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들

성경적 예정론

stevision 2012. 12. 8. 17:08

 

(06. 9. 4. 동아 시사 발언대)

 

갈라디아서 1장 15절 말씀: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기독교 예정론자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지옥에서 영원히 벌 받을 자와 천국에서 영원히 복을 누리며 살 자들을 일방적으로 정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하여 창세전에 버림을 받기로 작정된 자는 아무리 착한 일 많이 하더라도 조그만 실수 하나로도 책임을 지고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더라도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된 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결국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저런 무지막지한 일방적인 예정론 때문에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 매우 그릇된 이해를 갖고 있다. 문제가 무엇인가? 문제는 문자주의적 성경해석과 무리한 획일주의다. 인간의 종교체험에 근거하여 (물론 하나님의 섭리와 영감 가운데) 인간의 언어로 씌어진 성경 말씀을 하나님께 역으로 적용하여 하나님을 규정하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현 창조된 세계의 시간 안에서는 자유의지가 없는 기계적인 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보다 성경의 문자에 대한 충성심이 더 큰 자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의 자유는 그분의 전지전능과 상충되지 않는다. 또한 영원에도 등급이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셨다. 이는 절대적 영원에 속한다. 몇몇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의 시간을 ‘영원’으로 규정해 놓고 이를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 하나님의 시간이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영원 전에 있었던 일이라 했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 영원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는 창조 이전의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규정된 영원을 절대적 영원인 양 착각하면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로 올려놓는 우를 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경우 하나님의 모든 창조 계획이 하나님의 존재와 같이 절대적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절대적 영원 전부터 기독교인 김종택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OH, NO! 이 세계는 하나님의 자유의지 하에 있는 우연적 존재이지 결코 필연적 존재가 아니다.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다. 절대적 영원의 차원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의 삼위일체만의 교제가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계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 것이다. 이 사건은 결코 절대 영원의 차원의 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절대적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의 어느 시기에 창조를 계획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이다. 이 창조 계획에 의하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가셔서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이 있었고, 죄인들 중에 성자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한 것도 있었다. 이러한 대략적인 사항이 창조 이전에 작정(예정)되어 있었고, 이것이 영원 전에 예정되었다고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영원은 절대적 영원이 아니라 단지 창조 이전의 어느 시점을 말한다. 창조 이후의 시간을 눈금이 새겨진 시간이라 한다면 창조 이전의 시간은 눈금이 없는 시간이다. 그래도 그 창조 이전의 시간은 엄연히 전후의 순서가 존재하는 시간이다. 창조 이전과 창조 이후의 시간은 연속성을 지닌 동일한 시간이나, 단지 창조 이후의 시간에는 눈금이 새겨져 있다는 차이가 있다. 두 시간 간의 질적 차이는 전혀 없다.

영원 전부터 특정한 인간들을 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로 택하셨다는 교리는 인간의 영혼을 물질세계 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만들어 놓으셨다는 속설과 보조를 맞춘 것 같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인간의 영혼이 창조 이전에 만들어졌다가 창조 후에 이 땅에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이 없다. 모든 실제 인간의 존재는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시작된다. 예정론에 아주 근접해 있는 사도 바울조차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모태”로부터 구별하시어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바울의 경우는 장차 어떤 한 사람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 복음을 전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에 의해 구체적으로 선택된 예이다. 따라서 이 경우 바울이라는 한 개인이 창조 이전에 예정된 게 아니다. 창조 이전에 예정된 것은 어느 한 사람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예정된 시점은 바울이 모태에서 잉태된 때이다. 예정론자들이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기를 좋아하나, 이 예정도 이 쌍둥이들이 어머니 모태에서 어느 정도 자라서 발길질 할 정도가 되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선택과 유기를 하심으로 결정된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어느 정도 부모의 의지가 작용하며,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탄생이 불확실성에 노출되어 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인간이 잉태되는 상황과 세상 상황을 보아가며 진행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바울과 다른 자를 모태에서부터 택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실 수도 있으셨다. 대개 인간의 예정은 일러야 모태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교조주의와 문자주의 성경 해석의 족쇄로 하나님을 속박하는 것이 종교사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과거의 계획이 현재의 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속박할 수 없다. 따라서 창조와 섭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는 다음과 같다.

