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눅13:10-17) : 복된 안식일

stevision 2012. 11. 26. 17:17

 

(2007년 5월 23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복된 안식일                                                   English
말씀: 눅13:10-17

 

 

 >>10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 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시니라. <<

예전에 어느 교회 청년부에서 선교단체에 속한 찬양단을 초청하였습니다. 그 찬양단이 복음성가 위주로 찬양을 불렀는데 그 교회 성도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나서 담임 목사께서 한 말씀 하셨는데, “요즘 찬양은 세속화되어서 째즈풍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은혜로운 찬양을 주로 불러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찬양대 가수들이 아직도 무대에 서 있는데 그렇게 공개적으로 찬양단원들에게 망신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전에 어떤 장로교 계통의 신학대학 예배에 참석해 본 적이 있는데, 설교자가 약간 좀 가벼운 단어를 사용하여 설교를 하자 갑자기 그 예배에 참석하고 있던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당신 설교를 뭐 그 따위로 하는 거야?”라고 고함치며 예배 중에 설교자를 꾸짖는 거였습니다. 감리교(?) 신자였던 저는 그야말로 아연실색을 했습니다. 설교자가 뭐 그렇게 지나친 단어를 쓴 것도 아닌데 보수(?)주의 교단에 속한 그 자가 거룩한 예배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지 그런 소란을 피운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정통보수가 바로 저런 거구나!’ 하지만 이 두 예가 바로 거룩을 구실로 거룩을 파괴한 경우입니다. 찬양단 단원들이 기도로 준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드렸는데 찬양이 아니고 ‘째즈’라고요? 거룩한 예배 시간에 청중이 큰 소리를 쳐서 예배를 망쳐놓는 게 참된 보수입니까?

여러분! 기독교인이라면 제발 좀 건전한 인격을 갖추십시오. 건전한 인격은 남을 귀히 보고 남이 하는 일을 귀히 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을 귀히 보시고 목사님께서 하시는 일을 귀히 보시기 바랍니다. 담임 목회자도 부목사나 전도사나 성도들을 귀히 보셔야 하고 그분들이 하시는 일을 귀히 보셔야 합니다. 당신이 쓸데없이 화내고, 인상 찌푸리고, 못마땅해 하고, 퇴짜를 자주 놓으면 당신 때문에 하나님만 욕얻어 먹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대리자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헌신을 당신의 변덕스런 기분이 가미된 경솔한 말로 더럽혀 헌신한 자와 하나님 둘 다 기분 망치게 합니까? 왜 하나님께 헌신한 자와 하나님 사이를 그렇게 이간질합니까? 또 당신 스스로도 완전하지 못하면서 왜 그렇게 완전한 것을 바랍니까?

