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시26편) : 내 생명을 보존하소서

stevision 2012. 11. 27. 09:36

2007년 6월 23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내 생명을 보존하소서                                       English
말씀: 시26편

  

 

>> 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 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7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인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8 여호와여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12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

히스기야 왕이 병에 걸렸을 때 주의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당신 죽을병에 걸렸으니 세상 하직할 준비나 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 왕이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드립니다. 내용은 오늘 시편 말씀과 거의 동일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왕하20:3).” 이 때 히스기야는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이사야에게 임했습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다라고 해라(왕하20:5-6).”

살다보면 원하지도 않는 병이 닥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그런 불청객이 또 있을까요? 특히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분들이나 불치병에 걸린 분들은 세상 살맛 나지 않을 겁니다. 질병이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앗아갑니다. 질병이 희망을 앗아가면 오늘 내가 힘들여 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다가오고, 그리하여 기쁨이 사라지고 짜증만 날 뿐이지요. 특별히 오랜 기간 성실한 삶을 살아왔는데 이제 뭔가 업적을 이룬 것 같고, 열매를 조금 거둘 것도 같은데 병이라는 불청객이 들이닥치면 기분 정말 나쁘겠네요. 그런 상황에서 쉽게 하나님께 감사가 나오는 자가 있을까요?

오늘 시편 26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9절).” 다윗이 보기에 죄인과 살인자들에게 질병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아무 때나 닥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께 이의 제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비롯한 의인들이 세상의 죄인들과 똑같이 취급받아 질병과 죽음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다윗은 방관만 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원망은 하지 않았지만 하소연은 맘껏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의성 하소연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자신의 깨끗한 삶을 하나님께 제시합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였고(1절).”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3절).”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6절).” 물론 이런 기도는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없이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자가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 중에 요절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때론 건강하게 장수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일부분일진대 모든 행악자들의 자리를 피하고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노력한 자들이 하나님께 생명과 건강의 은혜를 구하는 게 조금도 흠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다윗은 제발 자기 좀 살펴 보아주십사 기도드립니다.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1절).” 이 말씀은 제발 저를 좀 살펴주셔서 ‘예쁜 구석’이 있는지 평가 좀 해달라는 말입니다. 악인보다 훨씬 예쁜 짓을 하는 자에게 굳이 그렇게 악인과 똑같은 대우를 하실 필요가 있으시냐는 거지요. 여러분! 여러분의 작은 선행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흠없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듭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삶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눈으로 보시게 만듭니다. 특히 여러분이 주의하실 일은 악인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악인들 전체에게 벼락(?)을 내리실 때 그 안에 있는 여러분만 착하다고 특별히 그 벼락이 비껴가게 안 하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깨끗한 자가 되려면 악인들의 친구가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극히 싫어하시는 자들의 무리에 낄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그분께 기쁨을 주는 여러분을 행악자들과 똑같이 대하셔서 여러분을 슬프게 하셔서 찬송 소리가 줄어들게 하시겠습니까? 오히려 다른 악인들이 다 넘어져 쓰러질 때에 여러분을 특별히 보호하시고 구하셔서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8절).”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켜 완전한 자로 살았습니다. 다윗은 눈에 안 보이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그분께서 계신 곳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을 다 드렸으니 마땅히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는 자들의 병과 죽음이 행악자들의 병이나 죽음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능히 주실 수 있는 것을 달라고 할 자격이 있습니다. 천억 원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계신데도 사업하다 잠시 자금이 부족한데도 혼자 속상해하며 안타까워만 하고 아버지께 일절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도 ‘불효’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아버지를 천하의 구두쇠로 낙인찍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너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길래 내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거냐?” 여러분, 사랑하는 자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무례한 짓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어려움에 닥쳤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몹시 섭섭해하십니다. 세상이 악하고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살다보면 보통 인간들처럼 자신에게 불행이 닥치고, 병도 걸리고 그러는 게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그런 불행이 닥쳤을 때 우리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도 적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올바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떼를 쓰며 막무가내로 하나님께 기도드려 응답받으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게 자식으로서 올바른 태도입니다. 떼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에 확신을 갖고 있다는 말이고, 이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입니다. 세상이 악하고 우리 믿는 자들은 약하여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대로 다 임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불행을 다 날려버리는 수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면 여러분은 그분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재물, 건강, 생명, 사업과 같은 것들에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성경은 담대하게 부르짖으라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11절)”라고 기도드립니다. 이 말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겸손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다윗이 자신이 아무리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은 했으나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죄가 남아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대신 죗값을 지불하셔서라도 자기를 구해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를 볼 때 다윗은 자기에게 구속자가 꼭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후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살고 거절되면 우리는 악인들처럼 허망하게 죽습니다. 악인과 우리는 도토리 키재기처럼 죄와 악과 의가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불쌍히 여겨 구원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뿌리칠 수 없습니다. 악한 왕 아합조차도 눈물 몇방울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물며 그분을 사랑하여 의롭게 살려고 한 자의 눈물기도를 어찌 하나님께서 뿌리치시겠습니까?

