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요14:8-11) : 삼위일체 하나님

stevision 2012. 11. 29. 09:49

 

(2007년 11월 7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삼위일체 하나님                                       English
말씀: 요14:8-11

  

 

 >>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저의 오래 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계신 참 신이심을 세계 만방에 알리게 하소서!’였습니다. 저는 내심 그것을 하나님께서 지어놓으신 세계의 존재 비밀을 알아내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증거라 제시함으로 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물리과로 지원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저는 대학 학과 선택을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맞춰 한 것이지요. 속마음은 노벨 물리학상 받을 업적을 이뤄 노벨상도 타고, 하나님의 존재도 만천하에 증명하고, 대한민국의 국위선양도 할 작정이었습니다. 꿈도 참 야무졌지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물리적 방법이 아니라 신학적 방법으로 제 소원을 이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리를 먼저 공부하게 하셔서 물리가 뭔지 알게 하시고 그 다음에 신학을 공부하게 하셔서 신학적 방식으로 진리를 서술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인데 물리학적 방식으로는 그 진리를 전개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 진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과 그분의 말씀인 세상을 동시에 고려해야 해명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물리학 자체는 얼마나 무력(無力)한 증명수단입니까!

진리에 대한 감각, 즉 진리에 대한 직감이 있는 자들은 어떠한 상황 해설을 보고 ‘저건 분명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즉시 깨닫습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은 절대 제 자랑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작년 연말에 동토마(동아 토론 마당, 동아 시사발언대)에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제하의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글입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제가 작성한 글 “창조주 하나님”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그 말씀이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작성되었다면 그 글은 4000년의 빗장을 푸는 것이지요. 그 글에는 지금까지 신비로만 남아 있었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해명해 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자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완전한 하나님이신데, 그 세 분들(위격들)께서는 단 한 분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라는 교리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그 교리가 정통으로 받아들여진 후 지금에 이르러 완전한 의미를 드러냈습니다. 제가 어거스틴의 글이나 기타 위대한 신학자들의 글을 읽어보았고 그들 나름대로 훌륭하게 삼위일체를 설명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인 결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폐기처분해서도 안되고, 억지로 해석해서도 안되니, 모르더라도 그게 진리이니 삼위일체론을 그냥 신비로 남겨두고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이자”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시한 삼위일체 해석은 1과 3의 신비를 모순됨이 없이 조화시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평가는 제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글에 나오는 내용들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대목들은 다 샘물처럼 불현듯 마음의 샘에서 떠오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글은 기도 가운데 작성한 것이었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완성하여 동토마에 올린 것입니다. 신학박사나 신학대학 교수가 쓴 글이 아니고 한갓 신학석사 출신 재야 하나님의 종이 올려서 그런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동토마에 올려진 글을 누가 관심있게 봤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진리이고 진리에 대한 감식력이 있는 자가 그것을 봤다면 결코 그 글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모이는 법입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니 진리를 찾는 자들을 진리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제가 올린 글이 옳은 말이니 거기서 하나님의 신비를 재발견하는 자들이 나타나겠지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 신비들을 이해하게 하십니다. 삼위일체도 이제 사람들이 그 신비를 이해할 때가 되었습니다. 물질의 존재방식도 이제 그 수수께끼가 풀릴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되어 있어서 그 교리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삼위일체를 오해하여 이단사상이 된 것들 대표적인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양태론 이단입니다. 한 사람이 세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며 자신을 다른 자들에게 보여주듯 양태론은 한 분의 단일한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세 모습, 즉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모습을 동시에가 아니라 번갈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대로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 하나님께서 사실은 구약의 성부 하나님이시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는 성경말씀에 위배됩니다. 또 이 이단사상은 하나님께서 성자이실 때에는 성부나 성령이심을 중지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동시에 자신들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성경말씀에 위배됩니다. 따라서 양태론은 삼위일체론을 오해한 이단사상입니다. 교회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삼위일체론을 오해한 또 다른 이단은 바로 삼신론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혈연관계를 이루며 친밀한 관계로 마음과 뜻이 하나이듯, 성부와 성자와 성령도 각각 분리된 존재로 계시나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고 계신다는 게 삼신론 이단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세 하나님들을 말하고 있어 한 분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성경에 위배됩니다.

