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욥39:13-18) : 하나님께서 불의하신가요?

stevision 2012. 11. 29. 18:14

 

(07. 12. 15. 동아 시사 발언대)

 

제목: 하나님께서 불의하신가요?                          English
말씀: 욥39:13-18

  

 

 >> 13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 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16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찌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17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18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

사람이 애를 낳으면 강보로 잘 싸 따뜻하게 하고 똥 싸면 닦아주고 배고파 울면 젖을 먹여야 합니다. 그렇게 안 하면 그 아이 죽습니다. 그래서 애 낳아놓고 방치해서 죽이면 큰 벌을 받습니다. 갓난아이는 연약하여 부모가 방치하면 반드시 죽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애를 잘 돌볼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애가 해를 당치 않고 잘 자라나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어떤 젊은이들은 젊은 욕정에 사로잡혀 함부로 놀아나다 덜컥 임신을 하여 애를 낳고는 귀찮다고 그 애를 시골 변소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도시 수세식 변소야 애를 빠뜨릴 장소가 없지요. 시골 변소는 똥과 오줌이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위에서 싸면 아래에 다 모여집니다. 아 글쎄 제 새끼를 그 똥독에 빠뜨려 죽였으니 이 얼마나 사악한 인간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본문 말씀의 타조를 보세요. 이 암타조는 알을 그냥 맨땅에다 낳아 놓습니다. 그렇게 낳아 놓고는 아무런 보호 조치도 취해 놓지 않고 한가하게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이 암타조는 다른 동물이 제 알을 밟아 터뜨릴 건지 아니면 그냥 무사할 건지에 대해서는 추호의 근심이나 관심도 없습니다. 참으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어미 타조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타조가 알에서 깨어나면 이 어미 타조는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합니다(16절).’ 참으로 이처럼 고약한 어미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 타조 어미에게 저런 지혜롭지 못한 지능을 주신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럴 수 없지요. 왜냐하면 타조알은 매우 견고하여 웬만한 무게로 누르지 않으면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짐승들이 그것을 밟아 깨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타조 새끼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튼튼하고 조숙해서 제 앞가림 다 하고 먹을 것 다 찾아 먹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갓난아이를 돌보듯 암타조가 그 새끼들을 돌보지 않아도 그 새끼들이 생존하여 자라나는 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암타조가 그렇게 자기 알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기 새끼들에 대해 무정하다고 인간이 그 타조가 무식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혹시 타조 어미가 자기 알들이 그렇게 튼튼하고 자기 새끼들이 그렇게 힘있고 똘똘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취한다고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그게 아니라 정말 암타조의 지능이 제 새끼들을 잘 돌볼 능력이 없을 정도라고 합시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암타조에게 저런 낮은 지능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분을 불의한 분이라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미 말했다시피 그분께서는 어미 타조에게는 낮은 지능을 주신 대신 알과 새끼 타조에게는 인간의 갓난애가 지닌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주셔서 타조 새끼들이 살아남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찌 타조의 낮은 지능뿐이겠습니까? 타조는 조류이지만 날개 성능이 정말 형편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타조를 새로 만들어 놓으셨다면 날아다닐 수 있게 하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 인간이 타조에게 저런 볼품 없는 날개를 주신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왜냐하면 타조는 정신차리고 달리면 말보다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18절).”

하나님께서 욥이 신실한 신앙인임을 칭찬하시자 사탄이 욥에게 환란이 닥치면 분명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버릴 것이라 장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신상에 여러 환란을 일으키도록 허락하시자 하루아침에 욥이 모든 것을 잃고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위로하려 왔다가 ‘너와 네 집이 무슨 죄를 지어 이런 화를 당한 것이니 겸손히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그런 화를 당할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항변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은근히 그렇게 괴롭히자 제발 하나님을 직접 뵙고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자초지종을 듣기 원했습니다. 욥은 악인들이 건강하고 평안히 살다가 죽는 것과 자기와 같은 죄 없는 자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정말 하나님께 묻고 싶었습니다.