문제는 아무 때나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겉으로 눈물이 안나오더라도 마음속에서 하염없이 줄줄 눈물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참 이상도 합니다. 가룟 유다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나 베드로는 죄를 짓고 눈물을 흘렸고 예수님의 사도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 같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실 죄인에게 눈물을 흘릴 기회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눈물은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고, 자비와 긍휼을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고, 자격이 없지만 회복의 복을 누리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역경에 처했을 때 눈물기도가 나오면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증거이고, 여러분의 회복이 멀지 않았다는 표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닥치는 모든 질병이나 고통과 관련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께서 대신 고난을 당케 하심으로 신자들의 죗값을 이미 다 치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 그런데 성경은 이 구세주께서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42:3).”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못난 자아 때문에 마음이 상한 자들이 하나님께 긍휼을 구할 때 그분께서는 한없는 자비로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의 불꽃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십니다. 지긋지긋한 병이 물러가고 싱싱한 생명력이 나를 감쌉니다. 더러운 영들이 다 물러가고 거룩한 성령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불안과 공포가 썩 물러가고 평안과 소망이 밝은 햇빛처럼 나를 비춥니다. 내 마음에서 원망이 물러가고 감사와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다윗의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병을 치료하시어 수명을 연장시키셨습니다. 다윗과 히스기야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는 자들은 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을 굳게 믿고 요동치(흔들리지) 않는 자는 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병이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니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더 겸손하게 하시고 당신의 능력을 그를 통해 더 확실히 드러내시기 위해 그의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장로교 창시자 칼빈도 그렇게 잔병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에게 그런 병이 있는 것은 주님의 양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종이 병고치는 능력을 보이면 성도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게 되고 이는 자신에게 큰 영광이니 그 대가로 성도들의 죄를 감당하여 고난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공짜 영광은 없습니다! 의로운 자들의 고난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죄를 감당하게 하시며 여러 육체적 고난을 주시고, 대신 그 의로운 자가 타인들을 위해 드리는 중보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고, 대신 그 의인을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타인을 위해 기도드리는 자의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100% 응답해주십니다. 우리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은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그분께서 친히 몸과 영혼에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자만이 이유없는 고통이 임할 때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고 무조건 감사드리며 그러는 중에도 교회와 이웃을 위해 간절히 중보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가 거룩의 극치에 다다른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인들에게 죄없이도 오는 고통은 있지만 무익하고 무의미한 고통은 없습니다. 의인의 고난과 고통은 인과응보의 차원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과 희생의 차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고난과 역경에서 무사히 벗어나 큰 복을 누리고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고, 여러분의 목사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또 여러분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이웃들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죄를 감당하는 자들이 있어서 여러분이 죄를 용서받고 복을 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숨기지 말고 목사님을 비롯한 경건한 신앙의 사람들에게 사정을 고하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게 좋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랑과 헌신을 귀히 보시고, 여러분의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여러분에게 영육의 건강을 주시고, 여러분의 생명을 살려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