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눅7:24-28) :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stevision 2012. 11. 28. 11:28

 

(2007년 10월 3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English
말씀: 눅7:24-28

  

 

>>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

세상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여자여 그대 이름은 갈대’라고 했지요. 줏대가 분명한 여성도 많은데 사실 솔직히 말해 마음이 갈대와 같은 여인도 꽤 많습니다. 갈대는 바람이 부는 대로 자신을 맡기는 존재입니다. 연약함과 수동성을 말해주는 게 바로 갈대입니다. 믿는 자가 흔들리는 갈대처럼 처신하면 안되지요. 세상 풍조에 자신을 맡기고 적당히 적응해 살려고 하면 외부로부터의 핍박이 별로 없겠지요. 하지만 태풍과 같은 시련이 닥쳐도 굽히지 않는 아름드리 나무가 여러모로 쓸데가 많습니다. 갈대로 성전 기둥을 삼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꼭 성전 기둥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와 세례 요한이 성전 기둥과 같은 자들입니다. 모세는 애굽 바로의 절대권력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인들의 머리에 깊숙이 박혀 있던 다신론 사상과 우상숭배 정신을 송두리째 뽑아버렸습니다. 엘리야는 왕 아합과 왕후 이세벨의 절대 권력에 맞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아름드리 성전기둥이라 하십니다. 요한은 당시의 유대사회를 죄에 빠져 심판날을 기다리는 백성으로 규정합니다. 요한은 왕이 잘못하면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는 왕의 절대권력에 굴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루터는 개신교의 기둥과 같은 자입니다. 그가 교황과 황제의 권력에 굴하지 않는 모습은 그가 대들보 같은 믿음의 투사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세상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는 자가 성전의 기둥과 같은 자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핑계로 거짓과 불법을 용인하지 않는 자가 성전의 기둥과 같은 자입니다. 여러분,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마시고 성전의 기둥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전의 기둥은 절대 부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례 요한이 왕을 비난했다가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죽음은 그 자체가 영원한 승리입니다.