오늘 성경 말씀의 회당장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안식일에 설교를 마치시고 1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한 여인을 안수하시어 고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기쁘셨고, 그 여인도 기뻤고 성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놀라 자빠지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왜냐고요? 자기는 자기 회당에 매주 예배드리러 참석하는 18년 동안 고생한 그 여인을 고치지 못했는데, 그 날 자기 회당에 객으로 오신 예수께서 설교하신 다음에 기적을 행하셨거든요. 한 마디로 자기 자존심이 구겨졌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회당장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부당하게 안식일 규례를 들어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여러분, 남을 비방하고 꾸짖기 전에 혹시 여러분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동기가 없는지 먼저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또 그런 나쁜 동기가 없더라도 자신의 개인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 양 착각하여 개인생각을 근거로 타인을 비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참된 권위가 뭔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남이 행한 선행을 깔아뭉갬으로 자신을 높이려 하는 자는 비열한 자입니다. 참된 권위란 남이 이룩한 선하고도 위대한 업적을 인정해주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데 있습니다. 미술의 권위자는 좋은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의 가치를 인정하고 좋게 보며 기뻐합니다. 성도들이 기도 가운데 성령의 지혜와 힘을 입어 이룩한 모든 일은 무한한 가치를 가집니다. 모든 성령의 사역은 아름답고도 가치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권위자는 어린 아이의 어눌한 찬양이라도 높게 평가합니다. 물론 남의 가치와 헌신을 인정할 때에 자존심은 좀 상하겠지요. 그러나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할 때 자존심 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위대한 업적을 이룬 자도 자랑할 이유가 없지요.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자가 뭔가 업적을 이뤄놓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타인이 나보다 더 능력이 많다고 생각될 때 자존심 상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의 회당장은 모두가 다 기뻐하는 그 때에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든 자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릇된 태도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의 귀중한 본이 됩니다. 그는 구세주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올바로 소개했습니다. “이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 될 자격도 없는 자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또한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신랑이신 예수께서 신부인 성도들을 취하시는 것을 보며 기뻐한 자였습니다(요3:29).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쓸데없이 회당장의 천박한 권위를 휘두르지 말고 세례 요한의 겸손한 권위를 본받아야 합니다. 요한의 신앙인격이 그 정도였기 때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 드리고 그분 앞에 진정 겸손한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안식일은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신 데에서 그 기원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날입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창조주 기념일인 셈입니다. 기념일은 그 기념일의 주인을 위한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만을 위한 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우리 각 개인이 사사로이 자신들의 영리를 추구하거나 사사로운 재미를 맛보기 위한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엄히 금하십니다. 안식일은 온 피조물이 창조주를 생각하며 예배드리고 감사 드리며 찬양 드리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은 이 안식일의 분위기를 깨면 안됩니다. 생일 파티를 열고 있는데 갑자기 파티 참석자가 혼자 따로 놀려고 하면 파티 분위기 다 깨는 것이고, 이는 그 날 생일 맞은 친구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은 인간과 가축과 모든 짐승들이 다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날입니다. 그 날에 어느 한 개인이 자기 밭에 나가서 일을 하면 이는 우주적 안식일의 분위기를 깨는 것이고, 이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6일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일하는 분위기를 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일하는 것을 손수 도우십니다. 햇빛과 바람과 비를 주시어 인간들이 먹고살게 잘 돌봐주십니다. 그러나 제 7일은 안식일로 정하셔서 그 날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분위기 깨지 마라. 네 사사로운 일을 하지 마라!”고 엄명하십니다. 여러분, 주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특히 평소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사는 자는 안식일을 잘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은 쉼과 회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남종이나 여종이나 가축들까지도 다 쉬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생명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다정다감한 배려입니다. 물건을 만들어 놓으면 다가 아닙니다. 고장나면 고쳐 써야 합니다. 아이도 낳아 놓기만 하면 다가 아닙니다. 보살펴주며 양육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책임 있는 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의 위치에 있는 종들이나 일하는 가축들이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는 쉬도록 법을 만드셨습니다. 곤한 몸을 쉬게 하여 새 힘을 얻고, 병든 몸이 치료받아 새 삶을 살도록 배려하신 것이지요. 안식일이 있기 때문에 종이나 가축들은 소망을 잃지 않고 삽니다. ‘안식일에는 푹 쉬자.’ 이 소망 때문에 그들은 꾹 참고 고된 일을 합니다. 안식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을 치료하십니다. 이게 바로 안식일 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생명충전(生命充塡)은 안식일에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가축을 이끌어 내서 물을 먹이는 것은 마땅히 안식일에 해야 할 일입니다. 생명충전 하는 일이니 그렇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안식일 날에 1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한 여인을 치료하신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수고하고 짐진 자들이 주일(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능력을 충전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6일간 일하며 소진한 생명을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께서 다시금 꽉 채워주십니다. 따라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나 병을 치료하는 일은 안식일이라고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안식일은 복받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사로운 일을 하지 않고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자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그 이유는 같은 기독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을 자주 범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같은 기독교인이나 세상 사람들이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니라 생각하고, 개인의 능력이나 다른 우상으로 인해 사람이 복을 받게 된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신다는 것을 만천하에 다 알게 하시려 안식일을 준수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복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같은 기독교인이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는 증거는 7일 중에 하루 일 안하고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안식일을 지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라 그들에게 당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큰 복을 받고싶은 자들 다 손들어’라고 말씀하시면 여러분은 두말 않고 손을 드실 거지요? 복을 받기 원하여 그 손을 드는 행위가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자녀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며 복을 받는 우리들을 보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어 그들도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여러분, 가장 확실한 전도방법은 여러분께서 안식일을 잘 지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복도 받고 전도도 하는 방법을 알려드렸는데 이 비법을 한 귀로 듣고 그냥 흘려버리면 안되지요.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사56:2).”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찌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하였느니라(겔20:20).”

예수께서는 좋은 분위기 다 망치는 자들에게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십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위선자는 나쁜 짓을 자신은 행하면서 타인은 해서는 안 된다고 하거나 선한 일을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는 하라는 자입니다. 또는 자신이 하는 선행을 타인이 하지 못하게 막는 자가 위선자입니다. 자신들은 안식일에 동물들을 돌보면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나님의 자녀를 돌보면 안 된다는 자들이 바로 위선자들입니다. 물론 이 두 일이 완전히 동일한 일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둘 다 안식일에 몸을 움직이는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네들이 움직인 것은 괜찮고 다른 자가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거지요. 옆의 개척교회 목회자가 굶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이 자기 교회 교인수를 늘려 호강하겠다는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불쌍한 이웃 못 본 척 하지 맙시다’라고 거룩한 설교를 한다면 분명 위선자이지요. 교인 양보하기 힘들면 그 불쌍한 목회자의 생활비라도 좀 대주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제발 좀 힘이 닿는 대로 궁핍하게 사시는 목회자들을 돕고, 비정하게 혼자만 잘 살려고 하지 마시오. 예수님 앞에 같은 목회자가 아닙니까? 위선자는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려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자입니다. 위선자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구하는 자입니다. 위선자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의인을 공격하는 자입니다. 결정적으로 위선자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성경은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고 합니다. 대개 보면 위선자는 목소리가 큽니다. 꽹과리처럼. 결국 남의 일이라 생각하니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 식구가 18년 동안 병을 앓다 안식일에 예수님 덕분에 치료받았다고 해보십시오. 이 자는 평소에는 위선자였을지라도 그 상황에서는 위선자가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는 위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불쌍한 죄인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시고 성부 하나님 앞에서 그 죄 문제를 해결하려 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양털 깎는 자 앞에선 양같이, 도살장에 끌려온 소같이 우리의 구세주 예수께서는 묵묵히 우리의 죗값을 감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을 기뻐하십시오. 이 날에 여러분은 병고침 받고 회복되어 새 힘을 받아 살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 뵙고 복을 받게 됩니다. 안식일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안수하시어 여러분을 치료해주시고 여러분에게 한량없는 복을 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