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고전2:1-5) : 권능의 말씀

stevision 2012. 11. 29. 11:33

 

(07. 12. 12. 동아 시사 발언대)

 

제목: 권능의 말씀                                 English
말씀: 고전2:1-5

  

 

 >>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세상에 쉬운 직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도 결코 만만한 직분이 아닙니다. 한국의 기독교 성직자들은 일주일에 해야할 설교가 너무 많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새벽기도 설교를 해야 하고, 수요일 저녁 예배와 주일 낮과 밤 예배 설교를 해야 합니다. 심방 때에도 설교를 해야 하지요. 똑같은 설교를 재탕을 하게 되면 성도들이 용케도 옛날 설교를 기억하여 게으른 주의 종이라는 생각을 해서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지 못할 것 같아 같은 내용의 설교를 재탕하는 모험을 하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재탕을 하지 않으려 해도 설교 할만한 성경 본문이 무한정 있는 게 아니라서 같은 본문을 가지고 약간 색다르게 설교를 하여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쳐야만 하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됩니다. 그냥 성경 말씀만 20분 공식적으로 읽기만 하는 예배 없나? 은혜와 감동은 각자 알아서 받으면 될 것도 같은데요. 한국에만 있다는 새벽기도 시간에 공식 설교를 꼭 해야만 하나요? 새벽 예배가 아닌 새벽기도 시간이지 않습니까? 새벽기도 시간에는 한 10분 정도 앞에서 주의 종이 성경말씀만을 읽고 나머지 한 30분 정도 각자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주의 종들이 설교 준비하느라 너무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여 준비한 설교를 성도들이 잘 받아먹으면 좋으련만, 일주일에 듣는 설교가 너무 많다보니 성도들도 한 설교 한 설교에 자신의 모든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씀 낭비가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훈련만 잘 되어 있다면 새벽기도 시간에 공식 설교를 하지 않더라도 함께 성경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 자기에게 그 날 필요한 영의 양식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금요 철야 기도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주목적인데 거기서도 또 공식적인 설교를 해야 하나요? 정해진 시간에 함께 찬송 세 곡 정도 부르고 성경 말씀 10 분 정도 읽고 그 이후론 각자 자신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돌아가면 되지 않나요? 금요 철야기도 시간인데도 찬송과 설교가 주를 이루고 정작 기도할 시간은 없는 게 현실 아닙니까? 모이면 무조건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한 말로 성도들이 정말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설교시간을 기다리나요? 설교를 생략하거나 설교 시간이 짧았으면 하는 속마음은 없나요? 이게 다 일주일에 듣는 설교의 횟수가 너무 많고 설교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기 때문에 나오는 부작용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이나 금요 철야기도 시간에는 설교 대신에 한 10 분 정도 함께 성경말씀 자체를 읽는 순서를 가져도 됩니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쭉 요한 계시록까지 읽어가면 성경 통독을 할 수 있어서 평신도들에게도 유익일 것입니다. 기도시간이니까 설교 없이 잠시 성경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도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마다 개인마다 다 차이가 있어서 설교 시간이 획일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설교도 아닌데 설교를 꼬박 1시간 정도 하는 게 정상적인 겁니까? 제가 볼 때에 보통의 설교를 40분 이상 하는 것은 자신의 말이나 세상적 말이 상당히 들어가 있는 설교입니다. 권능의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데 1시간이나 필요합니까? 