욥이 자신의 올바른 삶에 비해 자기에게 닥친 고통과 불행이 너무 극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는 태도를 견지하자 마침내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욥40:7-8).” 이러한 상황이 닥친 것은 순전히 욥의 친구들이 욥의 숨은 죄를 추궁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욥은 그 이전에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당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무튼 욥이 하나님의 처사가 완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자 하나님께서 본문 말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욥이 상황판단을 바로 하도록 이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에게서 세상적 행복을 거두어가시는 게 그분께서 불의하시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세상적 복을 주시지 않는 게 그분의 불의한 성품 때문입니까? 여러분, 암타조에게 낮은 지능을 주신 하나님께서 불의한 분이십니까? 사람이 세상적 복이 있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사람이 세상적 복이 있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자들에게 세상적 복을 주셔야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느 의인에게서 복을 거두시면 분명 불의한 분이시지요. 그러나 소위 세상적 복이 사람을 타락하게 만들고, 세상적 복이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고, 세상적 복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면? 또 가난과 병과 사고와 불행들이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게 만들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찾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그 불행이 하나님과 인간을 더 가깝게 만든다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에게 세상적 복이 달아나고 화가 임하게 되어도 하나님께서 불의하시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세상의 지혜와 세상의 풍요로움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도록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있던 재물이 사라져도 거뜬히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인간은 병이 들어도 낙심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고, 인간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경외할 수 있는 능력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의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위대한 피조물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의 불행과 관련하여 하나님께는 절대 불의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악의 장본인이 아니시고, 그분께서 역경을 극복하고 신의와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최후 보상을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을 마음이 굳고 심지도 않으면서 거두려 하는 자로 알고 있었습니다(마25:24). 그러니까 한 달란트 받은 이 종은 주인이 자기에게 한 달란트를 맡겨놓고 폭리를 취하려 하는 자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마음이 굳은 자로 알고 있었다는 것은 손해를 끼치면 무자비하게 배상을 요구하는 성품을 갖고 있을 거라는 것이고, 심지도 않으면서 거두려 한다는 것은 남의 노동을 착취하여 이득을 보는 성품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만 생각하면 괜히 짜증만 납니다. 자기가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자는 한 달란트로 열심히 일해 이윤을 남기라는 주인이 싫어서 그것을 땅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온 날 다시 갖다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은 그렇게 천박한 인격을 가진 자가 아니었지요. 그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긴 자에게 그 다섯 달란트도 주었고 두 달란트를 더 남긴 자에게는 그것도 가지게 했습니다. 그 주인이 한 달란트를 받은 자에게 화가 났던 것은 ‘네가 정녕 나를 그런 천박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느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지혜를 짜낼 경우 열 달란트도 더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세요. 수천 억을 번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자기가 받은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주인을 오해하고 원망하다가 인생 망쳤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분을 불의한 분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착취해서 이득을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불행과 고통을 통해 무슨 불의한 이득을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 모두에게 한 달란트 이상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달란트는 세상이 주는 역경과 불행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런 분으로 믿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승리한 자입니다. 이미 성공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분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무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절대 마음이 굳은 분이 아니십니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계한(한계)을 정하여 문과 빗장으로 베풀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찌니라 하였노라(욥38:8-11).”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한계를 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태양과 달과 별들이 나타나는 시간과 그 길도 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바다의 한계를 정하셔서 그 물결이 땅을 덮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들짐승이 태어나는 시기를 정하신 분이십니다. 들짐승이 임신하면 몇 달 후에 새끼가 나올 것인지 정하신 분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시기와 한계와 길을 정하시고 지키시는 것은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이루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는 의인이 받는 고통의 기간과 그 정도의 한계와 좋은 결과로 나아가는 길을 정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한 번 쳐봐라, 그러나 절대 그 생명을 해하지는 말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 한계를 정하시는 그분께서 어찌 무정한 분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어미 타조가 그 새끼들에게 무정하게 보이는 것은 좁은 인간의 시각일 뿐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윤리의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여 ‘그분께서는 불의하시고 무정한 분이시다’라고 판결을 내리면 무식을 넘어 죄가 됩니다. 이건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명예훼손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첫 말씀이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38:2)?”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기와 한계를 정하신 하나님께서 욥과 같은 한 개인의 고난의 시기와 그 정도의 한계를 정하실 능력이 없으셔서 그분을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무정한 분으로 매도합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생각이지요!

행여 우리가 욥처럼 하나님을 오해하여 그분께 대한 서운한 마음을 품고 살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게 된 욥처럼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40:4)”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믿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복이 더 임하길 기원합니다.

>> 동토마 햇빛교회 김종택(Z^_stevi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