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눅7:29-35) : 기쁨과 슬픔

stevision 2012. 11. 27. 09:41

 

(2007년 6월 27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기쁨과 슬픔                                         English
말씀: 눅7:29-35

  

 

 

>>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예수님의 말씀은 쉽고도 명쾌합니다. 그분께서는 길이요 진리이시기 때문에 말을 비비꼬아 하지 않으십니다. “이 독사 새끼들아(자식들아)!” 이 얼마나 핵심을 찌르는 말입니까?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봐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다 입히시고 먹이시느니라. 그러니 의식주 문제로 걱정하지 말거라.” 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쉽게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쉽고 재미있고 감동을 줍니다. 오늘 말씀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에 인생의 전부를 거는 형식적 종교인들이 어떤 자들인지 예수께서 적절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아이들의 놀이가 있습니다.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입니다. 두 패로 나눠 한쪽에서 결혼식 때의 분위기를 만들며 피리를 불면 다른 패가 춤을 춰야 합니다. 한 쪽에서 장례식 분위기를 내서 애곡을 하면 다른 패에서 울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이 피리를 불어도 다른 쪽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또 애곡을 해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자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만을 말하는 측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이고 이 두 분들의 말씀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인들이 춤도 추지 않고 울지도 않는 자들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와 정 반대의 해석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과 함께 놀 기분이 전혀 아니시고 자신들만의 세계에 사시는데 괜히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그분들에게 감놔라 대추놔라 소리 지르며 그 두 분들께서 아무 반응이 없으시자 왜 춤도 안 추고 울지도 않냐고 불만을 늘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 두 해석 다 맞는 것 같습니다. 한쪽은 다른 쪽에다 자신의 신앙을 주장하고 다른 쪽도 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둘 다 상대측의 주장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똑같은 처지였다는 말이지요. 다만 어느 측에 진리가 있었는지는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 측에 진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종교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를 바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종교인들의 소임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릇되게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릇된 방법으로 진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살며 낙타 털옷을 걸치고 꿀과 메뚜기를 먹고 사는 것을 보며 기인(畸人)이라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귀신들려 미쳤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아무 음식이나 다 맛있게 드시고 술도 드시고 천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을 보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끊고 슬프게 사는 자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너무 세상 것을 밝히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과 예수님에게 진리가 없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事件)입니다. 어떤 자는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심히 슬퍼합니다. 어떤 자는 세상의 죄와 악을 생각하고 세상에 임할 심판을 생각하며 심히 슬퍼합니다. 이런 슬픔 가운데 있는 자가 술이나 먹고 친구들이랑 놀러다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요. 이런 자는 자신과 세상의 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참회와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맛좋은 음식을 피하며 간소하게 식사를 합니다. 여러분, 이런 슬픔에 잠겨 있는 자를 미쳤다고 하면 이는 그 자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모욕도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눈을 여시어 자신과 세상 죄를 보게 하시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룩한 슬픔 속에 사는 자를 보며 우리는 이상한 사람이라든가 약간 돈 사람이라고 조롱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자를 통해 주시려는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세례 요한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죄악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진리를 발견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씻는 의미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세례 요한을 보며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기는커녕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매사를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새 술과도 같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며 이끄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아두려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헌 부대도 옛날에는 새 부대였습니다. 다 쓸모가 있던 시기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과거에 그렇게도 유용했던 것이므로 지금도 유용하므로 버리면 안된다는 것이 바로 진리의 대적자들의 태도입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당을 크게 짓고 주일 대예배를 몇 부씩 드려 교인을 늘리는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허락이었고 하나님의 큰 일을 하기 위한 방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기독교 발전에 필요한 부대가 아니고, 그러한 옛 방식의 폐해에 대해 깊이 슬퍼하며 교회 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한두 분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안타까움과 슬픔은 분명 성령의 역사이고 이는 진리입니다. 그런 자들을 ‘교회 부흥을 시기하는 불순한 무리’로 매도하며 자신이 옛날에 받았던 교회 부흥 비전을 절대 진리라 하면 안됩니다. 과유불급입니다. 지금은 교회당 건물이 너무 많이 세워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섬김과 상생의 목회를 해야 합니다. 내 주위에 나에 대해 슬퍼하는 자들이 있을 때 내 자신을 개혁할 때가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새 부대가 되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옛날에 구입했던 그 부대가 좋아서 계속 그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슬퍼하는 마음이 생겨야 올바른 새로운 행동이 나오는데 슬퍼하지 않으니 고집만 부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타인들, 특히 새 시대의 젊은이들은 당신과 다릅니다. 새 시대의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슬퍼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정신이상으로 여기지 말고 혹시 그 슬픔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슬픔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세례 요한의 거룩한 분노와 슬픔을 정신이상 취급을 하다가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자들은 다 복음을 받아들여 영생을 얻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거룩한 기쁨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기쁨의 장본인이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해보신 적이 있으신 예수님이지만 그분께서는 얼굴에 내천자(川) 그리고 다니며 억지로 금식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거룩한 체 하는 자들을 혐오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자존하시며 존재하시고, 오직 그분께서만 다른 피조물에 의해 그 어떠한 침해도 당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만 참 생명이시고, 그분께서만 진정 거룩하시며, 그분께만 전지전능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시니 언제나 만족만 있고 기쁨이 충만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스스로 기쁨을 누리십니다. 그분께서는 피조물들을 용서하시며 스스로 기쁨을 누리십니다. 예수님 안의 기쁨은 바로 진리사건입니다. 그 기쁨은 온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기쁨이었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으로서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억지로 슬퍼하신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의 마음에 있는 샘솟는 기쁨의 표현이 아니므로 그것은 가식적인 것이고 진리행위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키셨습니다. 맛이 좋아서 그냥 기분 좋게 드신 것이지요. 그분께서는 창녀나 세리들과의 대화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새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분께서 인간이 되셨으니 당연히 그리하신 것이지요.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을 조롱합니다. “쯔쯔쯔..., 천박한 종교인 같으니라고...” 그들은 자기보다 낮은 자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그들보다 몇 단계 위에서 군림하는 것에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것은 남이 자존심 상하고 남의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기쁨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기쁨은 달랐습니다. 낮은 자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일으켜 세워 손을 잡고 진리와 영생의 길을 함께 가는 것이 예수의 기쁨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주님인 것은 맞는 말이나, 나를 너희들의 친구로 생각하거라.” 예수님의 인격의 도량이 얼마나 큰지 엿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좋은 친구를 만드는 기쁨이 예수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의 영생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큰 사랑이다.” 여러분께서 천국에 가시면 굉장히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마 그 천국에서도 예수께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실 겁니다. 제 짐작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인간으로 사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를 인자(人子, son of man)라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의 신성을 가지셨지만 이 땅에서 보이셨던 유머감각과 성격을 그대로 천국에서도 보이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거기서도 인자(人子)로 생활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베드로와의 우정도 영원히 유지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분명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백성들에게 “야, 너희들 제발 나를 인간 친구로 여겨줘라”라고 ‘애원(?)’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이 좋아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과의 우정에서 무한한 기쁨을 얻으셨습니다. 그분께는 그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이 최후 승리를 하고 큰 영광을 얻을 날이 반드시 올 것임으로 인한 기쁨이었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뭐가 뭔지 모르고 예수님과 함께 어울려 다녔지만 예수께서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그리고 재림과 함께 그분과 제자들에게 임할 영원한 영광과 무한한 복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생각하실 때 어찌 예수께 기쁨이 샘솟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악의 세력은 세속 권력이든 종교권력이든 다 심판받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니 어찌 그분께 담대한 기쁨이 없었겠습니까?