제가 제시하는 삼위일체론은 한 분의 하나님께서 동시에 세 곳에 자신의 완전한 존재들을 두시는 경우입니다. 본래의 나라는 존재가 서울에 있으면서 동시에 워싱턴과 평양에 완전한 나를 존재케 하여 그 두 곳에서도 완전한 나로서 존재하며 사람들을 대하는 게 삼위일체의 모델입니다. 내가 완전한 세 ‘나들(the three ego(e)s, the three Is)’로 존재하며 사람들과 상대할 때 나는 동시에 세 가지의 삶을 사는 거지요. 성경의 비유를 들어봅시다. 성경 원어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원어 성경이 동시에 영문본과 한국어본으로도 존재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유일하신 한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들로 존재하시며 세 가지 신적 삶을 동시에 느끼며 영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르시게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능력, 즉 자신의 완전한 또 다른 자아들을 생성케 하시는 능력이 당신 스스로에게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제2의 자아 껍데기나 제3의 자아 껍데기가 아닌 완전한 제2의 자아 하나님 실체와 제3의 자아 하나님 실체를 두실 수 있으신 분이 바로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의 제2의 자아실체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고, 성부의 제 3의 자아실체 그리고 성자의 제2의 자아실체가 바로 성령님이신 것이지요. 저는 이게 가능한 근거로 하나님의 자존성을 들고 싶습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제2의 자아실체와 제3의 자아실체를 두실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각 신적 자아실체들께서는 각자의 위치에서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대하시고, 또 한 신적 자아실체(위격적 실체, 위격)께서는 다른 신적 자아실체를 객체로 대하실 수 있게 됩니다. (비유를 하나 들면, 우리의 오른손이 왼손을 객체로 여겨 꼭 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자께서 성부께 기도드리실 수 있으시고, 성부께서 성자께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 신적 자아실체들(위격들)께서는 절대 서로 분리되어 있는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절대 분리 불가능한 한 하나님의 세 자아실체들이십니다. 유일하신 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이렇게 삼위일체로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설명해봅시다. 한국에 있는 제1 자아를 성부라 하고, 평양에 있는 제2 자아를 성자라 하고, 미국에 있는 제3 자아를 성령이라 합시다. 그러면 평양에 있는 제2의 자아가 양(羊)의 몸을 취하여 양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경우가 바로 성자께서 인간의 영과 육을 취하시어 인간들에게 나타나신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과 영을 취하시어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성부나 성령이 아니시고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분께서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주여(예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그분께 부탁드렸습니다. 이 경우 빌립은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제2 자아이신 성자이신 것을 모르고 단지 이스라엘의 여러 선지자 중 한 분으로 알고 한 말입니다. 아직 빌립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은 삼위일체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구약의 하나님을 그냥 아버지로 불렀던 것입니다. 빌립은 정말로 예수께서 사랑하시고 계신 성부 하나님을 보고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소원을 가진 자가 어디 빌립 뿐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자들이 진짜 하나님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싶어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빌립이 원하는 아버지를 보여주시지는 않으시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여러분, 평양에 있는 제2의 자아를 본 자는 서울에 있는 제1의 자아를 본 것이라 할 수 없습니까? 분명 평양에 있는 제2의 자아를 본 자는 지금 서울에 있으며 평양에다 제2의 자아를 둔 그 자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께서는 성자의 자격으로 계시는, 인성(人性)을 취하여 계신, 성부의 제2의 자아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 경우 직접 아버지를 보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제 2의 자아를 보고 있는 거지요. 그러니 인간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줄 아시겠지요? 인간의 아버지와 아들은 독립된 두 사람들이지만 성부와 성자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께서 하나라 하셨습니다.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인간의 아들과 인간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아들의 의미와 전혀 다릅니다. 물론 비슷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훨씬 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의 그 말씀을 빌립이 완전히 이해했을 리 없지요. 예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부연 설명하십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절).” 예수께서는 자신을 아들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규정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완전한 신적 실체이시듯 성자 하나님께서도 완전한 신적 실체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세 신적 실체들을 동시에 소유하시고 계신 것이지요. 그래서 성자께서 성부와 완전 동등한 신성을 가지셨다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성부께서 전지전능하시듯 성자께서도 조금도 약화됨이 없이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러나 성부도 아시고 계시고 성자도 아시고 계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자께서 성부의 제2의 자아실체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신적 자아실체는 완전한 신성을 지니셨으므로 독자적인 사고활동(思考活動)이 가능합니다. 성품과 인격은 자신의 위치와 오랜 삶에서 비롯됩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셨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성부의 아들’로서 자신의 인격을 갖추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성자께서는 성부의 아들로서 인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성부는 아버지의 인격을, 성자는 아들의 인격을, 성령은 세상에 파송된 아버지와 아들의 영(靈)으로서의 인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한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세 신적 실체들로 존재하시며 세 신적 인격들을 동시에 갖추시며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의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성자의 마음 안에 성부와 성령의 마음들이 현존해 계시고, 성부의 마음 안에 성자와 성령의 마음들이 현존해 계시고, 성령의 마음 안에 성부와 성자의 마음들이 현존해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는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제1의 자아실체, 즉 성부 측에서 계획하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의 의지(意志)를 성부의 뜻을 실현하시는 데 온전히 사용하시고 계심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우리가 예수께서 아버지 뜻에 ‘복종’하신다고 해서 성부와 성자가 서로 분리된, 독립된 두 하나님들이시라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손이 머리의 뜻에 복종하여 움직인다고 손과 머리가 분리된 두 생명체들입니까? 그건 아니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단 하나의 생명체이십니다. 그런데 성자께서도 성부 못지 않게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행하실 수 있으신 능력이 있으셨지만 성부의 뜻을 따름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으셨던 것이지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길 원하나이다. 아멘, 아멘!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