면서 왜 그들을 또 죄지었다고 벌을 주시나?’라고 하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냐? 천한 그릇으로 지음받은 네가 감히 너를 지으신 그분께 왈가왈부 할 처지냐?’라는 대답을 줍니다.
여러분, 바울의 이 말을 인간적 감정을 가지고 판단해봅시다. 바울은 이 말을 통해 먼저 실컷 제멋대로 죄짓고 있는 자들이 뭔 할말이 그렇게 많냐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죄짓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들이 영벌을 받을 자들이 불쌍해서 하나님께 조심스런 마음으로 그런 질문을 했다면 좀 봐줄 수도 있지만,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다 짓고 있는 인간들이 “그래 나 죄인이다. 나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간이란 말이다. 그래서 나 이 모양으로 산다. 그러나 이 모든 죄는 내 책임이 아니다. 왜냐하면 난 버림받아 원래 그렇게 살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의 머리에 하나님을 모독한 죄 하나를 더 쌓고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개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 않고도 주인께 충성하며 착하게 잘만 살더라! 여러분, 혹시 하나님과 인간에게 죄를 지었다면 구차한 변명 늘어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눈물 흘리며 깊이 회개해야지 ‘내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당하는 것이 너무 부당하다’라고 반항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회개를 거부하고 미래의 지옥형벌의 부당함만을 강조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너희들은 천한 그릇이다”라고 모욕을 줍니다. 이 말은 정당한 모욕입니다. 악인들은 인간을 만드신 선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 멋대로 산 자들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지으신 선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런 삶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귀하신 하나님을 귀하신 분으로 알고 모시지 않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원래는 귀한 인간들이지만) 똥을 담아두는 천한 그릇이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으로 옳습니다. 그런 죄인들에게 ‘너희들은 똥그릇이다’라고 말해주는 것보다 귀하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지 않는 것 자체가 훨씬 더 큰 모욕입니다. 선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온갖 재능과 힘을 부여받고도 악하게 산 자들은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심히 모욕한 죄인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은 칭찬의 말과 질책의 말이 되네요.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에 소중히 담아 그 말씀에 순종하며 의인의 길을 가는 자들은 누가 봐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귀한 그릇입니다. 그 마음 안에는 사랑, 자비, 충성, 온유, 정결함, 감사, 찬송이 가득 차 있군요. 그 마음에 하나님의 귀한 성품이 가득 차 있군요. 반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짓밟고, 타인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대신 마귀가 주는 온갖 더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두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는 자는 누가 봐도 천한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릇이긴 한데 온갖 더러운 것들을 가득 담고 있으니 천한 그릇이 되었군요.
종교적 입장에서 영생과 영벌 문제를 살펴봅시다.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자들을 뽑는 과정을 죽은 이후에도 지속하게 정해놓으면 이 땅에서의 삶이 진지한 삶이 못됩니다. 죽고 나면 모든 상황이 다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을 인간들이 없지요. 따라서 영생은 이 땅에서 살 동안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 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법입니다. 죽고 나서도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기독교가 가르치면 이 땅 정말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조차도 분명 제멋대로 대충 신앙생활 할 겁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또 죽은 다음의 지옥의 형벌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분명 그러한 가르침은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을 느슨하게 만들고 이와 관련된 온갖 불필요한 교리가 더덕더덕 붙게 될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교리는 영생과 영벌이라는 교리 하나로 족합니다. 이에서 좌나 우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것이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에 지대한 악영향을 주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은 이 땅에서의 삶에 근거하여 결정되고 사후에는 천국에서의 영생과 지옥에서의 영벌만 있을 뿐이다라고 정한 교리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유익한 교리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단입니다. 신앙생활에 불필요하고도 해로운 주장이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에게 ‘당신은 내가 보니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 같으니 쓸데없이 그렇게 착하게 살지 말고 당신 맘대로 사시오. 어차피 당신 지옥에 갈 거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그러면 또 고의로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자에게 ‘내가 보니 당신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하나님, 성경, 사도 바울은 다같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인간들의 열매를 보고 너는 귀한 그릇이다 혹은 너는 천한 그릇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극과 극을 경험했던 자였습니다. 시몬(베드로)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베드로(반석)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지극히 영광스런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게 뭔 말씀이십니까? 절대 그러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베드로에게 지극히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눈앞에 지금 보이는 행위에 따라 내리신 판결입니까? 사탄은 바울이 말한 천한 그릇보다 훨씬 더 모욕적인 말입니다!
물론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겉으로 보아 알 수는 없으나 분명 하나님께서 정하신 택함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를 외적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제가 단언컨대 평생 예수님을 믿지 않고 악행만 일삼은 자들이 천국에 갈 가능성은 제로(0)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 부름받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죄 가운데 천한 그릇처럼 사는 자들 중에 나중에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부름받아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살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누가 깨끗한 그릇인지 누가 천한 그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나마 가장 안전한 판단은 현재 그 자가 맺는 삶의 열매에 따라 천한 그릇인지 귀한 그릇인지를 결정할 때 가능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 중에 제일 중요한 말씀은 바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14절)”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택하셔서 은혜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은 전혀 불의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정말로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애굽의 바로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인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착취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하셔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게 대적하게 하시어 그에게 적당한 보복을 가하시는 것은 절대 불의한 일이 아닙니다. 안 그렇습니까? 바로와 그의 군대가 전에 이스라엘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것을 생각할 때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보복을 당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천국에서의 영생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처사입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들에게 지옥에서의 영벌이 정당한 형벌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이라면 정당하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의하고 불공평한 분으로 믿고 있는 자가 어떻게 영원히 그분과 함께 복된 천국에서 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믿는 게 공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짜 죄인임에도 우리를 ‘의인(義人)’으로 인정해주셨거든요. 하물며 죄인을 벌하시겠다는 하나님을 우리가 불의한 분이라고 오해하면 됩니까? 그분을 불의한 분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건방진 생각입니까? 이 말은 원래는 그분께서 불공평하신 분이신데 우리가 그분을 공평하신 분으로 믿어줘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불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해가 좀 안되더라도 무조건 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욱 더 무조건 사랑해 주실 겁니다. 또 기회가 되면 그런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어 여러 의문점들에 깨달음을 주실 것입니다. 사실 죄인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벌을 받는다는 것이 제 신앙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거든요.
여러분 모두가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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