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12. 15. 동아 시사 발언대)
제목: 내 죄를 씻어주소서 English
말씀: 시51펀
>>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 <<
세상에서 가장 힘든 병은? 감기몸살이 아닐까요? 머리가 빙빙 돌고, 온 몸이 쑤시고, 밥맛은 없고, 숨을 쉴 때마다 고통이 따르는 병이 바로 감기몸살이지요. 병균이 들어오면 왜 그런 고통이 따를까요? 병균이 들어와 몸을 파괴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 병균이 들어와 활동하는 과정도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니 더 억울합니다. 그러나 병균이 들어와 있을 때 몸에 심한 통증이 있어야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그 통증이 없다면 우리는 병균이 몸에 들어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다가 막판에 가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통증이 있어야 즉시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는 조치를 취하여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고 그 병을 고치게 됩니다. 통증이 전혀 없이 진행되는 초기 암들 보세요. 얼마나 위험한 존재입니까?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 즉시 감기몸살 정도의 고통이 온 몸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 병에 걸렸을 때 통증이 있다가 치료를 받게 되어 통증이 사라지면 그 병이 고쳐졌음을 우리는 알게 되어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됩니다. 원래 통증이 없는 병이라면 약을 먹어도 그것이 치료받았는지 그만 약을 먹어도 되는 건지 잘 모르니 갑갑하겠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통증은 하나님의 은혜요 그분의 창조지혜입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와 자리잡고 있다면 그것이 계속 장성하여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진 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겁니다. 죄가 있는데도 영육과 마음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그 죄는 초기 암덩어리입니다. 그 죄는 사람을 죽이는 죄이고, 그 죄는 그 죄를 범한 자를 영원한 지옥으로 이끌 죄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몸과 정신과 물질에 큰 해와 고통이 임하면 그 죄는 감기몸살이고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으면 그것은 필경 암 덩어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징계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감기몸살 같은 심한 통증을 주십니다. 속히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용서받아 그 죄에서 벗어나 그 죄의 책임에서 벗어나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거지요. 이게 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 51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가 간음과 살인죄를 범하고 맘고생을 하고 있는 중에 선지자 나단이 와서 그의 숨은 죄를 책망하자 솔직히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맘으로 오늘 시편을 지었습니다. 그는 한순간의 무절제로 큰 죄를 범한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죄를 범한 것은 그가 높은 자리 즉 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낮고 천하고 가난한 자는 먹고살려고 도둑질하는 죄를 범하지만 다윗처럼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자신의 절대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육체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죄를 범하게 됩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권세가 있으나 없으나 우리는 매일 매일 자신을 돌아보아 경성하여 죄짓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다윗이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까지 죽게 만듭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그런 중죄를 짓고 나자 드디어 다윗에게 감기몸살 같은 극심한 통증이 시작됩니다. 아 글쎄 밧세바가 임신했다고 다윗에게 말합니다. 부하의 아내를 범하여 임신시켰다면? 그것이 조정 신하들과 군인들에게 알려지면? 다윗의 정치인생은 그 날로 끝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심한 맘고생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그는 전쟁터에 나가있는 우리야를 소환하여 그의 아내와 동침하게 하려 했으나 무슨 영문인지 우리야는 사랑스런 아내가 있는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윗은 우리야를 죽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중한 죄인 살인과 간음을 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 잘 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다윗이 어쩌다가 저런 깊은 구렁텅이에 빠졌단 말입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힘들여 거룩하게 살았고, 하나님께 많은 순종했으니 이번 한 번 쯤은 하나님께서 눈감아주시고 당연히(?) 용서해주시겠지’라는 지극히 교만한 마음 때문에 그가 그런 중한 죄에 빠진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 거룩한 사람이 교만해질 때 다윗과 같은 죄를 범하게 됩니다. 자신의 쌓아온 의(義)로 간음 정도의 죄를 용서받겠다는 게 교만이 아니고 뭡니까? 뻔뻔스럽게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서 당연히 용서해주시겠지 생각하며 맘 탁 놓고 사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이 자는 지극히 뻔뻔스럽고 교만한 죄인으로 하나님 마음에 새겨질 것입니다. ‘당돌한 녀석 같으니라고!’ 이게 바로 노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특별 배려(?)로 가임(可姙)기간이었던 밧세바가 용케 임신이 안됐더라면 다윗은 큰 감기몸살 치르지 않고 그냥 무사히 위기를 넘겼을 것입니다. 또 우리야가 집에 가서 아내와 동침만 했더라도 그의 죄는 그냥 덮혀진 채 세월이 흘렀을 겁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밧세바와 간음했던 다윗의 죄는 암덩어리가 됩니다. 그런 중한 죄는 그의 무덤을 넘어 지옥까지 그를 끌고갑니다. 밧세바가 임신하고 우리야가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게 바로 다윗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치도 없이 악인의 죄를 덮어주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양심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평소에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상당한 압박을 가하셨습니다. “내가 토설치(자백하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32:3-4).” 이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이 간음과 살인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그에 못지 않은 고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에서 멀리 떠나 계시는 것입니다. 다른 때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아무 걱정 없이 하나님을 선한 목자처럼 대하며 행복에 겨웠으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다윗에게서 떠나시니 다윗은 견딜 수 없는 공허함과 불안과 죄의 짐에 눌린 마음에 괴로워하게 됩니다. 정신과 육체의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존경하는 아버지께서 노하셔서 아무런 말씀도 드릴 수 없을 때, 사랑하는 자가 노해서 전화도 받지 않을 때 그 차가운 거리감이 아마도 다윗이 느꼈던 하나님과의 거리감이었을 겁니다. 이런 고통의 기간이 상당히 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에게 다윗의 행위를 말씀하시고 그에게 가서 죄용서를 선언하라 하십니다. 그게 언제일까요? 그것은 분명 다윗이 그 고통 중에 철저히 자신의 추악한 죄와 당돌한 교만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기도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을 때였을 겁니다. 나단이 다윗의 죄를 책망하자 다윗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바로 그 자리에서 나단이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고 하니, 나단은 하나님의 죄용서를 선언하러 다윗에게 갔었고, 이는 다윗이 이미 하나님께 모든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12:13).” 