20분 정도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습니다. 극동방송이나 CTS 방송 때 30분 정도로 편집된 설교들 보세요. 얼마나 알차고 심적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감동을 줍니까? 30분이라고 은혜가 떨어지던가요? 그런데 사실은 그 30분 설교가 실제는 40분 이상의 설교였지 않나요? 그러니까 40분 이상의 설교는 30분으로 했어도 될 설교였고, 그 30분 설교가 성도들에게 부담을 적게 주고 더 많은 은혜를 끼칠 설교였다는 거지요. 설교가 30분을 넘어 40분에서 1시간으로 늘려지면 결론적으로 그 사이 사이가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이 아무리 죄가 많고 설교자가 아무리 성령의 감동을 받아 꼭 필요한 말을 많이 하고싶어도 권고의 말씀만을 30분 이상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설교가 30분 이상으로 길어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 30분에다가 예화나 간증이나 시시콜콜한 말로 20, 30분을 더 채우는 설교는 설교자 자신이나 성도들이 투자한 시간에 비하여 거기에 맞는 열매를 주지 못합니다. 적어도 설교 시간이 길다고 마음에 짜증을 내는 성도들이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언제 성도들이 짜증을 냅니까? 40분 이상의 설교가 그렇습니다. 30분 짜리 설교라면 절대 성도들이 지루하게 느끼지 않을 겁니다. 설교자가 시간을 내서 여러 예화나 간증을 첨가했는데 설교 시간이 길어져 성도들이 짜증을 느끼고 성도들의 시간을 빼앗았다면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지요.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30분 내에서 설교로 완성하면 설교자에게 설교 준비의 수고(고통)를 반으로 줄일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30분의 예화나 간증을 준비할 시간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날 성경 본문 말씀이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교훈을 주는지 살피는 게 더 낫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도들의 마음에서 권능 가운데 살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예화나 간증이 들어간다 할지라도 설교가 30분 이상 되어야 할 이유를 못 찾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3절).” 세상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인간은? 많은 자들에게 ‘똑바로 사시오!’라고 호통치는 도둑놈이겠지요.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지 않으며 설교를 할까요? 어떻게 은밀히 간음한 인간이 설교단에 서서 성도들을 향하여 설교를 할까요? 어떻게 높은 성직 차지하려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은혜롭지 못한 방법으로 선거 운동한 탐욕스런 자가 성도들을 향하여 세상 욕심 버리고 주의 뜻대로 살라고 설교할까요? 교만한 죄인들 같으니라고! 3절 말씀은 설교자가 겸손한 태도를 보여야 함을 말합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설교할 자격이 없는 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니 먼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 회개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받은 말씀을 성도들에게도 전해 주는 게 바로 정상적인 설교자가 아닐까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성도들을 많이 핍박했던 바울인지라 그 스스로는 죄송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설교자가 스스로 하나님이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면 보기 흉합니다. 호통치듯 설교해도 안됩니다. 물론 설교자의 말투가 원래 과격한 경우도 있습니다. 제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그런 외적인 요소를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가짐이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어투도 중요하긴 합니다. 성도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꾸짖는 분위기보다는 설득과 온유한 권고의 말투가 좋습니다.