세상에는 화려한 삶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자들이 있습니다.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를 갖고 있으며 인생의 큰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권력을 잡으면 화려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왕궁에 사는 자들과 왕궁을 들락거리는 자들이 화려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부러워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그들을 보며 부러워합니다. ‘내가 하나님만 안 믿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여 저들 못지 않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하게 사는 자들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겉으로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사는 자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진정한 화려함은 인간이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늙어 주름진 얼굴에 화장을 한들 화려함이 생기나요? 늙은 손가락에 비싼 다이아반지 끼고 다니면 화려한가요? 늙은 몸에다 아무리 비단으로 두른들 그게 화려한 것인가요? 화려함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들의 꽃을 보십시오. 금을 돌처럼 흔한 물건으로 여겼던 솔로몬의 모든 화려함과 사치가 어찌 들꽃 하나의 화려함을 이길 수 있습니까? 꽃잎의 그 황홀한 색깔은 형언할 수 없는 화려함입니다. 왕후가 되어 나이 많아 비단과 금과 화장품으로 자신을 단장한들 남루한 옷을 입고 있지만 생기발랄한 열여덟 소녀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따라잡을 수 있습니까? 나이 들어 좋은 신앙인격을 갖추지 못한 모든 자들은 제아무리 세상 것들로 치장하려 한들 다 추한 인간들이 되고 맙니다. 돈도 권력도 인간을 진정 화려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아! 세상의 화려함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고! 지난 세월 남을 도왔던 것들, 하나님을 사랑했던 순간들, 지금까지 가꿔온 거룩한 마음, 이런 것들이 늙었어도 나를 화려하게 만듭니다. 세상에는 세상의 화려함을 좇는 자들이 많으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만을 좇는 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신의 사명만을 좇은 자였습니다. 거룩한 신앙인격을 갖춘 자는 아무리 나이 들어도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화려함이 퇴색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큰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보통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였습니다. 보통의 선지자는 태어나기 오래 전에 성경에 자신의 탄생이 예언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미 오래 전에 그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 성경에 있었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요한)에 대한 말씀이라(눅7:27).” 이 말씀은 구약 말라기 3장 1절에 나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여러 구약의 선지자들이 구세주의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예언하며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 날을 바라보고만 있었지 실제로 눈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구세주를 직접 만나 뵙고 그분을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소개하는 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자의 직분을 갖고 태어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태어나게 하심은 하나님의 사자로 귀히 쓰시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선지자로 귀히 쓰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자입니다. 그는 큰 선지자로 부름받았고 그는 실제로 큰 선지자로 살았습니다. 그가 여인에게서 나온 자들 중에 가장 큰 자였던 것은 그가 큰 선지자로 부름받고 실제로 그 삶을 충실히 살았기 때문입니다. 큰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도 악한 인간으로 살았다면 그는 절대 여인에게서 태어난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직분이 여러분을 귀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직분이 여러분을 큰 자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임에 충실한 자가 직분의 외적 높낮이에 관계없이 큰 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는 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니라(딤후1:9).” 요한은 태어나기 400년 전쯤에 하나님의 종(사자)으로 태어날 것이 예언되었는데, 우리 믿는 자들은 창세 전에 미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어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께 그분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영화로운’ 존재들이 됩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행실만 똑바로 하여 살면 세례 요한보다 더 귀하고 큰 자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에 예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28절).” 지금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영화로운 천국백성으로 살고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하실 당시의 세례 요한은 엄연히 하나님의 사자(종)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소개시키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신랑이시라면 그는 신랑의 종이 되어 신랑이 타는 말의 고삐를 잡고 ‘신랑이 나아가니 길 좀 비켜주시지요’라고 외치는 자입니다. 여러분, 이 종이 높은 자입니까, 아니면 신랑의 신부가 더 높은 자입니까? 누가 더 큰 자입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들이 아무리 초라할지라도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들이라고 지금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직은 많은 자들이 세례 요한을 예수님보다 더 큰 선지자라고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 요한을 자신들이 감히 접근도 못할 까마득히 높이 계신 선지자로 알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천국백성(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이렇듯 때론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귀한 신분인지 모르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천국백성들이(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들이라고 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요한은 예수님의 종의 신분이나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도들이었습니다. 종이 주인의 신발끈을 풀어 주는 경우가 있으나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끈도 풀 자격도 없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지휘, 감독하는 자입니다. 요한은 죽은 자를 살리거나 병자를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았습니다. 사도들이 죽은 자를 살리거나 병자들을 고친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둘째로 요한은 종의 신분이었으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로까지 높여졌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3-15).”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보다 얼마나 더 큰 자들인지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들인 제자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셋째로 요한은 종의 신분이었으나 제자들은 성부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의 맏형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의 한계는 그가 여인에게서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에 더하여 성령께서 낳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세례 요한은 종의 신분이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신부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됩니다.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있었을 당시에 그는 절대로 영적으로 예수님의 신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앞서가며 사람들에게 그분의 신분을 알려주는 예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신부들은 세례 요한보다 훨씬 더 큰 자들이지요. 제자들은 세례 요한과 달리 예수님과 깊은 영적 연합을 이룬 자들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는 내 안에!” 한 마디로 말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는 낮은 종이었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친히 발을 씻어 주신 귀한 자들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도들의 신분의 차이는 그처럼 엄청납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들을 하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왕궁에 있는 자들보다도 세례 요한보다도 더 큰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그런 자긍심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적 권능과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가장 작은 자일지라도 여러분은 그 위대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들입니다. 여러분의 이 믿음이 여러분을 크게 만듭니다. 세상의 화려함을 보고 부러워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지닌 영적 지위를 생각하여 자족하고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자긍심으로 맡겨주신 사명 잘 감당합시다. 그 사명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괘념치 맙시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와 긍휼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