나단이 즉석에서 다윗에게 죄 사함을 선언했다기보다는 다윗이 이미 많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셔서 일의 마무리를 지으신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종이 여러분의 죄를 책망합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제 살았다. 내 죄만 인정하면 난 살겠구나!’ 하며 기뻐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그 중한 죄를 범하고도 용서받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한 그의 회개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다윗이 그의 간음과 살인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는 물론이고 하나님께도 범죄했음을 인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편 51편을 요약하면 죄와 용서라는 두 단어입니다. 구구절절 다윗은 자신의 죄를 말하고 용서를 구하고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야나 밧세바, 그리고 그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다윗 자신의 가족과 온 이스라엘에 죄를 범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의 중한 죄로 가족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그들의 마음이 상처받았으며, 그가 다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가 마음의 상처를 줬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그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절대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성경은 4절 말씀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눈앞)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번역해놨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번역입니다. 이 번역대로라면 다윗이 타인에게 그 못된 짓을 하고도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하여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쪽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실제로 4절 말씀을 저렇게 이해한 일부 삯꾼 목사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고 많은 자들에게 지탄을 받으면서도 무책임하게 공개사죄를 하지 않고 담대한 뚝심으로 목회를 계속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 딴에는 은밀히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사죄기도 드렸으니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4절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면 안됩니다. 실제로 독일어 성경은 “제가 바로 주님께 범죄하여”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범죄의 대상을 강조한 것을 가지고 다른 자들에게 범죄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무시해도 된다는 쪽으로 이해하면 안되지요. 다윗은 자신이 우리야와 밧세바에게 행한 죄를 생각하며 그 행위가 바로 하나님께 범한 죄도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를 “제가 바로 하나님께 범죄하여”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안되겠으나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 자들이 있으니 문제가 있는 번역이라는 말입니다. 어쨌든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자들은 물론이고 하나님께도 자기가 중한 죄를 범한 것을 인정했습니다.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가 용서받습니다. 탐욕의 목회를 하여 죄를 범한 목사들은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해 용서받아야 함은 물론이고 성도들과 대한민국 교회에게도 공개 사죄를 하여 용서받고 목회를 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본을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해 공개사죄하지 않으니 ‘삯꾼 목사’가 뻔뻔스럽게 목회를 한다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다윗을 보세요. 시편 이곳 저곳에 얼마나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까? 그는 자신의 죄와 회개기도를 시로 써서 사람들이 읽게 했습니다. 다윗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죄의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에서만 해결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 드러난 죄에 대해서 그가 숨기지 않고 참회의 시로 남겼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용서받고 사랑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자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몇몇 대한민국의 탐욕스런 목회자들의 인격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주께서 (제게) 말씀하실 때에 (제가 주님을)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저를) 판단하실 때에 (제가 주님을) 순전하시다 하리이다(4절).” 이는 ‘다윗 너는 죄인이다’라는 하나님의 판결이 의로운 판결이고 100% 맞는 판결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다윗이 모든 변명을 다 포기했음을 말합니다. 그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다 옳으니 자기는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그저 주님의 자비만 바라볼 뿐이라는 심정으로 다윗은 그와 같이 말한 것이지요. 이 또한 자신이 죄인임을 통감한다는 표현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전술했다시피 가난한 자는 먹고살기 위해 죄를 범하고 부자나 권력자는 마음이 교만해져 죄를 범하는 겁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나 정도 되는 사람은 이런 죄쯤은 지어도 되지’라고 생각하고 죄를 범한 것이지요. 다윗 왕이 얼마나 부하의 인권을 같잖게 봤으면 그의 아내를 범합니까? 이 얼마나 당돌한 교만입니까? 다윗은 자신의 교만을 깊이 뉘우치며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 즉 이 말은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자기가 모태에서 형성되는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죄만 지은 죄인이라는 겁니다. 이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흉악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겸손한 마음이 될 때 나오는 고백입니다. 다윗이 겸손히 자기가 남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거지요. 또 다윗은 자기가 죄인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6절)”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죄를 범하게 됨을 다윗이 깨닫고 결국 자기는 어리석은 자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가 뭔지 알게 해달라는 기도를 그가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만하고 천박하고 어리석은 자가 죄짓습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7절)” 제사장이 우슬초에 피를 적셔 죄인에게 뿌리면 그 죄가 용서받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죄를 용서해주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9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절).” 다윗이 용서를 구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끝내 외면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자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16, 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 없이 드리는 번제 보다는 차라리 죄를 깊이 뉘우치는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죄용서를 받지 못한 채 행하는 모든 종교행위가 다 쓸데없는 짓임을 말하는 거지요.
겸손히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임하길 빕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길 빕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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