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1. 16. 동아 시사 발언대)
나아만은 옛날 이스라엘의 이웃나라 아람(시리아)의 장군이었다. 혁혁한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그에게 고민거리가 있었으니, 자기가 문둥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여자 종이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계신데 그에게 가면 병을 고칠 것이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아만은 많은 선물을 준비하여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엘리사는 밖에 나와보지도 않고 물론 선물도 받지도 않은 채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씻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엘리사의 태도에 나아만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해 자기가 생각했던 "공식적인 치료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황소를 잡아바치고 하나님께 큰 계시를 직접 받아 자기(나아만)에게 안수하며 고칠 줄 알았는데, 전혀 그게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먼길 찾아온 귀한 손님인 자기의 자존심을 팍 꺾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아만은 부하의 충고대로 자존심 상했지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씻고나서 깨끗하게 문둥병을 치료받았다. 그제야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진정 살아계신 신이심을 깨닫고 아울러 엘리사도 진정한 하나님의 종임을 깨달았다.
나아만 장군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독교는 의식(제의)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순종이 중요함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왜 엘리사는 나아만이 바랐던 그런 거창한 의식을 통해 그를 고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그런 의식이 병고치는 데 전혀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 나아만의 겸손한 태도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둥병들어 고침을 받으러 온 자가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을 선언하실 때 당신의 종을 통하여 하신다. 그분의 자녀들이 교만해지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거꾸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형벌을 선언하실 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의 입을 통해 하신다. 거룩하신 그분께서 직접 죄인에게 나타나시어 형벌을 선언하실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조폭 두목에게 친히 납시어 형벌을 선언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그렇게 할일이 없나? 대통령이 직접 자기에게 나타나 공식적으로 형벌을 선언 안한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정신나간 죄인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친히 공식적으로 복과 저주를 선언하셨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반대로 성경에 기록된 죄를 행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따라서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종이 복과 형벌을 선언하면 그 자체가 공식적인 복과 형벌을 재확인하는 절차가 된다. 겸손한 자가 혹시 죄를 지어 주의 종으로부터 화를 선언받으면 자기 행동이 성경에 위배된 것임을 깨달아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네가 무슨 하나님의 종이라고 건방지게 나에게 화를 선언하냐"라고 콧대를 높이고 거만하게 굴다가 졸지에 망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 복이나 저주가 공식적인 것이냐 아니냐 따지며 시비거는 자가 있다면 참으로 수준 낮은 종교인이다. 축복선언은 입학식에서 교장선생님의 입학허가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과거에 열심히 공부하여 입학시험에 합격한 자는 입학식에 불참하여 교장선생님의 입학허가 선언을 못들었다 하더라도 입학할 수 있다. 축복선언은 지금까지의 신자의 행동이 옳았고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면 그런 복이 정말 임할 것이라는 격려의 말씀인 것이다. 반대로 경고 선언은 앞으로 그렇게 계속 살면 화를 당할 것이니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씀이고, 저주선언은 거의 실형선고와 같은 것이다. 대통령의 사면이 없다면 형량을 다 채워야 하는 것이 법원의 실형선고이다. 저주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특별사면이 있어야 용서받는다.
위대한 성 어거스틴은 어느 날 어린 아이의 음성을 들었다. "주어 읽어라" 이 말에 순종하여 어거스틴은 성경을 읽었고 그 말씀이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를 변화시켰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도 의미있는 것이라면 순종하는 자가 큰 인물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자의 자격을 따지며, 곧 성직자로서의 지위고하를 따지거나 나이를 따지거나 학력을 따지며 듣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에 권위가 있다. 겸손한 자마다 그 말씀을 듣고 구원받고 복을 받으며 교만한 자마다 거만하게 굴다 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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