1. 필요할 경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필요에 맞는 인간을 염두에 두시고 그런 인간이 태어나게 하실 수도 있으시다. 이 경우 예정은 잉태 이전이다.
2. 어떤 자들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강압적으로 인도하셔서 구원하신다.
3. 어떤 자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자이나, 도중에 변심하여 믿음을 버리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께서도 이 자들을 그냥 버리신다. 그 자들이 또 뉘우치고 돌아오면 다시 받아주신다.
4.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어 구원을 못 받게 하신다. 이 경우 그 이유는 인간이 알 수 없으며, 단지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 측의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마귀가 씨를 뿌려 놓았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5.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장차 구원받을 일부 혹은 모든 자들의 모습과 재능과 품성을 다 정해 놓으시고,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간이 잉태될 때마다 그 모습과 그 재능을 부여하시어 출생 후에 예수님을 믿게 하여 구원받게 하실 수도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자유도 있으시다. 그러함에도 구원받을 인간의 존재의 시작은 창세전이 아니라 모태에서부터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와 같은 5가지 경우를 다 사용하실 수 있는 자유가 있으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도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들의 행위를 미리 아시고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창세전에 구분하신다는 절대 예정론은 논리적 불가능성에 직면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강압적으로 인간들의 마음을 지배 안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보여주시고 장차 받을 복을 약속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이 동의하여 하나님을 따라 나섰다.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올 때 광야에서 하나님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아브라함의 자손을 다 버리고 단 한 사람 모세를 다시 처음부터 택하셔서 모세의 자손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청하여 간신히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버림받는 것을 면하게 했다.

이 이야기에서 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예정은 다음과 같다. “후에 어느 한 사람을 택하여 약속을 주고, 그의 후손이 말을 들으면 그 약속을 이행해 주고,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자를 택하여 다시 시작한다.” 이 예정에 의해, 아브라함이 모태로부터 선택되었는지 아니면 70세가 다 되어 선택되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하나님께 선택되었고,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을 따르기를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아브라함 대신 신자들의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려 하신 것이다.

여러 모로 볼 때 창세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장차 어떤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착하게 살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자들로 예정하고, 어떤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옥으로 예정하셨다라는 의미의 예정론은 옳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부모의 의지와 형편에 따라 세상에 태어나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태어나야 할 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인 예수님의 탄생을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성모 마리아를 설득하셨다.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시는 데도 일방적인 강압이 없었다. 하물며 온 인류가 태어나기도 전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와 버릴 자를 구체적으로 다 갈라놓으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 구원하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보낸다”라는 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라. 하나님께서 창조 전에, 장차 세상에 나올 모든 인간 하나 하나를 미리 다 정하시면 무슨 재미가 있으시겠나? 모든 인간과 그들의 탄생을 구체적으로 미리 정해놓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세세한 행동까지도 다 정해 놓아야 가능하다. 자신의 전지전능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과연 지혜로운 분이신가?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에서 찾나? 최후 심판의 정당성은 또 어디에 있고? 배우들의 대사를 구입하여 다 암기한 다음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감상하는 “능력 많은” 관객이 세상에 어디 있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자유의지를 가진 채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창조된 세상은 항상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진 세계이다. 살아 있는 변화무상한 세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이 열린 세상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뜻을 펼쳐나가신다. 때로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도 그 상황에 맞게 당신의 뜻을 펼치신다. 가변적인, 즉 규정되어 있지 않은 미래를 맞이하여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찾아야 한다.

한 인간이 잉태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그를 구원으로 택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어 구원에 이르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게 바로 일반예정이다. 분명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지식은 인간 스스로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도우심에 근거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 또 하나님은 은혜가 무한히 충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잉태 때에 택함을 받지 못한 자도 살아있는 동안에 언제든지 성령을 부어 주시어 예수님을 알게 하여 구원하신다. 이는 예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잉태되지도 않은 자의 모습과 재능과 품성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계셨다가 어떤 한 생명이 잉태되었을 때 그러한 특성을 그 태아에게 부여하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세상에 내보내시기도 한다. 이는 특별예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당신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보내시기로 예정하셨다. 이것이 바로 창세 이전의 예정이다. 이러한 구원 계획은 하나님께 다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다 사용하신다.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하고 죽은 자들인데, 이들에 대한 최후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 이들 중에 몇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우리가 “하나님 왜 저 저주받은 자들을 구원해 주십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나?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유로운 분이시다. 또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 했다고 자부하나 나중에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전혀 모르니 지옥에 떨어져라”는 심판을 받을 자들도 분명히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 다 해당되는 말이다. 맹목적 예정론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는 구원으로 예정되어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세상을 즐기며 대충 신앙생활 하다가 지옥에 갈 자들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마귀의 종이 되어 악마적 심성을 가지고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신자들을 핍박한 자들은 당연히 지옥에 던져진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었지만 양심에 따라 실수는 조금 있었지만 대체로 착하게 산 자들은? 내가 하나님이라면 이들을 구원해 줄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아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은혜를 베푸실 수 있으시다. 예수를 알게 해주시는 은혜와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다. 나보다 더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양심에 따라 착하게 산 자들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실까? 물론 영생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현 세상에서 구세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최후 심판을 행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님이시다. 최후 심판 때 자칭 기독교인들 몇을 지옥에 던지실 분도 예수님이시고, 혹시 모르지만 예수님을 이 땅에서 안 믿고 양심에 따라 착하게 살았던 자 몇을 천국에 들어가게 인심을 쓰실 수도 있으신 분도 바로 예수님이시다. 최후 심판자 예수님에 의해 온 인류의 천국행과 지옥행이 결정된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에게 있다. 물론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은 자들에 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자유와 권한도 예수께서는 갖고 계신다. 죄인인 인간 그 누가 구원에 관한 예수님의 자유로운 판결에 왈가왈부 할 수 있으랴! 따라서 우리는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라고 복음을 전해야 하고, 최후 심판에 대한 사항은 온전히 겸손한 마음으로 자유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신 예수님 손에 맡겨야 한다. 맹목적 예정론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보다는 예수님 안에서 하루하루 순종하는 삶이 더 안전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생전에 예수님 안 믿으시면 반드시 지옥 갑니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한다. 복음을 거부한 자가 자신의 의로움으로 최후 심판에서 천국에 갈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또 복음을 거부한 자들 중에 예수께서 최후 순간에 인심 쓰셔서 구원하실 수도 있으나, 그것은 이 땅의 삶을 통해 지옥에 가야 할 자를 ‘그 심판 순간에’ 천국행으로 결정한 것이므로, 우리가 전도하며 “지금 예수님 안 믿으시면 나중에 반드시 지옥 갑니다”라고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며, 또 그렇게 주장해야만 한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자라면 죽기 바로 직전이라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하실 것이다. 어떤 자가 지옥 갈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자를 생전에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를 안 주신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또 지엄한 복음을 교회에 맡기신 예수께서 최후 심판 때 지옥으로 정해져야 할 자들을 그저 간단하게 천국으로 가게 하실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듣고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확실하다. 다만 우리는 겸손하게 이 때에도 그런 자에 대한 구원 문제가 예수님의 자유로운 결단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된다고 믿어야 한다.