억지로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보기 안 좋습니다. 듣는 자들에게 부담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주 설교 중에 우는 소리를 낸다든가, 의도적으로 침묵해서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면 안됩니다. 말씀으로 승부를 걸어야지 설교 테크닉으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행동입니다. 물론 스스로 크게 감동을 받아 울음이 나고 더 이상 설교를 잇지 못하고 침묵을 할 수도 있으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이지 개인 기도 시간이 아닙니다. 일년에 한 두 번 설교 중에 성령의 감동 가운데 눈물을 흘리거나 우는 소리를 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한 주 걸러 한 번씩 그러면 성도들이 괜히 짜증 날 수도 있습니다. 설교하는 데 청중 속에서 애 울음소리 나면 설교자가 기분이 좋나요? 성도들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는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설교자가 사적인 감정을 너무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설교는 엄중한 말씀선포 시간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을 대리하여 말씀을 선포하면 스스로도 엄숙한 분위기를 지켜야 마땅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1절).” 바울 스스로도 인정하다시피 그는 학문에 능하고 글에 재주가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은 별로였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4절)’ 하였습니다. 문제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말주변이 없는 자가 억지로 남 흉내내서 설교하려면 성도들이 감동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격대로 온전히 성령님을 의존하는 가운데 자신의 어투와 제스처를 사용하여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말의 지혜와 기교를 은사로 주신 자들도 있겠지요. 부흥사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솜씨를 적극 활용하여 성도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분들입니다. 학식이 있든 없든, 말재주가 있든 없든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은사를 활용하여 온전히 성령의 도구가 되어 말씀을 전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한계를 핑계로 복음을 안 전한 게 아니라 그런 한계 가운데에서도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실 말재주 없기는 모세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모세는 구약의 기초를 놓은 자이고 바울은 신약의 기초를 놓은 자입니다. 이 둘은 자신들의 말재주로 교회의 기초를 놓으면 안 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냥 그대로 전하기만 해야 하는 자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말재주도 좋은 은사인데 하나님께서 필요한 경우 당신의 종들에게 그러한 은사를 안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보다도 자신의 학식과 지혜와 말재주를 앞세우려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의 맥을 확실히 잡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현실화되고 있지 않은 자들이 설교를 하려니 자신의 세상 학식과 자신의 지혜와 말재주에 의존하는 겁니다. 사실 그 많은 성경 지식과 심오한 기독교 교리를 성도들이 다 이해하고 있습니까? 천 페이지나 되는 조직신학 책 한 권을 훑어보세요. 자기도 모르는 소중한 기독교 지식이 얼마나 많이 널려 있습니까? 그 내용을 성도들이 지금 5%나 알고 있습니까? 성도들 중에 영어를 아는 분들 계시면 그들을 잘 지도하여 영어 성경을 통독하게 하면 그들의 신앙이 현재보다 갑절로 깊어질 게 확실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분들을 지도하여 히브리어나 헬라어 원문으로 성경을 보게 하면 그들의 신앙이 현재보다 열 배로 더 깊어질 게 확실합니다. 한국 기독교 성도들이 ‘고난 - 믿음을 지킴 - 축복’ 도식의 부흥회 설교에 이미 많이 익숙해져 있고, 그들이 이미 세상적 복도 많이 받았으니 이제 그런 성도들을 위한 좀 더 차원 높은 교육이 필요한 시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제 한국의 설교자들은 다른 차원의 영적 지식욕을 갖춘 성도들을 지도하기 위해 자신들을 준비시켜야 할 것입니다. 재미있는 좋은 예화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이나 서적들이 그 방면의 정보를 많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도들이 기독교 지식을 5%도 갖추고 있지 못한데도 예화 찾는 데 시간을 훨씬 많이 쓰고, 예화로 설교의 50%로 채우는 것은 ‘말재주’에 의존하려는 태도가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명한 설교는 무엇입니까?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의 권하는 말’ 즉 ‘그럴듯한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선포하는 게 지혜로운 설교입니다(4절). 세상 사람들은 고단수의 지혜꾼들입니다. 그러니 설교자가 자신의 지혜로 성도들을 권면하여 그들을 이끌 수 없습니다. 언제 설교자가 성령의 말씀을 선포합니까? 설교자가 성령께 사랑받고 살 때 성령의 말씀을 대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를 마음으로 미워하고 성령을 속이는 가운데 은밀한 죄를 범하는 자는 결코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의 말씀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지혜롭다고 성공합니까? 그게 아니지요. 힘이 있어야 성공합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보증해주시지 않는 설교는 공허한 인간의 말일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평이한 말로 설교해도 그 말씀이 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가치는 듣는 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성도를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선포된 설교가 듣기에는 재미없었더라도 그 능력이 10년 20년 아니, 평생토록 들은 자의 삶에 나타날 때 그 설교가 명설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설교를 명설교가 되게 하는 요소는 예화나 간증이 아니라 설교 중에 선포된 성경말씀 그 자체입니다. 성경에는 오늘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것 그냥 읽기만 해도 성도들이 변화됩니다. 모든 성경 말씀에 대해서 성령께서 100% 그 효험을 보증하십니다.

현명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중시합니다(2절). 온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을 선포하고 온 인류의 죄를 없애주는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바로 참 설교입니다. 설교 시간에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예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심을 확신하게 되어야 합니다. ‘평안하시오, 평안하시오, 평안하다, 평안하다’만을 외치는 설교는 그야말로 맑스가 말한 ‘민중의 아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검보다 더 예리합니다. 죄를 간과하는 설교는 현명한 설교가 아니고, 자신의 십자가를 간과하게 하는 설교는 현명한 설교가 아닙니다. 현명한 설교는 성도를 예수의 제자로 만드는 설교입니다. 그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삽니다. 그 자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고 보면 성도를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진정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는 설교가 현명한 설교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분들에게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임하길 기원합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