그런 속사정도 모르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그저 희희낙락거리는 천한 종교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박하다고 보았던 예수의 기쁨은 사실은 진리와 확신이 충만한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기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의 기쁨을 멸시한 그들은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타인의 기쁨을 함부로 평가절하하지 마십시오. 타인이 기뻐하면, 여러분이 아직 그 기쁨을 맛보지 못했을 경우, 스스로 안타깝게 여기고 여러분도 그 기쁨을 맛보게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타인의 기쁨을 멸시하는 자는 그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입니다. 기쁨이 없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기쁨이 있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지혜로운 분이셔서 사람들을 대하시는 가운데 기쁨을 찾고 그것을 누리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예수께서 만나시는 자들을 더럽게 여기며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같은 인간을 대하며 기쁨을 얻지 못하고 괜히 불쾌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보시며 무한히 기뻐하시듯 우리도 예수님을 보며 무한히 기뻐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선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기뻐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의 기쁨을 보며 그 기쁨의 근거가 뭔지 자세히 살펴보았어야 했고, 그 기쁨의 근거가 뭔지 알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그분을 뒤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제일 먼저 그 쓸데없는 자존심부터 버렸어야 했습니다.

결국 스스로를 지혜롭게 생각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세례 요한의 진노와 슬픔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기쁨을 무시하다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한 자들이라 생각했던 이스라엘 평민들과 천민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하여 복음을 받아들여 영생을 얻어 지혜로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타인의 책망을 받아들여 못된 행실을 고치고, 자기에게 제시된 참된 기쁨을 좇아 영원한 기쁨을 얻는 자들이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반대로 자기 생각과 기분만 옳다고 굳게 믿고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은 우매의 자식들입니다.

여러분이 다 지혜의 자녀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여러분 안에 언제나 가득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