어거스틴과 칼빈을 비롯한 경건한 신학자들의 예정론은 나름대로 성경적 근거가 있고, 교회에 많은 유익도 주었다. 그럼에도 그런 극단적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지켜드리는 이점도 있었으나 너무 단편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다. 또 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것이 과거의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절대주권이어서 현재 자유로운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그로 말미암아 훼손되었다. 필자(Z^_stevision)의 예정론을 장로교 신자들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필자의 예정론도 사실은 필자 자신의 단편적 지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타인의 간섭을 지극히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위와 같은 예정론이 나온 것 같다. 필자는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교리나 신학도 싫다.

>> 그런데 위의 글을 써놓고 보니 성령께서 필자에게 다른 깨달음을 주셨다.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얻기 위함이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하나님의 자녀들을 얻고자 하심이 바로 창조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단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길가에 버려진 애들을 주워오시듯 그렇게 세상에서 아무 사람들이나 무작위로 택하셔서 구원하실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영원히 함께 살 당신의 자녀들의 모습과 성격과 이름까지 마음에 정해 놓으셨다. (그렇다고 미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영혼을 세상 창조 이전에 만들어 놓으신 것은 아니다.) 이 자들이 실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필요하고 인간적 잉태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격을 갖추기 위해 세상에서의 훈련기간이 필요했고, 그리하여 세상 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들을 갖추기 위해 세상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세상과 인간들이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구원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도 길가에서 애를 주워다가 자기 자식을 삼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자식을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직접 낳는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창조 전 만세 전에 당신의 자녀들을 마음에 품고(잉태하고) 계셨다가 세상의 창조를 통해 실제로 존재케 하시고,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라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새롭게 낳으신 것이다. 따라서 위에 전개된 예정론의 일부 내용은 인간적 시각일 뿐이다.

성경이 제시한 예정론은 구원받을 자의 예정론이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은 창세전에 마음에 두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자들을 창세전에 마음에 두실 이유가 있었을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비난할 자들이 있을 것이다. 창조 후에 세상에 나타난 자연적 인간들은 창세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 이들의 존재는 창세 이후에 우연히 생물학적 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이들은 생물로서의 인간들이지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들의 가치가 어떠한지 우리는 잘 모르고, 이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아셔서 처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께서 내주해 계시나 생물로서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질적 차이가 있다. 이 단지 생물로서 인간들인 자들의 최종처리는 분명히 있겠으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것을 알아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의 자녀들과 세상 사람들은 같은 인간으로서 피차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 그게 하나님의 법이다. 성경의 예정론은 장차 세상에 나타날 인간들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어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결정해 놓는 게 아니다. 또 미래의 행동과 전혀 무관하게 전 인류를 일방적으로 구원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로 창세전이나 인간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시는 게 아니다. 성서적 예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반드시 구원받게 하는 예정이다. 이 세상에 살며 기독교인이 된 자들 중에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 최종적으로 구원받는 자들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나게 하는 수단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의 인격을 지니도록 훈련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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